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숙청을 언급하면서 정의를 외칠 때마다 모리악은 자비를 말한다. 내가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마치 증오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애기하면서, 모리악은 우리가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중오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단지 치욕 없는 진실을 원할 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내가 단지 모리악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조국을 죽음으로 이끈 두 개의 길이 있는데, 중오와 용서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중오에 대해서는 일말의 애착도 없다. 인간으로서 나는 반역자를 사랑할 줄 아는 모리악을 존경하지만, 한 시민으로서 나는 모리악을 불쌍히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반역자와 졸개들의 국가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회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는 모리악은 내 얼굴에 예수그리스도를 던지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정의를 좌절시키려는 자비를 거절할 것이다.
- 1945년 1월 1일 <투쟁> "정의와 자비" 카뮈

온 국민에 관련된 진실이 문제가 될 때, 정의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침묵시키는 것이다. 바로 모리악이 말하는 자비를 말이다" 
- 1944년 10월 25일 <투쟁> 카뮈

우리의 모든 과거의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 1944년 9월 8일 <프랑스 문예>

 숙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보았듯이 낱말들을 정렬하여 문장을 만들기 전에 그 낱말들을 곰곰히 따져봤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에서 얻을 교훈이 있다면, 이념을 먹고 사는 인간, 즉 원칙적으로 지성계에서 일하는 자는 글을 쓰는 바로 그 순간에 자기 글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또한 유행과 체제를 넘어서서 자기 글에 대해 치욕을 느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자신이 썼던 문장들 가운데 어떤 하나 때문에 비난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글을 쓰는 순간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자기 글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만 하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자기 글을 다시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피에르 아술린

작가는 무엇을 하든 "현장"에 있다. 심지어 첩첩 산중에 들어가 있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누구든지 자기 시대의 "장터"에 참여해 있다. 심지어 침묵조차도 하나의 입장이고 정치행위이며 지식인으로서의 참여의 표현이다.
- J. P. 샤르트르

지식인의 죄와 벌 / 두레 / 피에르 아술린


그시절, 매우 좋아했던 지금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는 카뮈님.
처음 이방인을 보고나서 그의 다른작품들을 찾아서 보았던 연유는..  부끄럽지만, 사실 매우 단순한 이유이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건 마치 그건 솔제니친의 작품을 매번 볼때마다 대폭소하며 보았던..;;; 러시아의 현실을 알턱이 만무한 나에게는 그가 서술하는 이반씨의 하루는 그냥 지나가는 위트에 불가했던것 처럼, 민망하지만 그게 어린시절 그 두사람을 처음 접하고 받았던 느낌; "진짜 욱긴데~" 정말 멋진 감상인거 같습니다. -_-;; 지금 생각해보면 조낸 부끄러운 과거;; 세월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 결론이 생의 비참이더라도 인정할것은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 아닐련지. 우리는 우리에게 당당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의 과거사도 청산하지 못한채 언제나 과거에 매여있습니다. 과거를 극복하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찌질한 저자신이 그 산 증거입니다. (웃음~)

친우님께서 해주신 충고.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라는 말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음먹은 만큼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매번 좌절하지만, 조금이라도 단절(선택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달리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하는것이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은 "용서", "인정" 아니면 "단절" 혹은 "근절"일까요?

텍스트와 담론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글들 이었습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지요.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 "매우 힘들지만.. 적어도 노력만은 하자"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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