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N포털의 만화 카페에 <나의 지구를 지켜줘> DVD 나눔글을 올리면서 인지하게 된 부분이 있었어요. 그건 다수의 사람들이 탱알과 링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오직 현재 행동만을 기준으로만 그 사람을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인간 군상의 이해하려면, 과거를 토대로 지금에 이어지는 삶의 궤적의 전반을 통하여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지니까 당연히 다른분들도 그 두사람이 그런 성격으로 살아가게 된 이해가 어느정도 있을거라고 기대했었어요. 그래서 좀 적잔히 놀랐습니다.
<터치> 연재에서 처음 접했던 이 작품은 십대 시절에 큰 영향을 받았던 작품이었는데, 정확히는 주인공 링의 전생이었던 탱알에 대하여 심정적인 공감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거 같아요. 이 작품이 전생붐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솔직히 저에게는 그 설정보다는 초능력을 사용하는 설정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거 같아요.
링이라는 아이가 자신이 가진 능력을 기반으로 어른에게 가하는 위협들이 저에게는 굉장히 인상적 이었거든요. 밤에 아파트 배란다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그림자가 아파트 벽면에 움직이는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근데 뭐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캐릭터가 가진 힘으로 인하여 자기보다 나이가 있는 존재-권력을 가지고 있는-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 통쾌함을 느꼈던것 같아요. 이중적인 다른 이들의 모습에 조소를 던지는 그 꼬꼬마의 시니컬함을 좋아했었어요.
그 시절에는 옳고-그름의 이분법적인 가치관의 기준으로 하여 모든것을 환원하던-주관적인 느낌으로- 탱알과 반대 포지션이었던 옥란에 대해서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의 가치관은 어떤 것이던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환원하는것은 매우 폭력적인 행동이며, 개개인의 행동을 고려할때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은 그 가이드 라인에서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일원적인 태도로 환원-사실 매도라고 말하고 싶지만-하는 그런 폭력적인 판단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어요.
이분법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알겠지만, 상대방이 제시하는 프레임 안에서는 어떤식으로든 건설적인 대화가 이어지는게 불가능한데요. 뭐 아마도...? 저는 그랬습니다. 그 사람의 프레임으로 가지고 대화를 나운다면 누구나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장-프레임-으로 이야기의 주제로 대화하는게 아닌 이상은요.
당시에 저는 그런 이해는 없었고 저의 논리가 명확하고 증거가 구비된다면 상대의 논리에 말리지 않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주장을 펼치고 그리고 그런 저의 의견이 상대방의 의견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않되는 환상-기대-가 있었습니다. 뭐 현실적으로 그렇게 흘러갔던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건 제가 그 시기를 건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주 필요했던 환상이었어요.
어떤 이가 보통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면, 그 사람을 그렇게 선택하게 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해야하는데 왜 이런 중요한 것들은 무시되는 것인가에 대한 분노감이 있었던거 같아요.
사회적 상황, 그 사람의 가치관, 성장 배경과 경험, 그리고 환경속에서 어떤 다양한 경험을 했고 그런 경험들을 어떤식으로 조합해서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런것들을 다각도로 고려하는것이 지극히 상식선 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었어요.
어찌하여 모든것을 이분법적 논리로 환원하려고 하는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던 저는 탱알(시온)의 가치관에 대해서 오로지 자신의 경험한 세계에서만 승인받는 그 가치관으로 이분적인 태도로 옳고 그름 안에서 그의 경험과 그로 인한 가치관을 부정하는 옥란의 태도를 견딜수 없었어요.
뭐 그건 지금도 여전히 그런 편이에요.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별로 존중하고 싶지도 않구요. 물론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게된 강력한 히스토리가 있다면 이해가 달라지겠지만요. 지금의 저는 저에게 그렇게 강요하는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말할거 같아요. "당신은 근본적인 사람이라고. 당신에게 최대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치스럽다고"말이에요. -_-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하고 그걸 강요하기 까지 하는-늘 그랬던건 아닌것 같지만-굉장한 혐오감까지 느꼈던것 같아요. 그건 이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기도 했던것 같아요. 그런 배경은 일정은 옥란에 대하여 작가님이 충분하게 시간을 들여서 설명하지 못했던-역시 주관적인 평이에요- 영향도 있었던거 같아요.
