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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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비토>, 이사키 우타, 대원
병기로 태어난 혹은 만들어진 존재 '사야비토'에 대한 이야기. 사야비토는 주인과의 계약에 의해서만 존재 할 수 있으며, 계약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계약자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야비토 역시 소멸하게 됩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존재 없이는 존재 할 수 없는 사야비토와 그 주인 아도에 대한 이야기로 사야비토로 존재함으로써 하는 고민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에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아름다운 그림체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주제를 가지고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습니다. 사야비토는 계약자 개인의 목적으로만 결코 이용될 수 없으며, 공공적인 역활을 하도록 의무지어져 있다. 고로 사야비토를 관리하는 기관에서는 사야비토들이 그 계약자들에 의해서 이기적이기만 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활을 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들이 만나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로 사야비토와 계약자인 이도 그리고 주변의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모습들, 그리고 그안에서도 인간답기(?) 위해서 부던히 노력하는 그들을 응원하는 만화라고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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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마리아군>2, 다이 시이나, 학산
완결권이에요. 엉엉엉 ㅠ_ㅠ 귀여운 마리아군과 토쿠코와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많이 아쉬웠어요. 이야기 전개가 삼자 관계 말고 그냥 일상 위주로 전개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1권에서도 나왔던 마리아를 다른 의미로 노리는(?) 또 다른 분이 등장했어요. 뭐 그래도 흔히 나오는 연애의 삼자관계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두사람이 결혼해서 비실비실한 아빠와 초강력한 엄마와의 조합을 구경하는 재미도 좋을것 같은데...여러모로 아쉽네요. 전 좀 연재가 길어질 줄 알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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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노래한다>9, 타카야 나츠키, 서울
전 사쿠야의 행복을 가장 크게 바라고 있는걸 여실하게 느낄수 있는 9권이었어요. 그래서 그녀의 귀환(?)은 여러모로 걱정이 됩니다. 그냥 이대로 랄랄랄라~라면 엔딩이라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그들(사쿠야와 치히로)에게 좀더 시련을 주어서 관계를 튼튼하게 만드려고 유도하는 건지...
뭐 사실 치히로에게는 그녀의 문제가 극복 될리도 만무하고 지금 이대로 사쿠야와 함께하는 것을 선택한다고 하여도 그게 그대로 유지될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하지만, 이건 좀 빠른것 같다는... 이제 좀 안정을 찾아가는 치히로에게도 그렇고 사쿠야에게도 그렇고. ㅠ_ㅠ 모두가 '행복'해지는건 불가능 하겠지만, 적어도 잠깐이라고 하더라도(전 사쿠야가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눈물이라는 걸 가정하고 있어요.^^;;) 사쿠야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전 사쿠야를 응원하는 1인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상대방의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존재일것 같아요. 특히 스트레스 상황일때는... 취약해지니까요. 그러는 의미에서 저는 치히로가 동경에 돌아가서 그녀와의 감정적 유대나 혹은 연결을 매듭(?)을 짓고 돌아오기를 희망해봅니다. 지금 그녀에게 남는건 좋아하는 마음보다는 책임감이나 의무 죄책감쪽이 더 큰게 아닐까 싶거든요. 그런 마음들은 좋아하는 마음을 이기지는 못하죠. 그냥 그 의무감에 상대방에게 남아 있는것은 상대방에게도 자신에게도 정말 못할 행동을 하는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돌아와줘!! 아오이군!! -__- 내는 자네가 동경에 머무는걸 허락하지 못함세. 가능한 가장 빨리 돌아올것을 명령해보지만.... 일개 독자인 나의 목소리가 자네에게 들리리는 만무;;;; (어유 덕후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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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노래한다>7, 타카야 나츠키, 서울
카나데가 그런 모습으로 힘들게 일어나려고 하는 그 이유를 알게되는 권이었습니다. 아 보면서 정말 진심으로 카나데의 부모에게 분노가 치밀더군요. 누구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이 아닌 이야기에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 보는 이유가 뭐냐고. 저 아이의 이야기는 이야기속의 이야기지만, 분명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저자인 타카야 나츠키씨에 대해서 그 양반의 그런 여러가지 패턴에 대해서 자가 복제 성향이 강하다던가 아니면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뭐 작가라면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반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런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는 이 양반이 평생을 걸처 작품에 나타나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굉장히 힘들고 고된 작업이니까요. 극복이라는 말은 아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건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들이 더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 이외에 달리 뭐가 있을까요? 저자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를 그려나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작품의 캐릭터들을 보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에 대해서는조금씩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내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작업인지 보여주는 것 그자체가 전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디선가 그런 상황으로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힘을 줄수 있으니까요. 분명 그녀의 메세지는 그 누군가에게 도달하리라고 믿습니다. 
