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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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오랜만에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관계로 처음에는 단어(텍스트)들의 생소함에 당황했으나, 그냥 읽으면서 진도를 나갔습니다. 몇차례 읽다보면 처음에 읽었을 때 보다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니까 처음 읽은 지금 남아있는 건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 읽은 느낌에 대해서 포스팅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읽고나서 든 생각과 비교해볼려구요.
책은 버틀러의 한나 아렌트와 아감벤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논으로 시작했는데요. 저는 사실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서경식의 저작에서의 인용에서 접한 것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서 만나본 기억이 없어서 그녀의 이론들과 그리고 버틀러의 반박들을 생각하면서 넘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감벤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버틀러도 앨피에서 나온 버틀러에 대한 입문서를 본 것이 전부이고, 스피박의 경우에는 끝까지 다 읽은 책은 유일하게 한권. <대담>. 읽다가 나의 무지식 몰이해로 차후를 기악한 <포스트식민이성 비판>, <다른 세상에서>. 그리고 <포스트...>를 읽다가 어려움을 느껴서 앨피에서 나온 입문서인 <스피박 넘기>를 읽었습니다. 앨피에서 나온 입문서들은 많은데요. 저는 추천한다면, 스피박, 버틀러, 지젝의 입문서를 추천합니다. 비 추천은 데리다, 보부아르 입문서. 그 외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를 않아서요.  
머 그런고로 번역자인 주해연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야, 그 때 당시의 미국의 상황을 알고 나니 좀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9.11이 있었고 그래서 미국에서 어떤식으로 행동했는지 인지하고 읽었으면 더 몰입이 잘 되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는 의미에서 '번역자의 말을 먼저 읽었어야 했는가?' 하는 후회가 들었어요. 뭐 다시 읽을꺼니까 두번째의 감상은 좀더 넓어지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녀들의 논의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들은 '국가를 그 국가의 언어로만 불러야 하는건가?'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부시 아저씨가 미국의 국가는 영어로만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던데... 만약 그런 시위가 이 나라에서 재현된다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오는 반응들은 눈에 보여서 안습.  OTL
책에서 주된 논의 였던 '국가 없음'에 대해서는 기존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좀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민족국가든 다민족국가든 그 국가에서 외부자(시민이 아닌 존재, 국민이 아닌 존재, 불법체류자, 망명자 등등)를 정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권력의 힘이라는 사실. 우리(민족국가 혹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외부자를 받아드리는 것을 제한해야하며, 외부자의 요건에 대해서 정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의 핵심인가에 대한 부분. 그 국가의 국민에 대해서 정의하는 것은 누가 정의하는 것인지도, 불법체류자는 국민이 아니니까 소비되어 사라지는(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본국으로 추방되는) 존재이어야 하는 부분, 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는가? 뭐 그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질문이 마구 던져졌어요. 그야 말로 질문의 천국. O<-< 별로 고민하지 않았던(보려 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해야하나요? 뭐 그랬습니다.
책을 보다가 가장 저의 가슴을 관통했던 부분은 번역자의 말에서 이 논의가 있었던 당시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불법체류자'라는 명명에 저항하며, "어떻게 사람의 존재가 불법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또한 이들은 파업을 통해 이민자 없이 미국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고, 평소에 이민국 단속의 표적이 될까 자신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과는 달리 공적 영역인 거리에서 자신의 목수리를 냈다. 시위 과정에서 라틴게 이민자들은 이국 미국 땅이 자신이 살아갈 곳이라는 의미로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불렀다." 


사람의 존재가 불법일 수는 없는건데 말이죠. '불법체류자'라는 말이 가진 언어적 은유와 참담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타국의 시민은 우리의 번영을 위해서만 존재 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 국가 이전에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정의된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순간 사라지며, 그들의 존재는 그런 단어로 치환되어버립니다.
'우리'라는 말은 그래서 공포스럽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부분이지만, '우리'가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통용됩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든 정당화가 되어버리죠.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텍스트 기반으로 비난받습니다. 격렬하게. '우리'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 할 수도 없는거 같아요. 어떤것들이 '우리'를 '우리'로 있도록 정의하는 지에 대해서도요. '우리'에 대한 기준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도요. '우리'는 더이상 교과서에서 정의한다고 해도 '단일민족'이 아닌데 말이에요. '우리'에 대한 신화는 점점 우주로 가는거 같아요.
사실을 말하면, 기존의 '우리'가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인지시키는 교육이 '우리'를 뒷받침 해주는거 같습니다. '우리'에 들어온 '소수자'를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여전히 '우리'는 우리일뿐 '우리에 들어온 소수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안에 존재하는 '외부자'일 따름이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우리'를 향하는 그 고통의 외침은 '우리'에게 과연 도달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저는 매우 회의적이에요. 특히나 이 정권에서는 말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우리'였던 사람도 우리가 아닌 혹은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재현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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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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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의 입문서라고 하는 <스피박의 대담>이 갈무리에서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서점으로 달려가서 구매했습니다. 아 어렵네요. 어려워요. 매우 집중해서 봐도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좋아요.;;