지금의 저는 옥란이라는 캐릭터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 군상-캐릭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더군요. 저라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걸어온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그리고 어떤것들에 위협을 느기는지에 대해서 추측하여 머리로는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정적으로까지 공감이 되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이슈에 대하여 사람의 느끼던 그 치열함 안에서 느끼고 그래서 감정적인 공감대까지 형성되는 것은 지금의 저에게는 무리인거 같아요. -_-;;; 정서적 통찰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죠. 인지적 통찰만하는 지금도 뭐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뭐 여튼간 넘어가서 탱알과 링에 대해서 다른분들이 서술하는 단어는 단어 하나를 두고 보자면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텍스트인데 거기에 그런데도 매력적이라는 말이 함께 붙여서 서술되고 있었어요.
Q1_ 그분들의 리플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들었던 의문은 이 두사람을 과연 타고나기를 그런 성향-폭력적이다-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부분.
Q2_ 특정 환경에서 자라면서 이미 그런 언행이 학습되어 연합이 되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을 온전히 그사람의 성격이라고 명명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
사실 그 두사람은 진단기준에 의거하면 정신질병 편람에 들어가는 질병의 환자라고 명명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외상에 의해서 나타나는 언행을 과연 그걸 성격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접근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탱알은 PTSD에 시달렸었고 그 이후에는 약화된 형태로 유지되면서 그리고 그가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대상관의 관계가 그의 내적작동기제로 인하여 계속 반복되었으나 목련과의 만남으로 다행스럽게 그의 애착유형은 불안정 애착에서 안정애착으로 바뀐것 같아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말년에 모성이 궤멸되었고 그리고 함께 생존했던 직장동료들과 그리고 그의 애착상대인 목련이 당시에 돌던 질병에 발병하여 사망함으로서, 달기지에서 9년동안 혼자 살아가는 동안에 망상장애에서 조현병으로 이어졌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링의 경우에는 각성되는 그 순간부터 외상으로 인한 급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자기와 타자-과거의 자신-에 대한 경계도 와해되는 형국이었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구요. 그의 대상관계도 각성이 강하게 일어났던 시기엔 탱알이 가지고 있던 내적작동기제가 더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의 부모와의 애착 관계에서도 변형이 일어났던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유아 연구에 관해서 접했던 텍스트들은 민감한 유아와 민감하지 않은 유아로 나누어서 연구하는 방향이었지, 그 아기가 폭력적인지 여부를 연구하는 건 제가 읽어본 책들에서는 없었어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영유가가 아니라 자라면서 반항장애-품행장애-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스펙트럼을 그리면서 나아간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타고나기에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아이가 아니었다는 말인거 같아요. 그냥 보통 아이들보다 좀더 영리하고 민감한 아이어서 그 전쟁터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 뿐이죠. 뭐 거기에는 초능력도 들어가네요. ^^;
이 두사람이 어린시절에 대한 작품에서 묘사된 부분은 탱알의 경우 최초 기억은 내전이 이루어지던 모 별에서 생존을 위해서 누군가를 초능력을 사용해서 죽었던 기억과 전쟁의 소음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의 찬 비명들 이었던걸로 기억합ㄴ니다. 그는 소년병이라고 정의되는 아이들보다 더 어린 나이로 그려지고 있었구요. 화풍상에서 묘사된 탱알은 뭐 아무리 많아봐야 4-5살 정도. 그런 그 아이는 성인들에 의해서 거기서 나올 수 있었고-사실 이 아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쉽게 데리고 나왔을거 같지는 않아요. 왜나면 그는 타인(특히 성인)을 신뢰가 없었으니까요- 그리하여 그는 고아들을 위한 기관에서 보호를 받게 됨으로서 보통의 사회 시스템에 진입하게 되었어요.
그 시절-아동보호소-의 그는 '폭력적인 성향'이 지나친 아이로 묘사되고 있었고 모두 그를 어려워 했지만, 유일하게 그를 따뜻하게 대하던 나이든 수녀님이 한분이 있으셨어요. 그는 정말 '폭력적인' 아이로 기술될만 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저는 그건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강하게요!!
