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주디스 허먼), 삼인
전작 <트라우마>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잡은 책이었습니다. <트라우마>가 나온 출판사와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이 나온 출판사가 달라서 그런지 저자분의 이름이 두개 책이 미묘하게 다르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트라우마>에서는 주디스 허먼, <근친 성폭력~>에서는 주디스 루이스 허먼으로 되어있습니다.
사실 이 책은은 읽으면서 참 소화하기가 힘들었어요. 이 책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말하는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요. 사실 저는 <트라우마>쪽은 별거부감이 없이 읽었는데요. 저의 선생님께 빌려드렸더니 소화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이책에서 말하는 그 성차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2번째 읽었을때 좀 그 입장이 이해되었다 뭐 그런식으로 이야기 하시더군요. 전 그런 부분들은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이것이 성별의 차이인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트라우마쪽에서 충격받았던 부분은 2차대전후 절멸수용소에서 살아온 그분들을 상담 혹은 분석하시던 의사들이 많은 고통을 호소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그분들의 그 느낌을 그대로 전달(?)되어서 상담을 하는 상담자 자신도 그런 고통을 많이 호소했다는 그 사실에 굉장히 충격받았었거든요. 이전에 상담을 해주는 직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굉장히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사실 이 책을 보면서 환자가 의사를 착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사고의 비약도 있었어요. 뭐랄까 그래서 당시에 제가 종결했던 상담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선생님을 찾아가는 것이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어요. 물론 그런 저의 기우라면 기우인 우려는 다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비현실적인 걱정을 기반으로 확장되었다고 알게되었지만요. 뭐 그랬다는 이야기. -.,-;;
이 책을 보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고, 그리고 흔히 하는 변명(?)이 얼마나 가해자 입장에서 하는 자기합리화식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유혹적인 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어요.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들만 존재하고 있었을 따름이지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아이들의 부던한 노력과 그리고 그것을 자기에게 편리하게만 해석해서 아이를 자신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정당화 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친 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가족의 경향에 대해서도 좀더 도식화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폭력안에서 당사자와 그리고 가해자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역활에 대해서도요. 어찌하여 그런 가족안에서 엄마의 역활이 부재하는 지에 대해서도요. 사실 엄마의 역활이나 그런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그런 사례에 대해서 이전에 읽었던 다른 책에서 굉장히 의문이 많았는데요. 이 책을 통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읽으면서 굉장히 의아해 했던 책은 삼인에서 나왔던 성노동에 종사했던 분들의 글쓰기 책 이었어요. 친아버지의 잦은 성폭력이 원인이 되어서 가출을 하게 되었고 흐르고 흘러와서 이쪽에 정착하게 된 그분의 글에서 그분은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뭐랄까 그런 아버지의 성폭력에 대해서 당위성을 부가한다는 느낌도 받았구요. 이 책은 읽은지 더 오래된 책이라서 남아 있는 기억은 이런 느낌이었어요)
무엇보다 굉장히 크게 느꼈던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던 고정된 이미지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부분은 딸은 반드시 아버지에게 애교있는 모습을 보여줘야하는 사랑스러운 존재로만 남아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화두를 던지는 부분과  자녀의 의존 욕구를 능가하는 아버지의 바램 혹은 권리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부모(아버지)에게 사랑스럽지 않아도 자식은 자식인데말이에요. 반드시 딸은 애교가 넘치는 사랑스러운 존재여야 한다는 조건적인 도식은 역시 성역할에 대해서 굉장히 제한적이고 편파적인 시각의 일환인것 같아요. 씩씩하던 무뚝뚝하던... 사랑스럽던 아이는 아이이죠. 그건 그냥 개인의 특성일 뿐. 애교가 많은 남자아이도 있는거고 ... 하나의 성향만 있을 수는 없는거니까요. 인간은 여러가지 성향을 가지고 있고... 그런것들을 균형되게 발달시키는 것이 중요한것 같아요. 
이 책에서는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종단연구의 일환으로 이사람들에 대한 인터뷰에 대한 부분도 있는데요. 이 사람들이 호소하는 고통과 그리고 그 고통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읽으면서 좀 많이 울었어요. 너무 먹먹해서 페이지를 못 넘길때도 있었고... 
정말 많이 고민하고 무섭기도하고 그리고 공부할 것이 참 많은 책 이었는데요. 읽은지 벌써 1년이 흘러가서 기억에 남는건 일단 이정도로 많이 희석되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이책에서 받은 간접적인 공포감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 정말 반대의 성에 대해서 어떤 굉장한 편견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폭력 가해자인 특히 친부나 양부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 감정이... 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데요. 제가 이런 느낌을 받았던건 그만큼 충격적었고 믿기도 어려운 사실을 텍스트로 접해서 그런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애교를 부리는 딸을 이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불편하거나 우려하는... 뭐랄까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감각이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더 힘들었었어요.  
조만간에 두번째 독서를 할 예정이에요. 읽으면서 견디기 힘들었던 부분은 여전히 많고 두렵고 때로는 공포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저는 용기있게 페이지를 펼쳐 볼 예정입니다. 이책은 다른분들랑 읽으면서 피드백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책이에요. 저와함께 피드백을 나누실분 조심스럽게 모집해봅니다. 

