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중략)... 우리들의 대부분은 '9.11' 이후 이어진 테러와 전쟁의 난장판에 무감각한 시선을 보냈다. 각종 미디어가 전해준 참상의 이미지가 부족해서였던가? 아니다. 그 참성이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카의 민간인들이 죽고 군인들이 다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그 미디어 이미지들을 오락영화나 다름없이 소비할 수 있었던것이다. 반명 무장테러집단의 비디오로 매개된 김선일 씨 사건은 우리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즉각 우리의 문제로 인식했고, 사건의 전행과정에 공분했으며, 문제해결의 여론을 모았다. 그러한 일련의 반응 밑에는 동족이기에 가능했던 재빠른 감정이입, 자국민 보호에 실패한 국가를 향한 불신감, 그리고 우리가 입게 될지 모르는 구체적 피해에 대한 상상이 깔려 있었다.

유의할 점은 우리가 이라크전의 이미지들에 무심했던 것이나, 김선일 씨 비디오에 분노할 수 있었던 것 모두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인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 아래서는 민족의 일만이 주된 관심사가 되고, 민족의 이해관계만이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여거진다. 물론 한국인들에게 한국인의 죽음이 더 경렬한 동일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해서 그 현상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근대 국민구각 체제 안에서, 민족주의는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문제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바탕으로 생겨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민족을 넘어서는 타자 일반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연대의식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덕목은 고통의 감수성이 국민국가의 테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지, 행여 다른 민족의 차별이나 배제 위에서 작동하고 있지는 않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김선일 씨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우리 대다수의 민족주의적 시선은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성찰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배타적"이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의 자율성과 평화를 위협하고 훼손할 수 있는 자민족의 이익추구 행위마저 이념적으로 합리화 한다. 그러한 시선은 우리 스스로 한 몫을 맡은 침략전쟁에 수치감이나 죄의식을 가지기 못하게 만들고, 이해타산의 논리만 좇는 정책결정을 당언시하도록 만들며, 심지어 전쟁의 희생자들에게 인간적인 공감과 동정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태연할 수 있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유 없는 고통과 죽음의 현실이 지니는 무게는 결코 국적에 따라 더해지거나 덜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략)

생각의 나무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_ 이상길 [테러, 이미지, 비디오 테이프: 김선일 씨 사건을 되돌아본다] 본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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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에 지면으로 처음 뵌 박노자 선생님 강연에 두번째로 친우님과 함께 갔습니다.

저는 사회주의자도 아나키스트도 아닙니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도 않으며, 무관심에 가깝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저 가끔 분노를 하며 울분을 호소할뿐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경험한 것들 중에서 생활에 있어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만 하고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전히 많은것들을 알고 있지도 않으며, 움직이는 것들의 태반에 대해서 이해는 커녕 생각조차 하지 못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들으며 그래서 책을 봅니다. 저의 바보를 극복하고, 이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요.

11월 21일
여전히 강연회 포스터의 사진은 초절정 청년(추측입니다.)시절의 사진이더군요.
노린건가? 라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주체측에 물어보기도 초난감한 질문이니까요.;;; 정말 물어보고 싶지만 저는 살아남고 싶기때문에 언제나 처럼 참았습니다. =_-;
언제나처럼 명쾌하며, 절묘한 타이밍에 슬프지만 웃고마는 선생님의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웃는 얼굴로 그런 현실과 내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는 모습도 여전히 가슴에 남았습니다.
강의메모는 하단(참고로 저는 정리 못합니다. ㄱ-)

저는 전쟁에 대해서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것은 아니었던거 같습니다.
친우가 권한 <아부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라는 책을 보고 울었습니다. 지하철에서요. 사실 전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타인의 고통의 기억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저의 경험을 대입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합니다. 친우가 아끼던 개의 죽음은 사랑하는 남동생이 죽는다면? 이라고 가정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세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때 언제나 반공포스터 때문에 고민해왔었습니다. 고등학교때 전쟁이나면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한강다리를 건너야하니 책가방에 일주일정도 튜브를 넣고 다닌적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대해서 통렬하게 반응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머리에는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된것들을 단어로 정리한다면,
종교의 문제. 종교의 핑계. 국익의 문제. 개인의 문제. 살인의 문제. 퇴보의 문제. 희생의 문제. 잔혹함의 문제. 사상의 문제. 자주독립의 문제. 주권수호의 문제. 우리의, 혹은 국가의, 혹자는 민족의 문제. 평화의 문제. 해결의 문제. 비타협의 문제. 완고함의 문제. 이상의 문제.... 그리고 테러(?)의 문제.

