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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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수놓이는 소리>4, 토리코 긴, 학산
완결권이에요. 우리의 현실과 아주 부합한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를 넘어가서 만들어진 세계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는 초월적인 이상이나 꿈은 없었어요. 엔딩조차 잔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종의 개체로서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게되어 구원 받은 - 구원이라는 단어가 애매할지도 모르지만, 환경에 의해서 보통(보통이라고 정의되기도 애매하지만)의 혹자는 이상적인 인간이라면 알고 있어야 할 인간의 따스함을 알게 된 부분- 존재는 체리이더군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건 역시 만들어진 이야기 일지도 모르겠어요. 현실세상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전 그런걸 두고 '기적'이라고 한다고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요. 
그는 인간으로서 고독한 삶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삶의 고독했던 그에게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는 오직 아저씨 뿐 이었지만, 아저씨의 마음에는 체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다른 존재들이 있었어요. 그런 아저씨를 보는 걸 그는 괴로워하더군요. 마음속에는 하나의 존재만 있어야 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걸로 보여졌습니다.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분노와 자신이 그런 버림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노하고 그리고 그 분노를 그들의 대표적 존재에게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체리는 보는 눈이 있는것 같습니다. 아저씨나-, 족장님이나- 모두 그런 그의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으니까요. 살아있는 존재로서 고독하게 살아왔던 그의 삶을 그는 그것을 지나치게 괴로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며 정면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괴로움도... 그의 분노도... 포장이나 확대도 없이 그저 그것을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었어요. 
인간으로서 고독했던 그에게 빛은 내려왔습니다. 아저씨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싶다고 말했고, 구스타가 그에게 왔고 그리고 그녀가 그를 향해서 날아왔습니다. 자신의 고독과 그 두려움을 알아주는 그녀가 그에게 왔습니다. 구스타와 함께... 그리고 구스타는 아저씨에게 그가 결코 고독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다시 그들을 향해서 갑니다. 이번에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서요. 

종으로서 멸망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그 위기에서도 헬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그 상황을 포지티브한 상황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일족의 재앙을 생각하며 두려워 하며 이런 비통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그의 소중한 친구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일족의 마지막 예언자인 리버는 그들에게 그들이 종으로서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합니다. 절멸의 위기는 그들을 살짝 빗겨간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혼은 소중한 존재인 폭스를 가슴에 묻게됩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끝에서 그 위기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족의 마지막 예언자가 자신을 희생해서 교환한 그 노력은 어딘가에 있는 소수민들의 힘이 되어주는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사실 저는 '냉정하게'라고 적고싶습니다) 보여주더군요. 
리버는 예언자의 마지막 힘을 쓰면서 인간이 종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했던 취사선택안에서 그들의 버리고 가야 했던 것들을 보고...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슬퍼하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드가 리버가 이해한 그런 것들을 모두 이해했고 그가 그들을 위해서 대안을 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인간-이 살아가는 그 공간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지켜주는 것에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 재현되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그가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어떻게 수정해서 앞으로 나아갈지는 인간으로서 그들-그와 그외의 인간들-의 전망에 따라 다르겠지요. 이것이 참혹하다고 제가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한편으로 종으로서 고독하지 않았다고 예언한 리버의 예언은 그들의 종은 공룡에서 새라는 존재로 이어저 내려오고 있고... 어딘가에는 다른 새종족을 찾아서 혼자서 여행을 하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도 그리고 어딘가에서 부락을 이루고 다시 그들의 깃털을 기르고 살아가는 그들을 예견하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버는 로드와 등가교환법칙에 의해서 소수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대안 혹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장치 아니면 예비책을 마련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일족들이 그 오지에서 살아남아서 개체성을 이어간다면 그들은 이전에 그들이 생각했던 그런 온전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고유성을 어느정도는 놓아두겠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구전되는 방식이던지 아니면 그들의 신화로 남아있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자는 그들의 생활 습관에 일부로 남아 있는 방식이겠지요. 
