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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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 테리 리얼, Y브릭로드
예전에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서 심리학 관련해서 책을 추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주목할만한 신간으로 소개되었었다. 당시에는 그냥 뭐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좀 있었지만, 선뜻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었다. 근래에 발행한 꽤 많은 남성의 시점으로 심리학을 이야기한 책들이 헛소리 수준은 책을 좀 봐서... 뭐랄까 제목에 대한 거리감도 있었고 출판사 이름도 생소했기에 그냥 뒤로 넘겼었다.(알고보니 여기는 웅진 계열;;)
이번달에 책을 몰아서 사면서 이 책도 고민하다가 질렀는데 책의 띄지에 있는 추천 멘트중에서 무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의 저자인 존 브래드쇼의 추천사가 있는걸 보고 깜짝 놀랐음. 그 내용은 "우울증에 빠진 남자들에게 의미심장한 통찰력을 주고, 그 남성을 사랑하는 여자들을 위로하는 책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흠.."이라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겼고 <뉴욕타임즈>가 이 책에 내린 찬사는 "남성 운동이 한 발짝 전진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여성 심리학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었다. 존 브레드쇼의 추천사와 <뉴욕타임즈>의 찬사로 구입한 책중에서 이 책은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순서로 올라왔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본문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사람도 이 길을 가게 된 이유가 개인적인 비중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아버지가 나누었던 대화는 나를 충분히 눈물짓게 만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건드리지 마라. 너까지 끌고 들어가니까."가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충고는 틀렸다. 나는 아버지한테 휩쓸려 어두운 소용돌이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를 움켜줄 때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를 분리해서 바라보고자 노력했고 그리고 한 인간으로써 아버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위로해줬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그의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 그와 그의 동생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던건 아닐까 싶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손을 내밀고 그리고 그 고통스럽고 벗어나기 힘든 유산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상속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는 그의 어머니와는 그런 연결고리가 거의 없었다는 것. 뭐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은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보다는 좀더 공격적인 제목이 더 어울렸을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책의 모든 부분에서 '젠더의 정의'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성별은 타고 나는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의 증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길러지는 것과 매한가지로, 남자 또한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길러진다는 것. 이건 정말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자가 남자로 길어지면서 받는 그 이중적인 고통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알게되었고, 굉장히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의식하고 있는데도 그래도 무의식속에서 가끔씩 나오는 한마디 들은 사회에서 규정한 젠더의 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스스로도 그 한마디에 깜짝 놀라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정. 허허허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을 느끼기 전에 부정이라는 회피를 언제나 선택하고 만다. 그래서 남는 건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습관적인 거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다. 살아온 세월만큼 그 깊이도 더 깊어졌을테니. 

추천사나 해설에서도 '남자'들이 읽으면 크게 공감하거나 깜짝 놀라는 책이라고 말했지만, 내 남자를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책에 가까웠다. 이건 뭐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내담자들의 에피소드들을 느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튼간 나는 그랬다. 서구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는 승자와 패자로 극단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서 사례에서 이야기 되었던 내담자들의 이야기는 남자던 여자던 그 크기에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는 부담감은 모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여자분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임상 사례와 이론적인 설명이 굉장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번역도 잘 되어 있었기에 접는 페이지들이 많았다. 읽다가 기억하고 싶어서 페이지를 접었던 시기는 심리학 관련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정도 이었는데 말이다. 그런걸 생각하면, 이 책은 많은 것들을 전달하는 굉장한 책이 아닐까 싶다. 심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젠더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책. 