타인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하고 얻는 그것은 정말 달콤할 것일까?
나 혹은 우리를 위해서 하는 살인이 스스로에게도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가까운 1차적 관계에만 해도 "어느 시점에서 돌이켰으면 좋겠어."라고 생각 하기도 또는 타인에게 이야기 하기도 하며 살아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조금은 양보한다면 고통받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줄어든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피눈물이 아니게 된다던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것이 우리가 아니라 인간에게 바람직한것인가. 나라는 인간. 우리라는 인간들. 당신이라는 인간. 당신들이라는 인간. 그라는 인간. 그들이라는 인간들... 살면서 작은 양보조차 아까워 하는 저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입니다. 이상은 이상인건지...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야 할 거 같습니다.
요즈음은 다른 생각이나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시는 분들에게 조금 아주 조금 관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에게도 이유가, 그분들에게도 이유가 있으니까요. 앞으로 나아가는 걸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근원주의자"라는 말은 저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전의 저의 생각이나 텍스트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의 마지막 한마디 "가끔씩 극복되기도 합니다." 
가끔씩 극복되어서 다행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저도 사소한 것에서 양보를 시작하는 극복된 저를 만나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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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식탁에 고기가 오르기를 원하는 사회는 자신의 일을 증오하는 불행한 집단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 도취한 위험한 집단을 만들어내게 된다. 둘 중 어느 경우 건, 사회와 평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소외된 개인들의 집단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 사회는 위험하다. - 조지 아이만

1995년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기사는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알 낳는 기간 내내 암탉을 신발상자 속에 두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발상자나 다름없는 배터리 닭장에서 나온 깨끗하게 포장된 신선 농장 계란을 먹고있다.

전형적인 미국 식단은 동물, 환경, 심지어 건강상의 문제를 일어킨다. 완전채식인이 되려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밑바닥에는 연민이 자리잡고 있고, 연민은 깊이 있는 변화의 동기가 될 수있다. 만약 자신이 무엇을 먹는냐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결정한다는 걸 의미한다면, 식단을 바꾸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바꾼다. 완전채식인이 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이 좋아지는 체험을 한다. 이렇게 좋아진 건강은 종종 그에 수반되는 영적 각성을 일으킨다. 이 각성은 여러 해가 걸릴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궁극적으로 식단을 바꾸기 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각성은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자연을 닮은 식사> 에릭 마르쿠스 지음, 박준식, 진상현 옮김, 달팽이 출판

이책에서 나오는 실화로 인하여 요 몇일 고기를 먹으면서 즐거워(?)했던, 저에게 구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몰랐던 일들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이 미국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저희 다소 희망적인 낙관(?)일지도 모르지만요)... 여러가지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잘 모르고 있었던 광우병에 관한 이야기, 동물성 사료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웠던 문제, 현재의 식용 동물들(가축들)을 키우는(키우는이라고 말을 적기에 제가 부끄러울 정도 입니다. 그건 결단코 "키우는"이라고 말 할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대체할 다른 단어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방법, 그리고 별반 차이없는 도축 방법. 
그리고 우유에 관한 이야기. 저는 유제품을 못먹는 체질이라서 거이 유제품류를 먹지 않습니다. 복통뿐만아니라 결과도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정보들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아오던 것들이 조금 해소되었고, 저의 무관심의 범주에 있었던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인들의 경험이야기가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고기만(?) 먹었으면... 다이어트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강조가 되어있더군요. 본문중에서(지금 어디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한사람이 평균적으로 먹는 동물의 양을 산출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고통받으며 학대받고, 방치되는지 알게되었습니다.


모르던 진실은 "적어도..."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더군요.

