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현을 동시에.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 p154



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강간문화는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는 강간을 염려하여 자신의 행동을 제약한다. 대부분의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는 강간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따라서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가 남성 인구 전체에게 종속된 위치에 머물도록 만드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간을 저지르지 않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강간 피해자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여자들은 다 겪는다, 21세기의 단어들, p191



'성적 권리의식'이라는 표현은 2012년에 보스턴 대학 하키팀의 성폭행과 관련해서 널이 쓰였는데, 그보다 더 앞서 쓰인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 용어를 처음 들은 것은 아시아의 강간 실태에 관한 조서 결과를 보도한 BBC뉴스에서였다. 조사에 따르면,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요즘도 여자들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옷차림이, 우리의 모습 자체가, 우리가 여상이라는 사실 자체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응당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다 겪는다, 21세기의 단어들, p193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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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 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런 범쥐를 저지르는 사람이 사실상 거의 전부 남자이긴 해도,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자가 폭력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남자들도 분명 폭력을 겪는다. 주로 다른 남자가 가하는 폭력을. 또한 모든 폭력적 죽음은, 모든 폭행은 다 끔찍하다. 여자들도 친밀한 파트너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실제로 행사한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조사에 따르면 여자의 폭력은 심각한 부상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드물고, 하물며 죽음으로 귀결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한편 남자가 파트너에게 살해될 때는 여자의 정당방어인 경우가 많은데, 수많은 여자들이 친밀한 상대의 폭력으로 병원이나 무덤까지 간다. 어쨌든 지금 이 글의 주제는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 유행벙처럼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친밀한 상대의 폭력과 낯선 사람의 폭력이 모두. 

가장 긴 전쟁, p37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긍국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가장 긴 전쟁, 당신은 죽일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p45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인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도 그런 상황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외가 있긴 하다. 지난여름, 누군가가 내게 편지를 보내 대학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강사는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강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들을 취하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젋은 여학생들은 자신이 늘 교모한 방식으로 경계하고, 세상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사전에 조심하며, 기본적으로 아주 자주 강간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말했다(내게 글을 쓴 남자가 덧붙이기를, 남학생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세상을 가르는 간극이 일순간이나마 갑자기 가시화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다. 인터넷에서 '강간을 피하는 열가지 요령'이라는 그래픽이 도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런 조언은 대개 젋은 여자들이 너무나 자주 접하는 뻔한 내용이지만, 이 그래픽에는 전복적인 반전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거 였다. "호루라기를 갖고 다니세요! 당신이 '실수로' 누군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면 주변 사람들에게 호루라기를 건네어 그들이 도움을 구하도록 할 수 있으니까요."(여느 강간 대처 요령을 비꼰 이 그래픽의 열가지 조언은 다음과 같다. 1. 여자의 음료에 약을 타지 말것. 2. 혼자 걷는 여자를 보면 가만히 내버려둘 것. 3. 차가 고장난 여자 운전자를 도울 때는 그녀를 강간하지 말 것. 4. 여자가 승강기에 탔을 때 강간하지 말 것. 5. 부서진 문이나 창문으로 여자의 집에 숨어들어 강간하지 말 것. 6. 여자를 공격하지 않고 못 배긴다면 늘 친구를 대동하고 다닐것. 7. 잠들었거나 의식을 잃은 사람과의 관계는 섹스가 아니라 강간임을 명심할것. 8. 호루라기를 갖고 다닐 것. 9. 정직이 최선임을 명심하며, 데이트하는 여자를 강간할 생각일 때는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것. 10. 강간하지 말것)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이 말은 사실 끔찍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느 지침들은 그런 상황에 대해서 조언할 때 예방의 책임을 전적으로 잠재적 피해자에게만 지움으로서 폭력을 기정사실화한다는 점이다. 대학은 여학생들에게 공격자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집중할 뿐 절반의 학생들에게 공격자가 되지 말라고 이르는 일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나쁜 이유는 아주 많다). 

가장 긴 전쟁, 우리 세상을 가르는 간극, p51 



이 나라에서는 매년 87,000건이 넘는 강간이 벌어지지만, 모든 사건은 제각각 동떨어진 일화로만 묘사된다. 점들은 하도 바싹 붙어 있어서 하나의 얼룩으로 녹아들 지경이지만, 그 점들을 잇거나 그 얼룩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은 이 사건이 시민권 문제이고, 인권 문제이고, 모두의 문제이고, 고립된 일화가 아니며, 두번 다시 용인되어서는 안 될 문제라고 말했다.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일이고, 나의 일이고, 우리 모두의 일이다. 

가장 긴 전쟁, 조티 씽을 기억하며, p63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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