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남성의 문화에서 '더러운 것'은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몸이 된다. "몸을 더럽혔다" 혹은 "더러운 것들"이란 표현이 지칭하는 대상이 늘 여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노스 바움(2015)은 "(여성과의) 섹스 그 자체가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자 죄책감을 느끼게 하며, (여성이) 자신을 오염시키는 것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의 오랜 믿음, 즉 여성 혐오와 인간혐오의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개념적 연계 고리를 지적한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는 자주 이러한 집단이 표상하는 우리 자신에 과한 어떤 것을 우리 자신에게서 차단하려는 욕구를 반영한다" -P410, P411,


주관적 폭력: 직접적이고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폭력

객관적 폭력: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한 폭력. 비가시적. 

객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선동적 언어를 포함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 자체를 가르킴

객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결과 -P416


바우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이러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 “다른 사람의 운명이라는 더 광범위한 함의에 무관심한한 채 자기 일”만 기꺼이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현상가무관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경고이다. – p417


더 끌고 나가, “나쁜 사회적 장치:에 기인하는 “구조적 무사유”가 “악의 사회성”이라고 주장한다. 타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는 도덕적 무관심은 개인적 기질이나 성향의 문제, 혹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희생자와의 사회적 거리 혹은 사회적 근접성을 중요하게 거론한다. – p418


여성 혐오의 표현이 나오는 대전제가 "(여성이) 자신을 오염시키는 것을 지니고 있다"라는 걸 좀 더 면밀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인지하지 못 했던 거 같습니다. 이 전제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여성에게만 명명되는 텍스트-낙인적 함의의, 남성에게는 명명되지 아니한-에 대해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미혼모', '꽃뱀' 정도가 적절한 예인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 SNS 상의 미러링 운동으로 인하여 '미혼모'의 대칭되는 표현은 '함흥 자지'. '꽃뱀'에 대칭되는 표현은 '좇뱀'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런-부정적- 함의의 텍스트가 없었고, 설사 있다고 하여도 부정의 느낌은 여성에게 지칭되는 텍스트만큼 부정적이고 강렬한 느낌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더러운 것은 반드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내부(자신)는 고결하고 깨끗하다는 결벽증적인 사고의 흐름은 유아적인 사고 양식에 가까운 이분법적인 미성숙한 사고를 반영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투사를 통하여 부정적인 것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고 그걸 조절하고자 함으로서 자기애적 방어를 완성하는 모양으로,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으로 대상을 분리하는 유아적인 사고가 성인인 경우에는 '성녀'와 '창녀'로 나누는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한편 상대방으로부터 자기 안의 부분을 부정하여 투사 당한 대상은 그 내용을 내사하여 소화함으로써 자기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변 환경적인 요인조차도 (보통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외부 귀인 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만 귀인 하여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마치 없는 것인처럼 고려치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기계적인 중립으로 표현. 자기 봉사적 귀인 편향이 존재하지 않음.)

그렇게 보면 투사한 대상과 투사된 대상의 사고의 흐름은 겉으로는 달라 보일지도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흐름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 역동(흐름)을 끊어내려면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집단 내부에서 개개인의 노력으로 이룩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 구조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인데도 지금까지 그렇지 못 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어떤 식으로 희망적으로 그려봐야 할지 조차 감이 잡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현재 있는 위치에서 스트레스 요인을 줄이려면 행동보다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다고 하여도 (개개인의 차이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여성들은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태도를 취하며 남성들은 외부에서 찾는 태도를 취하는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성차에 따른 양육의 차이-주변인의 반응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만 설명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연구에 의하면 성차는 유의미한 함의가 없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중론이라는데 그럼 이 모든 것이 전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것인지. 

이부분-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자신이 시스템과 시스템에 속해 있는 개인을 바라보는 시점이 개인의 입장이기 보다는 시스템의 방향(입장)에서 바라보는(신자유적인?) 시점의 비중이 더 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적인 부분의 영향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클것이라고 의식적으로 인지하지만, 인지함이 없이 혹은 익숙하게(?) 대부분의 것들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습관적인것과 동시에 ‘모두’ 구조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학습된(?) 불편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악의 평범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바우만의 텍스트) 

어찌하여 (이 나이가 되도록) 수용할 수 없는 것을 ‘투사’라는 방어를 통해서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지. 러한 태도는 정서발달적인 부분으로 보자면 유아기에서 머물러 있는 태도이기에 어떠한 요건이 거기서 고착되게 하는 것인지. 탈 동일화로 나아갈 수 없는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상위 통찰이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이 또 일었습니다.


 


* 긍*자기 봉사적 귀인 편향: 부정적인 일은 환경 탓으로, 긍정적인 일은 자신에게 돌려서 자존감을 고양시킨다.

*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 p156, 제8장 근대와 여성 혐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지 코, 은행나무

* 범주 폭력: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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