EBS에서 나온 모 책을 보면서 빡올랐던 기억이 나면서 이 책을 그 제작진들에게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젠더'로 규정하고 그것들을 젠더를 규정하는 단어와 연계해서 만들지 말아주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 방법이 굉장히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인건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그렇게 했을 경우에 우리에게 모르게 가해지는 위해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길 바랄 따름. 당신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나는 여자라는 성별이 주어져서 태어났고, 그리고 여자로 길러지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잘려나갔고 그 기준에 의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 당했다. 나라는 인간이 그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여성'이라는 성의 안에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다. 그런 기준안에서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던 또 다른 이중적인 승자와 패자의 논리. 그것들을 쟁취하면서 스스로가 어른들이 규정한 여성으로 남는 길이 과연 있을것인가? 적어도 내가 나의 2세를 출산해서 키운다면 그런것들로 부터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왔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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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데 소바주 4<신의 발명> 인류의 지와 종교의 기원,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읽은지는 꽤나 지났지만, 시리즈 3권에서 부터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번권도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웠던 이론. 이 책을 보면 일신교를 종교로 가진 분들은 굉장히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뭐 나는 딱히 '어떤것이 사실이다. 진리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관계로 그냥 저 멀리서 구경하는 느낌으로 읽었다. 다신교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으며, 읽으면서 좀 불편한 부분이 있었는데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가 자신의 문화에 대해서 좀 과잉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좀 들었다. 뭐 나는 개신교의 교리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신교의 기본이 되는 그 부분과 자본주의의 기본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알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것 같기도 해서^^;; 
분명한건 모든것들은 장단점이 있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닌가 싶다. 차이를 인정하고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포인트라면 포인트. 거기서 개선하려는 노력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베스트가 아닌가. 어찌되었던 자본주의에 대한 부분은 뭐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건 지금 누리는 것들이 그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서 누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포기하라고하면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것인가. 나는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많은 비합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르는척 하고 살고 있다. 이제는 뭐 이런것으로 굉장히 자학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슬퍼하는 건 계속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애도하고 거기에 있는 당신을 위해서 애도하며 나의 생활에서 크게 나가지 않는 방향으로 그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은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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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데 소바주 1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몇년전에 정말 우연히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은 카이데 소바주 시리즈의 두번째로 <곰, 왕이 되다>로, 정말 즐겁게 읽었고 그 마음으로 주위에게도 권했었던 책이었다. 금년에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카이데 소바주 시리즈 를 50% 할인하고 있어서 냅다 질러두었던 책을 잘 묵혀(?)두었다가 이제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 시리즈의 1권부터. 
1권의 주요 주제는 '신데렐라 이야기'로 전세계에 전해지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좀 변형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 이야기 속에 남겨진 신화적 잔재들을 조합해서 그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가는 즐거움이었다. 이 시리즈를 처음 읽을때 느꼈던 그 부분, 마치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한 페이지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까 종장 전 파트인 인디언들이 번형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경우에는 눈물이 나왔다. 
저건 분명 파라다이스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그들은 박제가 되어가고  있고 그 증거로 그들의 이야기들이 텍스트로 전해지고 있으니까 매우 복잡한 기분. 신화는 구전되는 것이고 그걸 텍스트로 만들고 학문화 한 것들은 그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낸 사람들이니. 그래도 저렇게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안도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른 그들의 문화에 침식되어서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안타까워졌다. 보호구역에서 살아야하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그도 아직도 감옥에서 살고 있고... 그래도 나는 반대편 땅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신화를 읽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신데렐라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서 여러가지로 연결된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왔는데, 일본 만화에 변형되어서 많이 나오던 가구야 공주의 야기도 역시 등장. 그녀의 청혼자들에 요청한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알게되었지만, 역시 불편했었다. 그 이유는 크게 <월광천녀>의 그 시선 때문이기도하고 책의 저자가 이웃나라의 교수라서 인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항상 그들의 신화로 시작하기 때문이기도. 2권을 읽었을때도 '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 '단군신화'에 대한 부분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지만, 다른 나라의 신화는 다루고 있었지만, 정말 가까운 이웃한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인류학적인 시각으로 다룬 책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우리'라는 말을 정말 혐오하는데도, 불편한 부분은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나도 '우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논리로 '우리'가 없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는 주장에 뭐라고 반박해야할지 모르겠는데도,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들은 여전히 불편하고 우리가 아닌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차별'로 느껴진다. 자신에(이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다룬 책을 찾아보겠다는 것)대해서 합리화를 하자면, "그냥 이땅에 오래도록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신화의 원형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정도 이겠다. 
하지만 이 땅에 언제 정착했냐는 그 기준으로 '우리' 그리고 '타자'를 나누는 기준은 불편하다. 이 신화가 '우리'의 근원이고 우리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말. 그저 이 땅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과거라고 말해주는 그런 입장을 마주하고 싶다는 것. 민족적(가족적)인 기원이 아니라 단지 그런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불편한 것 이겠지. 나는 당신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당신은 '이타자(외부인)'인가 아니면 우리안의 소수자인가. '국적'적인 부분을 열외로 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나라의 다수가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 국민, 시민)에 대한 기준에는... 그래서 그 신화적 연결성에 대해서 듣는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으려나. 내 안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를 모어를 사용하고 있고 같은 시대적 배경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이기도 하지만, 같은 땅 아래서 살고 있는 사람도 우리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노력중이다. 그건 반드시 그래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그건 길들여지지 않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리 생각해야 하는 것. 