그런식으로도 다른 개체의 문명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들은 종으로서의 몰락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고 몹시 슬퍼졌습니다.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들은 그들로서 이전의 방식으로는 그대로 살아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또다시 인간의 존재 - 스스로가 완벽한 혹자는 중심인 문명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 에 의해서 그들은 세상에 재발견 되는 날이 필연적으로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철저하게 박물관화가 이루어지며 유린당하고 그리고 그들-인간-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소비되겠지요. 오늘날의 많은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가 그러듯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로가 의미가 있다면 있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원형을 유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박탈감은 분명 평생 담고 살아갈것 같습니다.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하고... 그리고 새로운 답을 찾아서 떠나는 형국으로 말이에요. 세상에 나오는 길을 선택하고 그리고 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아가는 길은 정녕 없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좀더 형평성을 유지한다면 그런 영역의 대안들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국가에 속해있지 않아도 인간으로서의 개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들 스스로의 경향성을 지원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고유성에 대해서 서로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면요. 양극단을 오고가는 이 세계의 주축이 되는 이 세계관은 어떻게 해야지 극복이 가능할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전 좀 네가티브한 면이 있어서 '살아있다'라는 것 만으로 충족되는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살아있다'라는 그 텍스트는 여러방향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숨을 쉬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는 고유한 개체가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공간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존중받고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양극단을 오가는 논리로 비난받고 결박당하는 일이 없어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온전하게 인간으로서 개체로서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더라도... 살아있다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한겁니다. 지금의 이 논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공존 할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다는 환상... 그 환상은 지금의 저를 서있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에요. 
사실 마지막에 잭이 우는 장면에서... 그가 모두에게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만들어진 이야기로만 받아들여 지고 그리고 그들의 살아가기 위한 경향성을 충족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나름의 필터링으로 걸러내서 듣는 현실이 그에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 그에게는 가슴속에 살아있는 사실이고 그의 소중한 마음인데 그것이 그냥 그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이요. 인간은 얼마나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면을 볼려고 애쓰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부던히도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이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살아가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위에서 말하는 그 이상이라면, 그들에게는 잭이 말해주는 이야기 - 잭에게는 사실 - 가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두에서 잭이 했던 걱정은 그냥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 관점적인 걱정일 뿐. 그런 일은 현실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잭의 최악의 상황이 온게 아니라서 다행일지... 아닐지. 나탈리가 그가 말한 진실을 진실이 아닌 그녀를 위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 인간에게는 멋진 방어기제가 있어서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한 것 같아요. 그들(조인)은 이것을 알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잔혹한 공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한 충족조건이죠. 어떤이는 '낭만'이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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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수놓이는 소리> 2, 긴 토리코, 학산문화사
아아 베스트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감히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세계관이나 주장이 있는 이야기거 얼마나 될까요? 긴 토리코씨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계의 균열에 대해서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이런 부분을 담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팬레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일족의 아이들이 최후의 날을 피해서 살아남기를 택했지만, 그들은 멸종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고 단지 그것을 지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대 새인간이라는 설정이지만, 그건 인간대 자연이라는 설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은 문명화 된 인간과 원시적인 형태를 유지하며 살아갈려는 소수민족.
헬로가 택한 선택과 리틀 울프가 택한 선택 둘 중에서 정녕으로 그들을 위한 것은 어떤것일지 아직까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일족의 예언자 조차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2권의 마지막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의미가 공존을 의미하는 것인지 변절(주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는 것을 상대 입장에서는 변절이라고 하니까 변절이라고 했습니다만, 변절도 먼가 괴리감이 느껴지는데 달리 생각나는 단어가 없네요. -_ㅜ)을 의미하는 것 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자연(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자연과 평화적 공존)를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면 그들이 그들로서 남아있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를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 한지 아니면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멸하는 것이... 그건 그들 자신의 선택이니까 제 삼자적 입장에서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주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이 끝까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들의 세성을 지켜가다가 그것들을 계속 소소하게라도 이어나갈 수 있는 내일이 왔스면 좋겠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럴리가 만무하지만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상상속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그 세계조차 절망스럽다면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워요.
만화를 보는 목적은 즐거움과 현실도피인데 그곳에서 현실을 보게된다면 그건... 그렇다고해서 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먼 균열(주인공만 예외인 설정)을 보는 것도 괴롭지만, 적당한 노선에서 타협점을 찾아서 희망을 보여주면 좋겠어요. 별로 그렇게 될것 같지는 않지만요.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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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리스페셜>3, 카미오 요코, 서울문화사
비교적 최근에야 <꽃보다 남자>를 끝까지 봤습니다. 이전에 보다가 덮었던 이유는 역시 '이지메'와 '부에 대한 인식'이었어요. 무조건적인 부에 대한 동경(혹은 신성화)이 불편했었거든요. 사실 저는 그것보다는 이지메쪽이 더 불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요. 끝까지 본 지금에 와서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어요.
