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남성의 여성 혐오는 타자에 대한 차별인 동시에 모멸이다. 남성은 여성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 여성 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된다.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매우 빼어난 문장 솜씨로 표현한 글을 인용해보자. 스즈키 미치히코가 고자쓰가와 사건의 범인인 이진우에 관해 1966년에 쓴 '악의 선택'이라는 문장 가운데 일부이다.


소년이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절망적인 한 마디를 내뱉었을때, 이 '조선인'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해 무엇을 의미하는 건일까? 말이란 그 자체로서 역사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멸시의 의미를 지닌 '조선인'이라는 단어는 그저 인종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우리는 '나는 일본인이다'같은 사실 확인적 의미로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말을 일본어로 말할 수 없다. 일본어밖에 말할 수 없는 소년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 속에서 만들어진 이 '조선인'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어쩔수 없이 내면화 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 문학자이면서 마르셀 프루스트 연구로 유명한 스지키가 어째서 이진우에 관해 논하고 있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그가 이진우를 '일본의 주네'로 불렀다는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장주네-도둑이자 시인이며 동성애자-는 샤르트르에게 <성주네>(1966)라는 대작을 쓰게 한 일탈자다. 소년 시절 주네는 어느날 조그마한 절도가 발각되어 도둑이라는 딱지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모두가 나를 도둑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나는 도둑이 될 것이다."운명을 선택으로 변화시킬 자유야말로 사르트르를 매혹시킨 '실존적 자유'의 행사였으며 스즈키는 이진우 속에서 같은 것, 즉 운명을 선택으로 바꾼 '악의 선택'을 본 것이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여성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이다. '나는 여성이다'고 자인하는 것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이진우의 '조선인'이 그랬던 것 처럼 '여성'이라는 범주도 모멸로 뒤덮여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언어 세계 속에 뒤늦게 태어난다. 언어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타자에게 속해 있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나 이전에 존재하며 '너는 여자다'라고 타자에 의해 지명된다. 그리고 '그래, 나는 여자야'하고 스스로가 정의했을 때 여성은 태어난다. 알튀세르가 말하듯, '여자'라는 호명에 답했을때 '여자'라는 주체가 태어나는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가 <유대 문화론>(2006) 속에서 유태인이란 그 범주에 '뒤늦게 등장한'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여성'도 (그리고 '조선인'도) 그 범주에 '뒤늦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범주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 범주가 역사적으로 짊어진 모든 하중을 동시에 떠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 이외의 '자유'로운 선택은 없다. 스즈키는 이 역설을 이진우를 예를 들어 훌륭하게 풀어낸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여성에 대입하여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는 자들을 가르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여성 혐오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그런 여성이 있다면)에게는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때때로 "나는 내가 여자라고 하는 사실에 얽매여본 적이 한번도 없다"며 고집하는 여자들이 있는데 그 말을 다른 의미로 번역하면 "나는 여성 혐오와의 대결을 줄곧 피해왔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성'이라는 강제된 범주를 선택으로 바꾸는 것- 그 안에 해방의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 p156, 제8장 근대와 여성혐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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