카나데에게 저는 앨리스 밀러 여사님이 자신의 수많은 책에서 했던 이야기인 "부모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동이 해야할 일 또는 의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칼 로저스에 의하면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하는 긍정적 존중에 '가치'라는 어른들이 내세우는 조건이 붙으면서 인간(유기체)의 '실현 경향성'에 '왜곡'이 일어나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군요. 부모가 만들어낸 혹자는 심어버린 이상적인 자기는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온전히 형성된 현실적 자기와 충돌하여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고 이상적 자기와 현실적 자기의 충돌에 의해서 그 개인은 많은 문제로 버거워 한다고... 
카나데가 앞으로 나감에 있어서 그 부모들이 그에게 만들어준 그런 배경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그를 잡고 늘어질지 아무도 모르겠죠. 그 자신도 모르고, 그 부모도 모르고... 그래도 그는 용기 있는 아이니까 그리고 함께 나아갈 사람도 있으니까 결코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믿습니다. 언젠가는 그런것들이 극복된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고 그런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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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의 카리스마>4, 쿠미코 스에카네, 대원
어라라 판이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커지는 형국입니다. 사실 저는 이 주제로 썰을 푸는 것은 대충 4~5권 정도면 끝나리라고 생각했는데요. 이야기가 굉장히 길어질것 같아요. 전권에서 테러를 일으켰던 주범들은 그들의 전세대였습니다. 유명인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태어난 사람들은 그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세대. 그리고 더 이전 세대도 있었습니다. 5권에서는 그들 이전 세대의 이야기를 풀어낼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사라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답을 내리게 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던가 숙명은 바뀔 수 없다는 그런 메세지들이 많이 생각나고 그리고 고민하게 만드는 전개였습니다. 선택적 죽음에 대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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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연약한>12, 이케미 료, 학산
15살 이던 그녀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그 사건의 다른 면을 인지하려고 노력한다는 게 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아아 해피일것 같아'라고 말했더니 그녀가 말하더군요. '너는 그 엔딩이 해피라고 정말 생각하느냐고...'. 분명 그건 극복 될 수 없는 경험이지만, 그걸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그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것도 굉장히 불행한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감정의 공유는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그건 불가능 한게 아닐까요. 그저 감히 추측할 따름이죠. 자신의 고통에 비추어서... 다만, 그들이 그들의 고통을 서로 보듬어 주는 과정에서 그게 그저 소비적으로 반복되는 불행의 패턴이라면 그건 굉장히 슬픈 문제이겠지만요. 그들은 그런 느낌은 아니고 그 상처들을 정면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앞으로 나아갈려고 노력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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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 쇼콜라티에>, 미즈시로 세토나, 대원
전 단걸 좋아하는데다가 세토나님의 작품이라서 그냥 잡았습니다. 맹목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과연 형태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그런 이야기에요. 한 여자를 짝사랑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초코렛을 만들게 되고... 그의 세상의 중심은 그녀를 향해서 돌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지 가능한 걸까요? 인간의 취향이라는 것은 그런 충족된 조건일 따름인걸까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그러는 의미에서 그녀가 그에게 넘어온다면 뭐랄까 굉장히 불쾌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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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장미 앨리스>, 미즈시로 세토나, 삼양
