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자극-저의 코어를 건드리는-이 되었던 부분은 어제(2월1일 월요일) 유정과 아버지의 엘리베이터에서의 대화 이었던거 같아요. 

사실 원작을 보던 시절에는 말그대로 타인의 삶을 구경하는 입장에서 지켜봤던 쪽 이었습니다. 그건 이야기 속의 타인의 고통이었고,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분명 건드려지는 부분이 있었을텐데도 고통이 저에게 도달하여 생각이 샤워를 하면서 생각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게 만들었던 부분은 유정과 아버지의 유정이 가지고 있는 '통제욕구'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던졌던 말 이었습니다. 저의 생각엔 그건 타인과 상황을 통제하여 우위를 점유함으로서 월등한 존재로 남아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도록 허용받지 못하는 환경이 있었기에 그걸 허다루기 위해서 상대방과 상황 모두를 통제하려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비춰졌습니다. 그건 분명 좌절이 없어서 그러는게 아니었어요. 불안과 고통을 낮추기 위하여 성장하지 못한 아이가 습득한  유일한 방법-방어-일 뿐인거죠. 

유정이라는 아이가 진정으로 행복해 지기 위한 첫걸음은 아무래도 아버지가 걸어둔 세뇌에 대해서 의구심을 느끼는 것이 시작일거 같아요.
그래야지만 좀더 불행한-외부적 입장(저라는)에서 바라보는 서술입니다-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거 같은 느낌. 그래서 유정에게 가장 필수적인 좌절은 아버지가 주장하는 통제 욕구 혹은 우월감의 추구에 대한 좌절이 아니라 아버지의 애정에 대한 좌절이 가장 우선이 아닐련지. 아무리 노력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애써도 죽는 날까지 본인이 원하는 형태의 사랑-피드백-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어야 지금 가지고 있는 옷-아버지의 가치관-을 벗고 좀더 자신답게 나아갈 수 있겠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거기에 투자되던 에너지가 다른데 투자 될 수 있을테니 좀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보다 더 자원-에너지-가 늘어아서 삶이 좀더 윤택해 질 가능성도 열리게 되겠지요. 내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은 상대방으로부터 상대방으로부터 받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는걸 받아들이고 그 분투에서부터 좀더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해봅니다. 



저에게 유정에 대해서 가장 안타깝게 느껴졌던 부분은 그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 인거 같습니다.  
자기 아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본시 본인으로부터 기원한 것이고 그 이상하다는 지점의 기준을 형성하는 축의 구심점중 하나가 자신의 완벽주의라는걸 1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가 아닐련지요.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하여도 아이는 아이인데 이 사람은 이 명실상부한 사실을 간과했어요.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우려되는 혹은 두려운 존재-괴물에 가까운-로 보는 것은 아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줬을까요? 부모가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건 영특하기에 더 잘 인지하고 있었을거 같고, 그렇기에 아버지가 요구하는 당위를 더 따라가려고 애써왔던거 같아 보였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코어한 부분-최약점-이 개선이 아니라 아에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건 그냥 그거에 사로잡혀 있는거죠. 자기를 도는 이슈가 그거라는 것도 모르는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코어를 건드리는것 같은 혹은 실제로 건드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이의 특질을 있는 그대로 보는것은 불가능 했겠죠. 반드시 사라져야 할 (자신의) 특질이 자신의 자식에게 보이는 것을 견디기는 어려웠을테고, 그런 생각을 강화하는 한쪽에는 박사님도 있었구요. 전문가적인 서포터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달리 뭐라고 해야할까요.
설사 그것이 '여전히'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고 해도 저렇게 부정하는 형태라면, 자기 아이에게 보여지는 혹은 비추어지는-투사의 의미로- 면을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키우는 형태 이었을테고 그 괴물적인 형상은 보다 정확히는 자기 안에 있는 날것을 아이에게 투사한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아니라면 달리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투사하고 그리고 그걸 조절하려는 모습은 저에게는 전형적인 '투사적 동일시'로 보여졌습니다. 


감정을 표현할 수 없고 그런 가이드들로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자아-가짜 자아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네요-와 그리고 진짜 자기의 모습간의 괴리는 살면서 점점 더 커져만 갈텐데 정말 어쩔러고 그러시는건지. 아니 무슨 애한테 자비와 사랑을 배푸는 구도자 같은 역활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르는건가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봤습니다. 
자신이 박사님으로부터 들었던 피드백이 저 영역이 정상의 범주가 아니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대한 기준치를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게 되었던거 같아 보이더군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계속 그 생각을 키워왔을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은 평생 애쓴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너무나 높은 도적적인 기준이고, 그렇기 때문에 좌절은 더 커지고 내적 갈등도 커질거 같아요. 

원작에서는 아버지의 내적 갈등에 대한 부분은 다루지는 않지만, 유정이의 그런 행동에 대한 제삼자의 평가가 1-10 척도에서 5정도라면 이걸 이 아저씨는 모두 10으로 받는 느낌이었어요. 공포적이고 극도로 불안한 느낌으로요.

