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 권혁범, 김기중, 박노자, 김은실, 권인숙
유명기, 김근, 김진호, 전진삼, 문부식, 삼인, 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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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비평 편집진이 모여서 만든 당비 특별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 내용은 책제목 그대로 우리 주변에 친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파시즘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인의 리뷰
http://tsuyodung.tistory.com/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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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 동안 이어진 가뭄 끝에 잘랄라바드 하늘 위에서 단비처럼 항공기 기내식 포대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문화적 무지와 몽매는 차라리 잊자. 수개월동안 끝도 없이 이어진 굶주림과 찢어지는 가난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몰이해에 기초한 미 정부의 식량 공수 여론 몰이는 아프간 민중의 극심한 고통과 비극을 이용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잠시 시나리오를 뒤바꿔 보자. 탈레반 정부가 뉴욕에 공습을 감행한 뒤 "우리의 목표는 미국 정부와 정책일 뿐"이라고 항변한다고 상상해보라. 공습 중간에 잠깐씩 아프간 국기가 세겨진 아랍 음식 봉투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말이다. 선량한 뉴욕 시민들이 이런 것들 때문에 아프간 정부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들이 배고프다손 치더라도, 식량이 정말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공중 투화된 음식을 먹었더라도, 어떻게 뉴욕 시민들이 자신들이 꺽은 모욕과 탈레반의 생색 내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최근 사우디 왕자가 미국의 중동 정채의 우호적인 조언과 함께 보낸 1천 달라짜리 선물을 정중히 거절했다. 자긍심은 부유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촉발되는 분노는 테러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발시킨다. 중오와 복수심은 한번 열어버리면 다시 닫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테러리스트와 그들의 지원자들이 죽을 때마다 수백 명의 죄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수백 명의 무고한 인명이 살상될 때마다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이 다시 생겨나고 만다.

이런 악순환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말장난을 잠시 졎혀 두고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연 모두가 받아들일수 있는 '테러리즘'의 정의를 발견해 냈는가? 한 국가의 테러는 다른 국가의 자유를 위한 투쟁일 때가 많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 뿌리 깊게 배여 있는 폭력이라는 모순에 놓여 있다. 일단 폭력이 정당한 정치적 도구로 용인되면 발란이건 자유를 위한 투쟁이건 간에 테러는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미 정부 스스로도 전세계적으로 반군에 대한 재정 및 무기 지원과 보호를 해왔다. 미 중앙정보국(CIA)과 파키스탄 쳡보부(ISI)는 지난 1980년대 친소 아프간 정권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규정됐던 무자헤딘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 무자헤딘과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미국 건국의 영웅들과 도덕적으로 동격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전쟁은 평화다, 아룬다티 로이,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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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상에서 카메라의 눈앞에 노출되지 않는 고통이란 없는 듯 하고, 다시 우리는 미디어가 펼쳐내는 이 고통의 이미지들의 과잉 앞에 노출된다.
정지영상이나 동영상에 덧씌워지곤 하는 모자이크는 오히려 이 고통의 스펙터클을 더 사실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그 이미지 속에 재현되고 있는 고통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와 시공간을 같이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정작 고통 자체는 증발되고 사라진다. 우선 고통의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충격의 효과들은 그 자체로서도 단명할 뿐 아니라, 상업주의 매체들이 유발하는 끝없는 자극의 인플레로 인해, 하나의 고통이 이미지가 유발하는 충격과 자극은 곧이어 또 다른 고통의 이미지에 의해 쉽게 상쇄되기 때문이다.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고통, 그것도 타인의 고통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의 스펙터클의 외설성 그 자체에 있다. 투명함, 황홀경, 외설 등의 모든 것이 지수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포화 속에서 보드리야르는 역사, 정치, 성, 주관성, 육체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에 주목했다. 고통 역시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사라진다. 살을 에[는 체험으로서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동정과 공유는 이미지 속에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현되는 고통 역시 그 실체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탈)현대사회의 대중매체에서 맥락에서 탈각된 이미지들은 몽타주 속에서 고통 역시 파편화되며, 그 고통을 유발한 사회적 관계망은 이미지들의 연쇄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그 결과 고통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개인적 불행의 일회성 이미지들, 자신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상실한 고통의 이미지 덩어리로 간락한다. 나아가 고통의 이미지들뿐 아니라 고통 자체가 그렇게 된다. 사진의 발명 이래 시각 이미지는 최고의 존재증명으로 군림해왔고, 이제 21세기의 시각 이미지들은 인간의 눈에는 기술적으로 거이 완벽하다. "여기 있다. 무슨말이 더 필요하냐?"는 이 이미지들의 극사실주의는 고통과 관련된 반성적 사유를 봉쇄해버리가 십상이다.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스스로를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매혹은 더 이상 생산의 양식이 아니라 사라짐의 양식이다. 그 매혹이 고통에의 그 아슬아슬한 매혹이라 하더라도.

-고통의 스펙터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주은우, 167p~168p,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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