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를 보다가 삼천포로 빠지게한 인용이 있었는데요. 그 내용인즉...
이 사람은 원숭이보다도 더 추한데도 자기 자신을 니레우스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은 선 3개를 정확하게 그렸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유클리드로 자처하며, 또 어떤 사람은 리라 앞의 당나귀이고 목소리가 암탉을 물어뜯는 수탉의 목소리만큼 시끄럽게 울리는데도 헤르모게네스처럼 노래한다고 믿는다.
- Erasme, op. cit. 미셀 푸코, <광기의 역사> 인용중에서
당시에 이글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친우 ㅁ씨와 대폭소하고 말았습니다.
이보다 더 당시의 우리가 처한 기분을 절실하게 묘사해준 글이 또 있으려나?
글이란 정말 대단합니다. 완전 욱겨서 그만 완벽하게(?) 그 순간에는 위로받고 말았습니다. 이럴려고 광기의 역사를 열어본건 아니었는데... 타이밍이 참. 후후후.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니레우스처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그사람을 보는 나는 정말 괴로웠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 괴로움은 서로에게 가급적이 아니라 정말로 삼가해야하는 '추악'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그렇지만 그때의 저의 태도도 그다지 바람직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더 확실히 이야기 했어야 했었다."가 답인거 같습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더라도... 그편이 더 좋았던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선한 사람인척하는 놀이'를 하고 있었던걸까요? 아니면 그냥 동물원에가서 구경하기를 했던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저는 저의 돈을 내고 그 동물원에서 사료까지 주면서, 거기다가 오물청소까지 했기 때문에 그 점이 지금에 와서 괴로운 과거사가 된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후회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면, '바보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덤을 만든다면, "그건 애정이었어." 라고 치졸하게 스스로에게 변명해봤습니다. 그런거죠.
요근래 그 때와는 또 다르지만 비슷한 감정과 조우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웃음만 나오더군요.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핳. 화도 안나는건 그만큼 '애정'이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잘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라고 최근 읽는 책에서 데리다가 지적했다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지금의 현실을 피하고 있는걸까? 라고 생각했는데요. 대면하는것은 어려워서인가? 아니면 폭발한 상태의 저를 알기 때문일까?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생각해봤는데... 역시 답은 저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문제를 떠나서 그럴 가치를 못느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치 없다는 것 만큼 비참한 결론도 없는데 말이지요.
지금 저는 그때와는 또 다른 상황을 만났지만요.
그 가치가 없어서 다행인거 같습니다. 두번은 경험하고 싶지 않아요. 정말이지...
하지만 만약 그때와 같은 상황을 또다시 조우하게 된다면 진심을 전해주겠습니다. 서로에게 넘지 못 할 선이 생기더라도요. 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선은 존재하게 되었으니까요. 상대방이 그 '선'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최소한 그사람에 대한 저의 애정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성의'이니까요. 부디 행복하세요. 당신.
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저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좋아했군요. 당신. 기운내요. 당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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