'부는 계급을 이어가고 상징하는 절대적인 가치'라는 테제가 불편했던 것 이었어요. 그 세계에서는 계급간의 이동은 없는 세계로 설정되어 있으니까요. 물론 주인공인 그녀가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을 하지만, 그건 그 주인공에 한정된 이야기이니까요. 현실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누구라도 아주 잘 알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던거 같아요. 그래서 그건 그냥 판타지 일 따름이죠.
<꽃보다 남자> 이후의 작품도 드라마화 되었지만, 이것도 불편할거 같아서 보지 않았었어요. <마츠리 스페셜>의 경우에는 설정 때문에 보게되었습니다. 역시 여기에서도 그런 불편한 부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완벽한 미'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부분. 근데 사실 그런 만화들이나 드라마나 영화는 지천에 깔려있는데요. 왜 카미오 요코씨의 작품을 그렇게 불편해 여겼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좀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여튼간 <마츠리 스페셜>은 그런 불편한 부분을 감안하고 볼 수 있었어요. 이유가 뭘까 찬찬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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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 여름 하늘> 1, 요시즈키 쿠미치, 대원씨아이
마법사 시리즈는 처음 봤습니다. 보면서 이전 시리즈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1권 마지막의 에피소드인 그 아이의 사라진 고양이를 찾아주는 이야기를 보면서요. 고양이 입장에서는 주인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랬을거 같다는 그 말이 내내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그건 그녀 자신이 그녀의 주위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시작에서 그녀의 그 미묘한 표정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시한부 인생이라니...
마법을 쓰는 사람들은 대도시로 갈 수록 배척받으며 탄압받는 존재라는 설정도 우리들의 세상에서 분명히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녀가 자랐던 시골에서는 그런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웠다는 설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미묘했습니다.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일본은 그런지 모르겠습다만, 여기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거든요. 특히나 긴급출동 SOS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요.
시골이 더 인간적이 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환상이나 희망에 지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그런 사람들 보다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요. 사람은 참으로 간사해서 보이는 것들 위주로 정의를 내리고 그 주위를 만들어가거든요. 그냥 저의 생각에는 '그렇게까지 노골적이지 않다'라는 정도. 그리고 더 가부장적이고 그리고 더 전근대적이라는 생각입니다.
도시의 경우에는 익명성을 무기로 그곳의 경우에는 전근대적 혹은 가부장적인 가치관으로 인간이 인간을 내려보니까요. 물론 도시에 사는 인간도 그런 사람들이 지천에 깔려있지만요.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우리는 우리(내가 속해있는)와 다른 존재들을 보면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려 하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재포장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환산하는 존재로 있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어요. 내려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지니까? 다른 존재에 대해서 하등시 하면 안도감 안정감이 느껴지니까? .....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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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멘>7, 칸노 아야, 학산문화사
가벼운 느낌(?)으로 읽고 있습니다. 전권에서 나온 그 가수를 보고 모 만화와 설정이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7권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이 사라졌습니다. 작가는 <오토맨>을 연재하면서 7권까지 단행본이 나오게 되었고 그리고 드라마화도 되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독자의 입장은 어쩐지 좀 불편하네요.
정말 그리고 싶어서 그린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거든요. 이전작인 단편집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게되었는데요. 그건 스토리 라인도 그렇고 원고의 퀄리티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작품상의 분위기 때문에 <오토멘>의 작화는 그런 모양이지만, 미형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전작보다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_=;;
<오토멘>이 <마츠리 스페셜>과 달리 불편하지 않은 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이 다수의 기준인 성적 정체성과 다르지만, 그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토멘>의 세계속에는 주인공을 제외하더라고 기존의 남성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소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지만, 회피는 하지 않는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사 회피라고 보이지만, 그래도 작은 움직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그런 느낌들을 받았거든요.
책을 보면서 내내 우리가 얼마나 '성에 대한 환상과 이미지 혹은 편견이나 고정된 관념'에 의해서 지배받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성의 가치관에 위배되는 행동에 대해서는 정당화를 하지만, 그건 타인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닫아 버리고 만다는 것도요. 참 부끄러웠습니다. 노력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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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코 긴
<하늘에 수놓이는 소리>

설정이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이 처음 나오는 단행본이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일웹쪽은 일맹이라서 검색해보지 않아서 아직 국내에 발간하지 않은 단행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국내에는 아직까지(?) 이 작품만 소개되었습니다. 전개도 좋았고~ 아직 1권까지 나왔지만, 앞으로 매우 기다려지는 작품. 일본쪽에서는 책 띠지의 추천사를 이마 이치코 선생님이 써주셨나 봅니다. 단행본은 학산쪽에서 나왔는데 그런 부분은 없었는데, 저자의 후기를 보고 알게되었습니다.
