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9.11 사태 이후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 정권은 다양하고 상호복합적이었던 미국과 세계와의 관계를 선과 '악의 축'이라는 이분법적인 관계로 단순화했다고 캐플란은 비판한다. 그는 미국 흑인 여성 소설가 토니 모리슨을 인용하면서 용어의 개념화 폭력을 비판한다. "어떤 개념을 정의할 때, 의미는 개념화되는 객체가 아니라 개념화하는 주체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모든 개념화와 관계 설정은 필연적으로 권력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주체가 불순한 의도로 그 관계를 설정할 때 그 자체가 폭력이라는데 있다.
- 탈식민시대의 미국문화읽기<차이를 넘어서>, 제국과 오염된 언어, p78


에드워드 사이드를 기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앨피에서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책(정확히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서 지금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책 이었습니다.)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비교를 하자면 <차이를 넘어서> 쪽이 좀더 우리네 시각으로 깊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피박 입문서 <스피박 넘기>도 생각났습니다.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예전이나 탈식민 시대라는 지금이나 조금(혹은 다르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우리들을 지배(억압)하고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사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랬습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그냥 뭐 그렇게 우리들이 재현되는거구나."라고 생각하니 할말이 없어졌습니다. 최근의 중국에 대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시각도 그러하구요. 저 또한 그 예의 대륙 시리즈를 봤습니다. 과거는 다들 잊어버리나봐요. 오십보 백보라는 것도 잊어버리죠. 그건 웃을 일들이 아닌데 말이에요.
아 정말 짜증이 납니다. 분노의 마음은 그 부분들을 보고 일반화를 이룰려고하고 그 바탕으로 편협한 말을 하고 싶어지거든요. 참으려고 하지만 아 욕이 나와요. 심히 많이. 저 교만한 잡것들. 저 교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시각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던가? 제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에서 묘사되던 서양인들이 생각났습니다. 두통이 심하니 도끼로 머리를 쪼개던... 그들은 뭐라고 해명할지 궁금하네요. ㄱ-
요즘 신문들을 보면 그냥 하나의 사건이 입장과 견해와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보여지니까 뭐랄까 설명하기 어려운데 숨어버리고 싶은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저런 글을... 어떻게? 나중에 쥐구멍에 숨고 싶지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주로 듭니다. 책에서는 주로 인종적으로 하위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재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건 사실 예의 그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재현이기도 하자나요. 재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최근의 사태들을 생각하면, 멀리 갈 것도 없네요. ㅁㄴㄹㅂ씨. 저 또한 스스로 재현 할 수 없는 존재이겠지요. 소인이 쓰는 글들이 화제가 되어서 언론에 다루어 진다면 뭐라고 재현할지 그냥 눈에 그려집니다. 대다수의 우리들은 모두 하위주체 인가 봅니다. 스스로 입장을 해명할 기회도 없이 모든것이 검열되고 그들의 입장으로 재현되는 존재.
제인에어의 반대 시각인 식민지배를 당했던 그네들(혹은 우리들)의 버젼의 그 소설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번역본이 있나 없나 찾아봐야겠네요. 전 제인에어 어릴때 매우 좋아해서 몇번이고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그 다락방에 있는 현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렴풋하게 알꺼 같습니다. 그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재현자이며 방조자이기도 하며 그녀를 그렇게 만든 협조자 이게도 하겠지요. 제인을 포함해서요.

책에 대해서 사실 가장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표지 일러스트 입니다. 그 일러스트가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들을 들게 하더군요. 결론은 명백한 불쾌함 입니다. 사슬을 깨는 사람의 크로키를 반전한 느낌의 일러스트 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근육질의 남자 이었어요. 여기서 하는 말. 근육질의 남자이군요. 아쉬웠습니다. 좀 많이. 틀이나 굳어진 것들을 깨부수는 건 굳이 근육질의 남자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외소한 남자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근육질의 혹은 외소한 여자나 어린 아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몸의 한 부분이 없는 사람이라던가요. 가장 바람직한건 다양한 존재들이 사슬을 깨는 느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것들을 넘어서는 책에 그런것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미지인거 같아서 좀 많이 아쉬워요. 저 일러스트는 그냥 지금까지 우리들 사회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한것 뿐인거 같아요. 강한 존재가 먼가를 세우고 일으키고 부수고 그 강함은 힘의 강함. 그래서 근육질로 채현되는 것. 결국 우리는 근육질의 강한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서 기존의 강함을 깨부숴야 하는 메세지도 있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문 디자인은 신선했습니다. 각주를 하단이 아닌 책의 중심(제본되는)쪽으로 빼서 거이 2단 단행본으로 만든 방식도 신선했습니다. 기존의 인문학 책들에서는 보지 못한 편집 방식이었어요. 본문을 박스에 넣었는데 위와 아래가 여분이 적당해서 시원해 보이는 구조도요.

+
고백하자면, 저는 사실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말아서요. 현재는 그 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OTL  기억나는 문장은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의무가 있는데 말이지요. 뭔가 흐름을 못 타면 산 책도 읽기가 힘들더라구요. 변명아닌 변명이었습니다. 관심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 다시 돌리기가 어려운거 같습니다. 지금의 관심은 동일하다면 동일한 방향이겠지만, 좀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책들을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체성에서 그런 부분은 결코 이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돌고 돌아서 돌아가겠지요. 스스로를 위한,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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