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의 생존을 위해서는 과거에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걸요. 하물며 이 아이는 사회적 시스템 아래에서 성인에게 보호받고 다른사람과 연대하며 살아간 경험이 없었는 걸요. 그러니까 그렇게 반응하는건 지극히 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뭐 비유를 하자면, 극단적이지만 밀림에서 구조한 늑대소녀 자매 이야기를 떠올리면 될거 같아요.
보통의 다수의 어린이는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아서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안전하고 세상은 비교적 살만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부모와 주변인들-이 나를 원하고 그리고 내가 힘들어 할때 나를 돌볼것이라는 경험이 있어야 하지만, 그는 그런것들이 존재할 수가 없었어요.
세상은 안전하지 못하며 어른은 아이인 자신과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하는 존재이며 그리고 언제 어디서 나를 누군가가 사살하거나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험은 그의 뇌와 그리고 몸에 각인되어 있어요. 학습은 뉴런 단위에서 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알려졌고 이런 연구를 생각한다면, 그가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바꾸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야 하는지는 그 누군가도 모르는 일지도 몰라요. 성인시절에 한 경험이 아니라 유아시절부터 경험했던 환경이기에 평생 노력을 해도 그런 내적작동기제는 재학습되는 것이 불가능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굉장히 회의적이라서... 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타인의 이미지를 평생 반복 재상연 하면서 살아가는게 아니라 중요한 타인을 만나고 그리고 그 사람과 안정 애착을 이루고 자녀를 키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굉장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요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PTSD'라는 진단명에 대해서 어느정도 어렴풋하게 이해가 있을텐데 왜 그 아이가 외상에 시달려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정상이라고 말하는 범주의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했으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Q3_ 모든 영유아가 자라면서 반드시 필요한 애착대상이 그 아이에게는 과연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추측해보자면, 어쩌면 부모가 누군가에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을지도 몰라요. 혹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버림받았을지도 모르구요 전쟁에 대한 외상, 타인-성인-에 대한 공포적 이미지,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었다는 사실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어린아이가 했던 노력들을 생각해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자신만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도 있을지도 모르고...
아이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더더욱 그런 가치관을 유지하고 있었던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그런 가치괸에 대해서 정면으로 비난하고 부정했던 존재가 옥란. 물론 그의 입장에서 그의 경험을 기반으로는 그런것들이 존재할수 없는 영역이지만 말이에요. 전 옥란보다 탱알이 더 취약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상대방의 태도가 그에게 얼마나 위협적 이었을지 상상만 해도 충분히 괴로워지고 말아요.
무엇보다 그토록 과학기술이 발전했다는 그 문명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멘탈을 캐어하는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지만, 이 부분은 작가가 공부를 게을리 한게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고발을 위해서 그렇게 그린건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근데 이분 자체의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인 편이에요. 그럴리가 없거든요. 적어도 어느정도 공부를 했다면, 링은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고 먹으면서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테니까요.
어찌되었던 그런 외상이 있던 그는 그런 그의 대상 관계를 자신의 선택과 그리고 어쩔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계속 경험하게 되고, 아마도 최초의 애착 대상일지도 모르는 그의 경험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감싸주던 그 분-아저씨-의 실제적 상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이성관계에서의 상실. 아마 이 친구의 애착형태는 불안-저항애착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런 역동은 목련과의 관계에서도 이어졌고... 뭐 다행히도 이 아가씨가 그를 그런 패턴에서 돌도록 따라가는게 아니라 그의 것을 담아내서 소화할 수 있는 상태로 돌려주는 사람이었기에 반복되던 그의 애착패턴은 목련과 관계하면서 안정애착으로 변화해 나가게 되었던것 같아요.
전적으로 좋아하는 대상을 좋아하면서도 나에게는 없는 좋은것을 가지고 있는-좋은 가슴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은 충동은 행동화로 이루어졌고, 여기서 좋아하는 대상을 상실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상을 위해하려고 하여도 대상은 언제나 나에게 한결같은 애정과 지지를 보낸다는 경험. 그건 엄마-유아의 모자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애착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큰 경험인데, 그런것이 없던 그에게 (중요한) 타인 이미지를 재구성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거에요. 기적같은 일이죠.
