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
<별을 노래한다>1~6, 타카야 나츠키, 서울 
'부모'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 언제나 화두를 던지는 타카야 나츠키 선생은 사실 <날개의 전설>때부터 좋아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후르츠 바스켓>을 중도에 포기했기 때문. <날개~>때와 매한가지로 여전히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의 아픈 부분을 보듬어주는 토오루가 있었고 그리고 토오루와 고양이군을 응원했지만, <후르츠 바스켓>작품내의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와 그리고 그 여자의 캐릭터를 견디기가 힘들었었다. 뭔가 단행본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나락에 빠지는 기분이랄까. 뭐 여튼간 당시에는 그런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었고 그래서 지금도 <후르츠~>의 엔딩은 모른다. 그 후 전개도. 
그 시점으로 이 양반에 대한 애정을 접고 있다가 현재 출간되고 있는 <별을 노래한다>를 잡았다. 동기는 그냥 최근의 이 양반은 어떤 상태일까에 대한 궁금증에 가까웠다. 백천사 라인쪽에는 좋아하다가 대작이후에 망가져서 다시 볼 용기조차 내기 힘든 작가분들이 많은 관계로 이사람도 그렇게 되었는가 아닌가가 주요 관심사 이었다. 이 양반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는 항상 일괄되게 관통해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연재작에서 그 부분에서 그 이전보다 굉장히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권에서 아오이가 치히로의 부모에게 외치던 절규는...
 
" 경찰?! 웃기지 마! 어른은 그렇게 태연하게 짓밟고서도 보호받는거야? 
그런데 왜! 이건 너무하잖아. 왜 사쿠라는! 왜 아이들은 지켜주지 않는거야...!!!"

부모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받지만 부모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쿠야. 아이는 부모의 애정을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아이들의 마술적 사고안에서는 부모의 그런 학대하는 모든 행동들에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 보통 일반적인 반응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뻔하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던가. 아니면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행동을 야기한다던가. -_- 
학대받는 아이들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에게 거는 최면이 얼마나 강력한지 생각하면... 나는 달려가서 그 부모를 정말 ... 아 정말 그런 어른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기에 이 분노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아이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부모에게 화를 내는 것이... 그네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이외에 살수없었다는 당위적인 이유를 대어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고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에게 화를 내야겠다. 당신이 성인이 되서도 성인아이로 남아있어서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식과 배우자에게도 당신의 그 불행을 노래하는 거지같은 사고의 패턴이 침식하고 있으니 책임지라고. 제발 좀 정신좀 차리라고. 솔직히 말하자면, 성인아이인 부모라면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현 상태를 그 주제를 알도록 노력해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퍽이나 그런게 가능하겠는가. 분명 그들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겠지. 차라리 제도적으로 뭔가 장치가 마련되었면 하는 하는 바램이다.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인간이 인간(아이)을 키우는 무거움에 대해서 말이다. 아이는 당신의 삶의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서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구. 