그래서 그 기준이 모어를 벗어나서 좀더 자유로워져서 그 기원이 모두 같다는 것까지 연결된다면 자신의 안에서 우리의 기준은 언젠가는 확장될지도 모르겠다.

그 이외에 기억에 남던 신화적 잔재는 예전에 모 방송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특이한 행동에 대해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신화적 해석을 알려주고 있었다. 콩과 제비집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알고...  방송에서도 이런 부분을 다루어 주면 참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뭐 예나 지금이나 '죽음'에 대한 부분은 공포니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좀 서글퍼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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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잡은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2  <곰에서 왕으로>
요즘 가난한데... 아아 전부 보고싶어졌습니다. 그전에 거금으로 구매한 <슬픈열대>부터 -_-;; 라고 물어보시면 할말은 없지만. 변명은 책이 무거워요오오오오..... 분철해서 볼까말까로 고민하는 요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양장을 저주하는지라; 책값도 책값이고... 무겁고... 뭐 제본상태를 생각하면 양장이 원츄지만요.
재미있는데다가 쉽기까지!!! 나카자와 신이치선생 원츄!를 외치고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들을 멀리한 저를 좀 반성하게되었습니다. 미와자와 겐지선생님의 책을 보고싶어졌습니다. 빌려줘어어어~ 최선생. P선생.;; -ㅅ-/

그전에 도서관에 가는 근면함을!! OTL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곰에서 왕으로 "야만의 탄생" p227,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야만의 탄생
'야만'은 그렇게 탄생하였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조금도 야만스런면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동물들과 가능한 한 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그리고 신화에 의해 철학을 하던 사람들도 전혀 야만스럽지 앟았습니다. 동물을 죽일 때도 상대바으이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필요 이상의 동물을 죽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사회생활에도 야만스런 부분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발레-리는 '아나키즘'을 정의하면서 "자신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규율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이 '아나키즘'의 실천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 사회의 세속적인 시간의 리더인 수장은 산뜻한 말솜씨로 사람이 지켜야 할 덕스러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절대로 야만스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매일 아침 훈시 때마다 부족 사람들을 고무시킵니다. 수장은 같은 부족 사람들에 대해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결정은 장로회의에서 이루어집니다. 재판 같은 것에 의해 자의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 사회에는 권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어 있는 제의의 장에서만('자연'의 힘에 유래하는) 권력이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뿐입니다.
수장의 권위를 유지해주는 것은 이성의 일종입니다. 반면 왕의 권력은 성대한 종교적 의식에 의해 연출되어야 합니다. 왕권은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자연'의 소유였던 권력을 사회의 내부에 있는 왕이 체현하는 것이 왕권이므로, '대립하는 것의 일치'를 당당하게 연출할 수 있는 종교적 제의에 의존하지 않고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내리는 명령이나 결정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결정도 나라가 내리는 것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마음의 무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칭성 사회에서는 이런 불합리한 사태가 가능한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 취해졌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문화'에 의해 운영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는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자연'에게 되돌려주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대칭성 사회에서는 '문화'와 '자연'은 이질적인 원리로 간주되어 가능한 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것인 권력=능력을 사회의 내부로 들여온 왕이 존해하는 세계에서는, 이런 분리는 불가능해집니다. 왕 스스로가 '문화'와 '자연'의 이종교배에 의해 탄생했으며, 나라의 권력 역시 동일한 이종교배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종교배에 의한 구성체에 부여된 이름이 바로 '문명'입니다.
야만은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왕과 같은 존재를 허용한 순간부터, 인간은 마치 힘의 비밀을 '자연'으로부터 빼앗기라도 한 듯이, 그때까지 소중하게 여겨오던 경건한 마음가짐을 상실하고 동물이나 식물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되겠지요.
그러자 '자연'은 개발과 연구와 보호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집니다. 심지어는 곰마져도 더 이상 위대한 신이 아니라, 위엄을 상실한 동물학상의 한 대상으로 왜소해지고 맙니다. 예전에는 동물의 특성으로 여겨졌던 탐욕이나 인색함이나 질투가 이제는 인간의 특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은 동물적 특성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걸 '문화'가 억제해왔는데, 이종교배가 이루어진 이 세계 안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독점물처럼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동물들에 대해서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이 들으면 부들부들 떨 정도로 야만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형태의 야만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 지구화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국가는 '문명'에 적대적인 '야만'과의 싸움을 전세계에 부추기고 있습니다. 왕과 나라의 발생의 내적 메커니즘을 탐구해온 우리는 이런 선동적인 말에 아무런 내용도 의미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만을 낳은 건 바로 문명입니다. 국가가 야만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야만의 발생을 토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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