그런 그의 마음속에서 좋아하는 마음도 있음을 그녀가 읽었는지는 모르나 위해고 싶다는 마음과 그 행동을 마치 엄마가 아이를 돌보면서 하는 중요한 행동인 '담아내기'를 행함으로써 그는 전적으로 나쁜 자신에 대해서 전적으로 나쁜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해석과 그리고 보듬어주는 환경을 만났습니다. ㅠ ~ ㅠ 흑흑흑
여기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면, 참 좋았을텐데요. 뭐 작가가 그 이후에 그려내는 세상은 그에게 참으로 가혹했어요. 그 폐쇄된 공간에서 그녀를 먼저 보내고 9년동안 혼자 살아야 했으니까요. 말년의 그는 환청과 환시에 괴로워 하고 있었고, 어떤 전문적인 처방도 없었고 그리고 그가 환청 환시를 경험하는지 확인 해줄 타인도 없었고 뭐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이윽고 조현병이 발병했던것 같아요.
그리고 갑작스러운 링의 각성. 초등학생이었던 링에게 내가 지금을 살고 있는지 그때를 살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고 그리고 모성마져 전쟁으로 소멸해버린 그도 당연하게 좀더 안전한 장치가 필요했던게 아니었을까요? 달의 기지를 파괴하여 과거이자 전생인 자기와 어느정도 경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링과 전쟁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모든것을 완전히 통제하고 싶어하는 탱알. 그는 자기가 환생한 지구라는 별에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을 지켜보면서 어떤 두려움을 가졌을지 ...
내가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게도 하게 된 링은 지금의 삶에서 너무나도 소중한 부모에게 받는 애정과 지지가 철수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물론 나중에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꾸긴 했지만, 애착대상으로부터 애착과 신뢰가 철수할 수 있다는 경험은 그의 전생의 삶의 패턴의 연속성상에서 이어지며 확인받는 경험에 가까웠을거 같아요. 그를 입양했던 아저씨를 연상시킬지도 모르죠. 무의식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인 그녀는 과거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이 과거가 아닌 지금을 살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매우 절박하게. 눈을 감으면 지금이 아니라 그때의 경험을 그때처럼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이에요. 게다가 링은 건물에 떨어져서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있는 동안에만 진정제를 투여받았지만 이후에는 ... 작품 어디에서도 그가 투약을 했다는 언급은 없었어요.
전생의 그 두사람의 영혼이 대기권에 들어오면 앨리스에게 사체스가 생긴다고 블라블라 했지만, 엔딩에서도 링은 여젼히 가끔 그런 꿈을 꾸고 있었고 그때마다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걸로 이 이야기는 그렇게 대장정을 마무리 하는 구조 이었어요. 이건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저의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이 아이가 그래도 좀더 과거가 아닌 지금에 집중해서 온전히 느끼며 살기 위해서는 투약과 상담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했던 경험은 자신이 혼자서 온전히 처리하고 소화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경험이기 때문에 ... 배우자와 안정 애착을 이룩하여서 양육에 있어서 애착관계가 대를 물려서 내려오는 것을 근절했다고 하여도, 경험으로 인하여 형성된 불안은 의식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하여도 그와 그의 기족에게 자주는 아니더라도 위협적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
뭐 아무리 현실이 아닌 이야기를 그린다고 하여도 우리는 여기 현실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텍스트를 통하여 지식과 간접 경험을 쌓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에서 주인공의 삶의 일상의 하나로 평범하게 그려진다면 어쩌면 이 작품을 읽은 많은 사람중에서 외상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을때 좀더 빨리 그리고 쉽고 익숙하게 병원에 간다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아쉬운 작품이에요. 이 만화도 그렇고 <모래시계>도 그렇구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건 그건 환상에 가까운 일이고 살아가면서 평생 그런 경험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삶의 궤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조금은 다르고 그런것들이 쌓여서 같으면서 다른 사람이기도 한 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구요. 뭐 그런 연속선상에서 뭐 과거에는 답답했던 것들이 지금에는 보이는 경험도 하지만, 대부분 아마 자기가 경험한 범위 내의 것들에 대한 이해는 있어도 접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이해는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말이에요. ... 뭔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타인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는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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