*

아이들이 털어놓은 부모에 관한 불편한 진실<당신의 아이가 울고있다>, 엘리자베스 마쿼드, Y브릭로드 
제목이 본문 내용과는 미묘하게 거리가 있다고 느낀 책이었어요. 제목이랑 표지가 달랐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좀더 많은 부모님들이 일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표지에서 전달받은 메세지는 막연한 부모에 대한 어려움에 대한 부분이었지만, 책은 굉장히 구체적인 인 대상에 관한 책 이었습니다.
이혼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에 대해서 연구하고 상담한 내용인데, 이혼 가정 아이중에서 비교적 행복하게 이혼(과연 존재할지 의문스럽지만)이라고 평가되는 집단과 그리고 이혼후에도 양쪽 부모 모두와 주기적으로 연락하고 함께 사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 본인이 이런 '불행한 결혼보다는 행복하다는 이혼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경험과 그리고 비슷한 입장에 있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사례에 나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언론에서 포장해서 소개되었던 '행복한 이혼가정'의 아이들이 어떤 고난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책이었어요. 저자는 '언론에서 말하는 행복한 이혼(?)을 한 부모의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의 어려움도 저렇게 많은데... 행복하지 못한 이혼을하고 그리고 이혼후에도 여러가지 트러블이 많은 부모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떻겠느냐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서로의 가치관이나 문화의 배경이 다른것이 가장 큰 부분이고 그 부분에 대해서 서로가 협의점을 이끌어내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 그리고 한쪽 배우자의 외도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이혼을 하고 나면 그 부분에 대해서 부모들이 조율하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그것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온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포스터에 처럼 시골에서 사는 아빠에게 여름방학에 다녀가고 도시에 사는 엄마와 학기중 생활을 하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두개의 양극단의 가치관에 맞추기 위해서 아이는 끊임없이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강요받고 그리고 스스로도 그렇게 되도록 부던히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혼후에는 한쪽 부모의 외모에게 더 많은 것들을 물려받은 외모는 반대쪽 부모의 집안에서는 비난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혼한 부모 사이를 왕래하는 아이들은 양쪽 부모 모두에게 버림받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양쪽 모두 집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며,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냥 부모가 화가나서 일시적으로 던지는(?) 말인 "너네 아빠(엄마)네 집으로 가버려!"라는 말은 아이들을 근원을 뒤흔들 정도로 불안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현실로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만약 내가 부모가 원하는 조건적인 부분을 선택하거나 취득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렇게 될수 있는 연장선상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아이들의 노력들을 부모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이나 여러가지로 인해서 인식하지 못하며, 아이를 통하여 이혼한 배우자가 어떻게 사는지 알고자하거나 조정하고자 하는 경향이나... 
아이는 양쪽 부모의 집을 오가면서 점차 자신의 원래의 형태를 잃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두개의 극단적인 가치관에서 조율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며, 그리고 더 상처받은 한쪽부모에게 다른 한쪽 부모의 집에서 함께한 생활을 어디까지 공개해야는지로 끊임없이 고민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상처받은 부모의 상처를 더 늘리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 아아. 정말 그들의 고군분투하는 노력들은 ... 
책을 보면서 불행한 결혼생활보다 행복한 이혼이 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혼한 부모들을 위한 이혼에 대해서 환상을 부여하는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이혼에 대해서 자녀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서 말이지요. 그렇다고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혼보다 더 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한 이혼이더라도 이혼은 아이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오고 그걸 간과하거나 미화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자 저자는 텍스트로 힘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선택이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 결과도 역시 가볍거나 낙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고 있어야 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반응형
*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 테리 리얼, Y브릭로드
예전에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월간지에서 심리학 관련해서 책을 추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주목할만한 신간으로 소개되었었다. 당시에는 그냥 뭐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좀 있었지만, 선뜻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었다. 근래에 발행한 꽤 많은 남성의 시점으로 심리학을 이야기한 책들이 헛소리 수준은 책을 좀 봐서... 뭐랄까 제목에 대한 거리감도 있었고 출판사 이름도 생소했기에 그냥 뒤로 넘겼었다.(알고보니 여기는 웅진 계열;;)
이번달에 책을 몰아서 사면서 이 책도 고민하다가 질렀는데 책의 띄지에 있는 추천 멘트중에서 무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의 저자인 존 브래드쇼의 추천사가 있는걸 보고 깜짝 놀랐음. 그 내용은 "우울증에 빠진 남자들에게 의미심장한 통찰력을 주고, 그 남성을 사랑하는 여자들을 위로하는 책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흠.."이라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겼고 <뉴욕타임즈>가 이 책에 내린 찬사는 "남성 운동이 한 발짝 전진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여성 심리학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었다. 존 브레드쇼의 추천사와 <뉴욕타임즈>의 찬사로 구입한 책중에서 이 책은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순서로 올라왔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본문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와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사람도 이 길을 가게 된 이유가 개인적인 비중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아버지가 나누었던 대화는 나를 충분히 눈물짓게 만들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건드리지 마라. 너까지 끌고 들어가니까."가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충고는 틀렸다. 나는 아버지한테 휩쓸려 어두운 소용돌이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를 움켜줄 때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과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를 분리해서 바라보고자 노력했고 그리고 한 인간으로써 아버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위로해줬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그의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 그와 그의 동생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던건 아닐까 싶다.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손을 내밀고 그리고 그 고통스럽고 벗어나기 힘든 유산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상속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는 그의 어머니와는 그런 연결고리가 거의 없었다는 것. 뭐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은 <남자가 정말 하고 싶은 말>보다는 좀더 공격적인 제목이 더 어울렸을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책의 모든 부분에서 '젠더의 정의'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성별은 타고 나는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러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의 증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길러지는 것과 매한가지로, 남자 또한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길러진다는 것. 이건 정말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자가 남자로 길어지면서 받는 그 이중적인 고통에 대해서 좀더 많이 알게되었고, 굉장히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의식하고 있는데도 그래도 무의식속에서 가끔씩 나오는 한마디 들은 사회에서 규정한 젠더의 규정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스스로도 그 한마디에 깜짝 놀라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정. 허허허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을 느끼기 전에 부정이라는 회피를 언제나 선택하고 만다. 그래서 남는 건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습관적인 거라는 건 정말 무서운 거다. 살아온 세월만큼 그 깊이도 더 깊어졌을테니. 