전 이분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적당히 고민하게 만들지만, 결코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일은 없어서 인것 같아요. 저로서는 예측하기 힘든 전개도 좋지만요. 그가 사라져 버려서 상당히 아쉬웠던 한권이었어요. 그가 표현하는 느낌이라던가 그런것들이 좋았거든요. (여기서 그는 그로... 말해버리면 굉장한 네타인것 같아서요. 최근에는 네타를 조금 주의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지인중에서 본의 아니게 저에게 네타를 당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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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한다>1~6, 타카야 나츠키, 서울 
'부모'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 언제나 화두를 던지는 타카야 나츠키 선생은 사실 <날개의 전설>때부터 좋아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후르츠 바스켓>을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 <날개~>때와 매한가지로 여전히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의 아픈 부분을 보듬어주는 토오루가 있었고 그리고 토오루와 고양이군을 응원했지만, <후르츠 바스켓>작품내의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와 그리고 그 여자의 캐릭터를 견디기가 힘들었었다. 뭔가 단행본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나락에 빠지는 기분이랄까. 뭐 여튼간 당시에는 그런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었고 그래서 지금도 <후르츠~>의 엔딩은 모른다. 그 후 전개도. 
그 시점으로 이 양반에 대한 애정을 접고 있다가 현재 출간되고 있는 <별을 노래한다>를 잡았다. 동기는 그냥 최근의 이 양반은 어떤 상태일까에 대한 궁금증에 가까웠다. 백천사 라인쪽에는 좋아하다가 대작이후에 망가져서 다시 볼 용기조차 내기 힘든 작가분들이 많은 관계로 이사람도 그렇게 되었는가 아닌가가 주요 관심사 이었다. 이 양반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는 항상 일괄되게 관통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연재작에서 그 부분에서 그 이전보다 굉장히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권에서 아오이가 치히로의 부모에게 외치던 절규는...
 
" 경찰?! 웃기지 마! 어른은 그렇게 태연하게 짓밟고서도 보호받는거야? 
그런데 왜! 이건 너무하잖아. 왜 사쿠라는! 왜 아이들은 지켜주지 않는거야...!!!"

부모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받지만 부모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쿠야. 아이는 부모의 애정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아이들의 마술적 사고안에서는 부모의 그런 학대하는 모든 행동들에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 보통 일반적인 반응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뻔하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던가. 아니면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야기한다던가. -_- 
학대받는 아이들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에게 거는 최면이 얼마나 강력한지 생각하면... 나는 달려가서 그 부모를 정말 ... 아 정말 그런 어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기에 이 분노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아이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부모에게 화를 내는 것이... 그네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이외에 살수없었다는 당위적인 이유를 대어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에게 화를 내야겠다. 당신이 성인이 되서도 성인아이로 남아있어서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식과 배우자에게도 당신의 그 불행을 노래하는 거지같은 사고의 패턴이 침식하고 있으니 책임지라고. 제발 좀 정신좀 차리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성인아이인 부모라면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현 상태를 그 주제를 알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퍽이나 그런게 가능하겠는가. 분명 그들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겠지. 차라리 제도적으로 뭔가 장치가 마련되었면 하는 하는 바램이다.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인간이 인간(아이)을 키우는 무거움에 대해서 말이다. 아이는 당신의 삶의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서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구. 

부모에게 애정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도록 사쿠야는 부던히 노력했지만, 그녀에게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아이의 고통어린 호소는 들리지 않는 부모. 자신의 삶(이익)이 우선이기에 아이는 도구도 아닌 쓰레기로 취급하고... 존재자체를 부정받는 그 상황에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치는 거의 없다고 보는것이 답이겠지. 