 


누군가가 좋을 수도 있고 싫을 수 도 있는건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그런데 모두에게 자상해야 한다는 기준은 어디서 나온건지 그 기원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고가 정말 타당하다고 느끼는지 논박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아저씨 본인은 자기가 팔이 안으로 굽는 부모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이가 보기에는 철저하게 팔이 밖으로만 굽고 또 굽는 타입으로 보일겁니다. 성인인 제가 보기에도 팔은 밖으로만 굽는걸로 보이더군요. 정확히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에게는 굽을 일이 없는 팔 이라고 해야하나요? 

그장 빡치는 부분은 이상적 인간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적용하는데 있어서 '형평성'이라는 가이드 라인도 지켜야 하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건 여전히 현재형이구요.
아니 왜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건가요?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해요. 개개인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건 부모쪽 생각이고, 당하는 쪽 아이 입장에서는 그건 '차별'이지 다른게 아니에요. 평등 혹은 차별. 자라는 동안 쭈욱 그런 생각을 하고 자랐겠지요. 당신이 당신의 자녀에게 주신 선물은 그거에요. 평등 혹은 공평에 대한 이슈.

같은 나이의 아이들 이었고 유정이도 엄마가 없었어요. 설마하니 돈이 많다고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길 바래봅니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타인의 아이에게 보이는 자상함이 내내 부러웠을테고 그걸 가지고 싶었을 겁니다. 저 아이만 없다면 저건 나만 온전히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비교할 대상이 없었으면 어떠했을가하는 상상. 그런 상상들은 쭉 이어져왔겠지요. 

그래서 지금의 그 자매를 배제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구요. 이 두사람이 자신의 주변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좋았던 기억은 없었으니까요.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그리고 다른 기준의 잣대를 들이대서 좌절하고 그들을 부러워 하게 만드는 역동이 이어지는데 어느 바보가 저 두사람을 자기 아버지 옆에 붙여두고 싶어하겠어요. 

사랑은 나눈다고 커지는게 아니거든요. 부모의 사랑은 독점하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정상적 반응이죠. 아이라면요. 뭘 나눠요. 나누는 행위를 한다면, 그 나누는 행위를 하는것에 대하서 어떠한 형태의 보상이 있었기에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지 그걸 순수하게 나누는 즐거움-이타적 함의-로 그러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 앞에서 경쟁자이지 협조자가 아니에요. 그런 분투들이 이어지면서 좌절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부러워하는 것에 대해서 통찰하게 되고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됨으로서 좀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궤적은 계단식 성장이 아니라 평생 전자와 후자를 반복하는 패턴으로 이어지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아버지 아래-자신의 자식을 괴물이라고 의심하는-라면 보통 평범하다는 기준의 아이도 정상적으로 자라기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부터 그런 이미지를 끊임없이 부여받는데 아이가 할 수 있는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걸 부정하거나 그절 긍정하거나 양쪽의 극단적인 방향 이외에는 불가능 할거 같은데... 뭐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아이의 민감성의 척도에 따라서 달라질테니까요. 
물론 성인인 유정의 행동에 대해서 정당화, 합리화를 하는건 아닙니다. 어떤 영향으로 지금 어떤 선택을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하지만, 음성적으로 분출하는 양상을 긍정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니까요.
다만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있는 그대로- 그래서 늘 그런 사람을 찾아서 헤메이는 서사가 이 아이(청년)의 삶에 계속 반복적으로 나타날거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설이와의 만남이 결국 실패로 끝난다면, 다음에는 그런 상대방을 만난다고 하여도 시험하고 또 시험할거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곱슬머리 아가씨와 잘 되어주는게 좋겠지만, 주양육자에게 기억하는 한도내에서 허용받은 경험이 없는 아이가 타인에게 얼마나 솔직하게 자기를 들어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굉장히 회의적인지라. 게다가 그래본 경험이 없었고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어디까지 들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할거 같아요. 아주 어린시절 1차욕구가 허용되는 경험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허용 받은 경험이 얼마나 있었지를 상상하면 정말 아득해지는...


유정 파파에게 멜라니 클라인의 <아동의 정신분석>을 강제로 강독 시키고 싶어요. 아무 그냥 멘탈이 탈탈탈 털리고 정신좀 차리라구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동에 대한 환상을 와장창창 날려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코어한 부분을 모르는데 거기다가 완벽주의 성향까지 있는 사람이라면, 그냥 개체를 증식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왜냐구요? 저도 완벽주의니까요. -_-
제발 때려치라구요. 낳음을 당한 아이는 님이 님의 주양육자와 형성한 좇같은 애착관계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으로도 모잘라서 자신의 부정하는 부분을 투사하고 조절하려는 대상으로 쉽사리 소비되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자신의 부정하고 싶은 부분을 왜 아이에서 발견하고 그걸 조절하려고 하는거죠? 아니 시발.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도 무리라서 포기하거나 놓아버렸는데 남을 조절 할 수 있다는건지. 그건 교만이에요. 우리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부질없는 노력을 때려치고 자기안의 것들을 조절하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가 보아요~~~.  이미 말아먹은 자신의 자녀의 삶을 이제와서~ 회복시키려는 노력도 다 헛수고니까 때러치시구요.   




+

덕분에 주양육자가 아이의 정서에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어디선가 주워 들은건 있어서 아이의 정동조절에 관여하는 주양육자의 피드백에 관한 책을 좀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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