추천사나 해설에서도 '남자'들이 읽으면 크게 공감하거나 깜짝 놀라는 책이라고 말했지만, 내 남자를 이해하기 위한 책이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책에 가까웠다. 이건 뭐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내담자들의 에피소드들을 느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튼간 나는 그랬다. 서구는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가는 승자와 패자로 극단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서 사례에서 이야기 되었던 내담자들의 이야기는 남자던 여자던 그 크기에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가지고 있는 부담감은 모두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여자분들도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임상 사례와 이론적인 설명이 굉장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번역도 잘 되어 있었기에 접는 페이지들이 많았다. 읽다가 기억하고 싶어서 페이지를 접었던 시기는 심리학 관련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정도 이었는데 말이다. 그런걸 생각하면, 이 책은 많은 것들을 전달하는 굉장한 책이 아닐까 싶다. 심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젠더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책. 
EBS에서 나온 모 책을 보면서 빡올랐던 기억이 나면서 이 책을 그 제작진들에게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젠더'로 규정하고 그것들을 젠더를 규정하는 단어와 연계해서 만들지 말아주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 방법이 굉장히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인건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그렇게 했을 경우에 우리에게 모르게 가해지는 위해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주길 바랄 따름. 당신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나는 여자라는 성별이 주어져서 태어났고, 그리고 여자로 길러지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잘려나갔고 그 기준에 의거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 당했다. 나라는 인간이 그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여성'이라는 성의 안에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다. 그런 기준안에서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던 또 다른 이중적인 승자와 패자의 논리. 그것들을 쟁취하면서 스스로가 어른들이 규정한 여성으로 남는 길이 과연 있을것인가? 적어도 내가 나의 2세를 출산해서 키운다면 그런것들로 부터 자유롭게 키우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왔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다. 

*
카이데 소바주 4<신의 발명> 인류의 지와 종교의 기원,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읽은지는 꽤나 지났지만, 시리즈 3권에서 부터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번권도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웠던 이론. 이 책을 보면 일신교를 종교로 가진 분들은 굉장히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뭐 나는 딱히 '어떤것이 사실이다. 진리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관계로 그냥 저 멀리서 구경하는 느낌으로 읽었다. 다신교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으며, 읽으면서 좀 불편한 부분이 있었는데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가 자신의 문화에 대해서 좀 과잉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좀 들었다. 뭐 나는 개신교의 교리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신교의 기본이 되는 그 부분과 자본주의의 기본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알것 같기도 하면서 모르는것 같기도 해서^^;; 
분명한건 모든것들은 장단점이 있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닌가 싶다. 차이를 인정하고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포인트라면 포인트. 거기서 개선하려는 노력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베스트가 아닌가. 어찌되었던 자본주의에 대한 부분은 뭐라고 말하기 힘들었던 건 지금 누리는 것들이 그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서 누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포기하라고하면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것인가. 나는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많은 비합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모르는척 하고 살고 있다. 이제는 뭐 이런것으로 굉장히 자학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슬퍼하는 건 계속하고 있다. 나를 위해서 애도하고 거기에 있는 당신을 위해서 애도하며 나의 생활에서 크게 나가지 않는 방향으로 그 방향으로 가고자 노력은 하니까. 




반응형
1 
BLOG main image
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by dung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407)
우리집 곰두리들 (149)
만날만날 (52)
토동토동 (370)
리뷰 (514)
나의 시간 (145)
알아차림과 수용 (0)
S - 심리치료 (145)
S - 일러스트와 디자인 (24)
w - 모에모에 설정 (0)
W - 나의 끄적끄적 (0)

달력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05-03 03:34
tistory!get rss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