부모로부터 방치와 부모화를 요구받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부모에 대한 애정을 포기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한 방법으로 가면을 쓴 아이 치히로.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엄마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매달리다가는 자신까지 망가지겠다 싶어서 엄마를 포기했다는 그의 말. 그래서 더더욱 그녀(사쿠야)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그. 굉장히 달라보이지만 결국 똑같은 두아이. 두아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었던것 뿐.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르니까.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은 이 사람이 뿌린 다른 장치(주로 개그지만)들로 인해서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고통스런 부분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온다. <날개의 전설>에서도 버려진 아이의 상징으로 나오던 그녀. 그리고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따라다니던 그 또한. <후르츠 바스켓>에서도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원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에게 치명적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은 정말 나름대로 그 나이의 아이로서는 잘 견디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별의 노래한다>에서는 주인공인 시이나와 아오이뿐만 아니라 시이나의 동거인이자 보호자인 카나데도. 그리고 친구인 히지리와 유우리또한 그런 부분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자식을 방치하는 누나로 부터 조카를 대려와서 함께 사는 아오이의 삼촌에게도 그런 부모가... 그러니 아오이의 엄마는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그런 방법으로 반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최근 읽는 책에 의하면 자신의 성격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세대는 부모 그리고 조부모 또한 자신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친다고 나와있었다. 치히로의 엄마는 '어떠한 이유에서 그런 삶을 살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삶을 거의 놓아버린 아오이 앞에 나타난 치히로. 그들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개인적인 생각은 그들의 만남은 고통을 알기에 그 고통에 반응해버린게 아닐까 싶다. 상처가 있는만큼 보인다고 생각한다. 평범하다고 말하는 범주의 삶을 선택받은 아이들은 아래에 내려와도 이해하기 힘든 공감대. 아오이 자신을 위해서 사쿠야를 사쿠라로 보고 말을 했다고 해도, 사쿠야는 구원받았다. 그의 말에. 온전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데 그 사랑스러운 말에 행복해지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말은 매우 반짝거리는 말들이었다. 그가 그 말을 하게된 이유도 그녀에게 그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직감 혹은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라.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도 결핍된 부분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고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라.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살아감에 있어서 그 구멍은 메워지는 것이 아니니까 또 그 구멍을 다시 만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구멍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반짝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고통 받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현재가 있어야지만 가능하리라. 앞으로 나아가는 사쿠야와 카나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치히로는 그녀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두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다행히 그의 과거를 알게된 사쿠야는 여전히 그에게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그런 사쿠야를 걱정하는 히지리는 치히로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만, 그녀의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에 그녀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되었고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을 서로 보듬어 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다음권을 봐야지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걱정하는 마음이 줄어든건 괴로워 하는 치히로를 보듬어 주면서 생각하던 카나데의 독백때문이었다. 힘내렴.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들을 안고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건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때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아마 네가 옆에 없었다면 그만큼도 버티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마 나만이 아닐꺼야. 그것을 알기에 그녀도 그런 행동을 했던거고. 어른들이 해줘야 할 부분을 그 사람들이 방치해서 그렇게되어버린거야. 원가족과 분리하는 것은 제도권의 시스템과 그리고 원가족의 다른 한 부모가 그 사태를 정확히 알고 개입해야지만 가능한데, 그들은 자신들의 그 구멍을 체우기 위해서 당신들의 딸을 희생한... 그 구멍은 다른것들로 체운다고 해서 체워질 구멍이 아닌데 말이지. 


+
아아 보다가 얼마나 빡치던지. 최근에 읽고있는 존 브레드쇼의 <가족>에서 읽은 문구들이 머리에서 빙글빙글. 더 짜증나는건 내 주위에도 저런 부모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 그리고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치히로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분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새삼스럽게 화가나서... 새삼스러울것도 없지만. 굉장히 현실적인 작품들을 보면 감정이입이 되는게 가장 문제인것 같다. 그래서 이 양반의 전작은 읽다가 포기했는지도 모르지.  
작품은 작품으로 즐겁게 분리해서 보면 참 좋을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나의 안에서 분노가 여전히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자신의 분노나 슬픔이나 체념에 대해서 스스로가 그만큼 잘 알아주지 않았다는 그 증거겠지. 그리고 저 이야기가 현실에 가까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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