부모에게 애정을 받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도록 사쿠야는 부던히 노력했지만, 그녀에게 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아이의 고통어린 호소는 들리지 않는 부모. 자신의 삶(이익)이 우선이기에 아이는 도구도 아닌 쓰레기로 취급하고... 존재자체를 부정받는 그 상황에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치는 거의 없다고 보는것이 답이겠지. 
부모로부터 방치와 부모화를 요구받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부모에 대한 애정을 포기한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한 방법으로 가면을 쓴 아이 치히로.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엄마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매달리다가는 자신까지 망가지겠다 싶어서 엄마를 포기했다는 그의 말. 그래서 더더욱 그녀(사쿠야)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그. 굉장히 달라보이지만 결국 똑같은 두아이. 두아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었던것 뿐.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개개인마다 다르니까.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은 이 사람이 뿌린 다른 장치(주로 개그지만)들로 인해서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고통스런 부분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나온다. <날개의 전설>에서도 버려진 아이의 상징으로 나오던 그녀. 그리고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따라다니던 그 또한. <후르츠 바스켓>에서도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원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에게 치명적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은 정말 나름대로 그 나이의 아이로서는 잘 견디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별의 노래한다>에서는 주인공인 시이나와 아오이뿐만 아니라 시이나의 동거인이자 보호자인 카나데도. 그리고 친구인 히지리와 유우리또한 그런 부분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자식을 방치하는 누나로 부터 조카를 대려와서 함께 사는 아오이의 삼촌에게도 그런 부모가... 그러니 아오이의 엄마는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그런 방법으로 반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최근 읽는 책에 의하면 자신의 성격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세대는 부모 그리고 조부모 또한 자신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친다고 나와있었다. 치히로의 엄마는 '어떠한 이유에서 그런 삶을 살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삶을 거의 놓아버린 아오이 앞에 나타난 치히로. 그들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개인적인 생각은 그들의 만남은 고통을 알기에 그 고통에 반응해버린게 아닐까 싶다. 상처가 있는만큼 보인다고 생각한다. 평범하다고 말하는 범주의 삶을 선택받은 아이들은 아래에 내려와도 이해하기 힘든 공감대. 아오이 자신을 위해서 사쿠야를 사쿠라로 보고 말을 했다고 해도, 사쿠야는 구원받았다. 그의 말에. 온전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데 그 사랑스러운 말에 행복해지지 않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말은 매우 반짝거리는 말들이었다. 그가 그 말을 하게된 이유도 그녀에게 그말이 필요했다는 것을 직감 혹은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라. 그녀에게 끌리는 이유도 결핍된 부분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고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라.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살아감에 있어서 그 구멍은 메워지는 것이 아니니까 또 그 구멍을 다시 만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구멍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반짝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고통 받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현재가 있어야지만 가능하리라. 앞으로 나아가는 사쿠야와 카나데.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치히로는 그녀의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두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다행히 그의 과거를 알게된 사쿠야는 여전히 그에게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그런 사쿠야를 걱정하는 히지리는 치히로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만, 그녀의 '혼자 두고 가고 싶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에 그녀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되었고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상처들을 서로 보듬어 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다음권을 봐야지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굉장히 걱정하는 마음이 줄어든건 괴로워 하는 치히로를 보듬어 주면서 생각하던 카나데의 독백때문이었다. 힘내렴.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들을 안고 앞으로 함께 나아가는 건 분명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때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아마 네가 옆에 없었다면 그만큼도 버티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마 나만이 아닐꺼야. 그것을 알기에 그녀도 그런 행동을 했던거고. 어른들이 해줘야 할 부분을 그 사람들이 방치해서 그렇게되어버린거야. 원가족과 분리하는 것은 제도권의 시스템과 그리고 원가족의 다른 한 부모가 그 사태를 정확히 알고 개입해야지만 가능한데, 그들은 자신들의 그 구멍을 체우기 위해서 당신들의 딸을 희생한... 그 구멍은 다른것들로 체운다고 해서 체워질 구멍이 아닌데 말이지. 


+
아아 보다가 얼마나 빡치던지. 최근에 읽고있는 존 브레드쇼의 <가족>에서 읽은 문구들이 머리에서 빙글빙글. 더 짜증나는건 내 주위에도 저런 부모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 그리고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치히로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분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새삼스럽게 화가나서... 새삼스러울것도 없지만. 굉장히 현실적인 작품들을 보면 감정이입이 되는게 가장 문제인것 같다. 그래서 이 양반의 전작은 읽다가 포기했는지도 모르지.  
작품은 작품으로 즐겁게 분리해서 보면 참 좋을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나의 안에서 분노가 여전히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자신의 분노나 슬픔이나 체념에 대해서 스스로가 그만큼 잘 알아주지 않았다는 그 증거겠지. 그리고 저 이야기가 현실에 가까우니까. 






반응형
BLOG main image
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by dung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407)
우리집 곰두리들 (149)
만날만날 (52)
토동토동 (370)
리뷰 (514)
나의 시간 (145)
알아차림과 수용 (0)
S - 심리치료 (145)
S - 일러스트와 디자인 (24)
w - 모에모에 설정 (0)
W - 나의 끄적끄적 (0)

달력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12-03 03:30
tistory!get rss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