가축의 학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런 가축을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학대까지...
(어딘가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해서 닭도축공장 노동자 지원을 하는 우리나라의 풍토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이야." 라고 단정하기에는 나의 이웃의 이웃이 고통받는 고통이라고 생각해보면 결코 "어떻게해..."라고 생각만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거 같습니다. 이런식으로라도 생각해야지 달라지지 않을까요?)
프랑스에서 시작된(?) 운동 '정체성 정치'에 대한 운동에 대한 소개글들이 생각났습니다. 여기의 내가 하나의 더 이권을 누리기위해서 움직이면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사람을 포함한 여러가지)들이 희생해야하는지 아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서, 조금은 감수하면 다른사람들이 좀더 웃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논점이었습니다. 전혀 다른것이 없습니다. 조금더 다른 사람들이, 조금더 지구가, 조금더 동물들이 좋아진다면... 그것만큼 좋은일이 없지 않을까요? <- 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고기를 먹는것에 대해서 유보적이 될거 같습니다. 적극적이 아닌 소극적 소비운동이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우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게다가 소화를 시키기 힘들다는 현실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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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의아하게 생각했던 여러가지가 해소되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매우 추천. 참고로 저는 비종교인입니다. 전 돌베게 출판사가 매우 좋습니다. 책들이 매우 취향입니다. 하하하... <전쟁의 위한 기도>전문을 돌베게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찾아서 봤을지;;; 게으른 사람은 넷서핑도 매우 힘에 부치거든요. 노먼 핀켈슈타인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이미지와 현실>을 볼때는 좀 모르던 구미지역의 특수한 사정(?)이야기도 많아서(하지만 그것이 진실로 이해하는 다수가 우리나라에도 존재합니다;) 난해하기 보다는 "어라라?"한 부분이 있었지만, <거룩한 테러>의 가장 큰 강점은 역시 책의 전개방식인거 같습니다. 일목요연한 분류, 이어진 정리 간략화한 표로 더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후반부는 조금 지루한 면도 있었습니다. 전반부보다 다소 흥미가 떨어지는... 라기보다는 무지한 부분이라서 그런거 같네요. 백미는 역시 부록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부록에 대한 저자의 상세한 분석비교가 백미. 
덕분에 이슬람 최대주의와 기독교 최대주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쿠트브와 그가 그릴리에서 본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종교적인 것의 두 가지 모델을 보여준다. 그 모델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다양한 역사적 시대와 지리적 영역 그리고 사회적 층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을 망라하는 종교들에서 특히 그렇다. 나는 그 한가지 유형을 최대주의적이라 특징짓고자 한다(쿠트브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나는 '근본주의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가 혐오감을 함의하고 있어서 정말로 핵심적인 것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핵심이란 곧 종교가 사회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실상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으로 스며들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한 가지 유형은 최소주의적이다. 이는 계몽주의의 정점에서 칸트가 취했던 입장으로, 종교를 일련의 중요한(주로 형이상항적인) 관심들에 국한하고, 국가의 개입에 맞서 그 특권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 활동과 영향을 특화된 영역에 한정한다. 종교에 대한 정의는 좀더 최근에 생겨난 최소주의적 유형의 종교에서시작할 수도 있지만, 최대주의적 유형은 물론 중간적인 
위치의 긴 스펙트럼까지의 망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포괄적이고 유연해야 한다."
 
- <거룩한 테러> 1부 현대 정치상황 속의 종교 이해. p28

부록이었던 부시와 빈라덴의 연설의 문체에 대한 비교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단어의 취사선택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외에 책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았는데 책을 읽은 시점으로부터 1달이 지나가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메모한 부분은 뭔소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봐야할거 같네요. 일단은 지금 기억나는 부분만 메모메모 모드입니다.
지금 기억나는것은 어라라... 표현이 매우 흡사한게 아니라 아에 동일하네.. 라고 느낀것 이었던거 같습니다. 9.11 직전의 오사마 빈 라덴의 비디오테이프 연설과 2001년 10월 7일의 조시 부시의 대국민 연설이 말이지요.
 
 
그때 했던 생각들은 그 이상은 어디에 있는지요? 라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에휴. 그저 한숨뿐...
누구를 위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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