그림도 취향에다가... '아 저런 설정도 있구나~!'하는 감탄도 매우 큰 작용을 해서 몇배 더 즐거웠습니다. ^_^* 조류인간이라니!! 멋지구만요!!

이야기의 배경 무대는 아마 1차 대전이나 2차대전 즈음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아니면 유럽쪽에 있었던 국가간의 영토 전쟁이거나요. 알프스쪽이나 아니면 히말라야가 배경이 아닐까 추측해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서 역시나 추측으로만 망상해봤습니다.^^;
새 종족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남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전쟁터에서 도망친 탈주병인거 같습니다. 아니면 패잔병일지도 모르지요. 그 남자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터에 나왔지만, 그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남자입니다. 직업도 의사라서 우리(그 나라 혹은 시민)이 살아가기 위해서 타인을 살해해야 한다는 현실에 많은 고통을 느끼는 거 같습니다.
그런 그의 위태로운 삶에 어느날 상처를 입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구하게 됩니다. 편의상 '새 종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격리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인간에게 발각되었을 때는 실험체로 전락하고 만다는 인식으로 인간에게 발각될 경우에는 그 인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세상에서 알리는 것을 막아왔습니다.
새 종족의 아이는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나 매우 경계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아이를 잘 돌봅니다. 이윽고 새 종족의 어른들이 아이를 대리고 가게되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전까지의 전례를 보건데 그들의 정체를 안 인간은 모두 그들의 손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새 종족의 전사들은 그를 죽이러 떠납니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온 새종족의 아이는 헬로라는 새 이름을 받고,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러 친구와 떠납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서 그가 만들어주는 애플파이를 먹으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그들의 전사가 그의 집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을 건 사투가 시작됩니다.
그는 새 종족의 여자 전사와 마주쳤을때 여자까지 전쟁터에 나오는 현실에 좌절하게 됩니다. 그를 보고 헬로(그가 구해준 아이)는 그의 진심을 읽고, 새종족의 어른들을 설득합니다. 그리하여 새종족의 사람들은 그를 살려두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그 동거는 새 아이(헬로)의 양자가 되는 방법으로 그들과의 연을 이어서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절멸되는 새 종족의 내일을 그가 바라보며 서술하는 이야기인거 같습니다. 그가 구한 새 종족의 아이 헬로만이 운명이 바뀌었다고 그들의 예언자가 말하는 걸로 봐서는... 최후에는 아저씨와 헬로만 살아남지 않을까 하는 추측해봤습니다.
새종족의 모습은 인디안의 느낌이 많이 났습니다.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며 인디언의 텐트와 비슷한 가옥에서 살고 있으며 머리에 인디언이 다는 깃털같은 것이 있는데 그건 그들의 털이었습니다. -_=;; 두둥!! 아침에는 털을 고르기도 하구요.

책은 인간이 아닌 조류인간이라는 설정이지만, 그들이 살아가려는 방식은 소수민족들의 방식들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고 그리고 그들의 언어가 점차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고 그들의 정체성이 사라져가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에 좀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일족의 절멸이라는 것은 다른 종족(인간)과 섞인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정체성(여기서 새종족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 입장으로 뭐든지 해석하는)을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봤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고대인(인간)들처럼 자연=인간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 혹은 감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것들을 착취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 자연으로 부터 하나 얻었으면 돌려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는 그런 개념(생각 혹은 가치관)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라는 공간에서 더 오랜기간 생존 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책을 바라본다면 정말 슬픈 절멸- 인간성의 상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하늘에 수놓이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도 살짝. 여러가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
오늘 아침에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할려고 보관함에 들어가보니까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가 전권 5,000원만 받고있어서 원래 가지고 있었던 2권만 빼고 나머지를 죄다 구입했습니다.-ㅂ-;; 그래도 가격은 매우 저렴!! 만세!!! 포스팅은 모든 시리즈를 다 읽으면~ 해보겠습니다. 음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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