좀더 열심히 살았으면, 좀더 쉽지 않았을까 하고 항상 아쉬워합니다. 
뭐 별수 없는거지요. 현재에서 분발해서 공부하는 것뿐... -_-;;


5장 다문화주의의 문제점 
(호주에서 포스트식민주의,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다문화정책을 둘러싼 스네자 기뉴와 가이트리 스피박의 토론. <헤카데>지에 게재되었음.)

본문. 171~173페이지 부문

기뉴_  저는 선생님이 언급하신 내용 가운데 또 한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산이라는 개념, 이산 문화는 그것이 파생한 원래의 문화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런 차이란 기본적인 차이면서도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대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박_ 차이를 아시겠지요. 사실 그러한 차이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도란 그렇게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자비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에피소드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저는 3월에 런던 영영방 연구소에 있었습니다. 흑인 영화제 작가가 만든 몇 편의 영화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지요(훌륭한 집단이어서 그들이 제게 청탁했을 때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에게 말한 내용 중의 하나는(이 문제에 관해서는 제 기억이 좀 애매합니다만), "우리들은 영국에 있는 이산 흑인입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영국의 토착 정항 전선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또 모종의 저항 언어를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3세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3세계에서는 흑인 대 백인의 문제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흑인 대 흑인이 있는 것과 같이 황인종 대 황인종의 문제 등이 있으니까요." 듣고 있던 젊은 남여들은 제가 그들을 어떤 종류의 신비적인 민족적 기원과 결부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거주지에 가보면, 그들의 조국에 대한 생각은 가족 내부에서 본 관습이나 요리나 그런 것에 대한 향수에서 나온 것 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세대 문제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세대 문제는 이들로 하여금 제3세계 전체에서 진행되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반면에 제도적으로 보면 저는 미국의 외국인 거주자입니다. 그 시기에 저는 캐나다의 앨버타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뉴욕주 북부로 해서 토론토로 아무 문제없이 들어갔습니다(저는 인도 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도인 거주자가 캐나다의 불법 입국자는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요. 이틀 후에 저는 런던으로 가서 일정을 마치고 같은 여권으로 캐나다로 되돌아 가려 했습니다. 미국의 외국인 비자였지요. 다음에 저는 일요일 히스로우에서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습니다. 캐나다 항공사는 제게 "우리는 당신을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왜요?"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항공사 여성은 "당신은 캐나다 입국 비자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말했지요. "보세요. 저는 같은 사람, 같은 여권입니다....." 인도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녔다는 거겠죠. 그렇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달라져 버리는 겁니다. 런던에서라면 인도인들은 캐나다로 가는 배에 올라타고 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같은 여권으로 런던에서 캐나다까지 여행을 하는 데는 비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미국에 오면 다릅니다. 짧게 말해서, 비슷한 문제를 영화 제작자였던 흑인 남여들에게 말했던 저에게 바로 그 문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하루를 더 머룰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캐나다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에게 세미나를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떠나기에 앞서 그 항공사 여자 직원에게 좀 따끔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잠깐 말해두지만, '우리는 당신을 받아드릴 수가 없습니다'따위로 말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일대일의 인간관계에서는 몹시 기분 나쁘게 들리니까요. 다음기회에는 '그건 규정에 어긋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양편이 다 같이 희생자입니다'라고 말을 해야합니다." 그러자 그 여성은 아주 놀랐다는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히스로우에서는 사리를 입은 유식인 여성인 백인 여성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 특이한 상황에서 정말 인도인으로 입을 놀려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일단 규정이 작용하는 방식을 보기 시작하면, 그들은 자비로운 태도가 아니라야만 제3세계 사람들 사이의 차이들을 알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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