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5.31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 8
  2. 2009.11.03 최근에 읽은 책들 - <죽음의 수용소에서>, <주기율표>
  3. 2007.10.20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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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장 아메리, 산책자 
서경식 선생님의 책에서 많이 인용되었던 장 아메리의 선생의 유명한 저작중 하나인 <자유죽음>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출판사는 산책자. 저는 장 아메리 선생의 책이 나온다면, 창비나 돌베개 출판사 일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었습니다. 산책자는 웅진씽크북 단행본 계열사중의 하나로, 최근에 흥미로운 인문학 서적들을 많이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게다가 표지들도 좋아하는 디자이너분들이 디자인을 해서 어떤 디자인으로 책이 포장될지도 기다려지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자유죽음>또한 좋아하는 디자이너 중의 한분인 석운님의 디자인으로 표지나 본문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잘 살려줬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에 대해서 작지만(작은 새) 강한 목소리를 내는 느낌을 살린 표지였습니다. 
이 책은 살려고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시기에 월덴님댁에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북크로싱으로 올라왔기에 사기전에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크로싱을 신청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보신 분은 혜란님과 월덴님. 두분의 평은 생각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두분이 생각보다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를 페이지를 넘기면서... 저도 뭔지 알것 같더군요. 

저 또한 책 자체가 생각했던 내용이나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장 아메리라는 사람을 알게된 경유는 서경식 선생의 책에서 이었습니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책은 <죄와 벌의 피안>쪽 이었습니다. 처음 장 아메리씨의 텍스트를 보게된 책은 서경식 선생이참여한 대담집이었던 <단절의 세기 종언의 시대>쪽으로,가장 기억에 남았던 구절은 서경식 선생이 인용했던 장 아메리의 문장. 그리고 다음에 만난 것이 또 서경식선생님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장 아메리의 글의 인용 문구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만난 인용문이 서경식 선생님이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아서 떠난 책에서... 
그의 책에서 인용되었던, 그 문장의 장 아메리와 <자유죽음>에서 느껴지는 장 아메리는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느낌의 문장도 만나긴 했지만, 수많은 문장들 중에서 그건 정말 간간히 만나는 우연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방향은 같은 아우슈비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 선생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이었거나, 이 두사람과 달리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 빅터 프랭클 선생처럼 개인적인 이야기와 본인의 주장을 담은 이야기가 적당히 섞여 있을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우울증에 반대한다>라는 책과 굉장히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울증에~> 저자 피터 D 크레이머는 책에서 시종일관 정말 힘들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힘을 빌어서요. <자유죽음>에서도 장 아메리는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있었던 일을 토대로 계속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나갑니다. 사실 그 시대에는 그 사람들이 정말 유명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취약한 이쪽 세계의 사람인 저로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가 인용했던 그 많은 사람들의 태반은 모르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저작 또한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 참 많았습니다.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책들은 언제나 나에게 그 간극을 느끼게 해서 참 서글픕니다. 이론으로 무장했던 당시의 시대적 기반에 충실해서 여러사람이 나왔던 간에... 

저는 당신이라면, 그런것들(비하하고자 함은 아닙니다)의 힘(텍스트의 힘이라고 해두죠)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개인적인 체험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었나봅니다. 정말 지겹고 또 지겹고 힘들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지루한 싸움이었나봅니다. 저는 종교가 없고 그쪽(유럽)의 종교적 기반에 의한 가치관의 프레스가 어느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들은...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그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조금씩 좋아져 갑니다. 아주 천천히요. 여전히 편견의 벽은 높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소수지만 당신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대로 받아드리는 집단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달리 우울증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이 정신분석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구요. 지금의 주류의 치료법은 인지 행동적 이론에 근거해 있고, 과거와 같이 전기치료나 정신분석이 대부분의 치료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치유(치료)의 목적은 당신이 생각하는 '기능성'에 대해서 개선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삽화의 상태가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고통의 경감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방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 견디기 힘든 지루한 고통때문이고 그 고통의 경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이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안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택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은 알고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책을 덮으면서, 당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으며 얼마나 고통받았으며 이 책을 쓰면서도 얼마나 많은 것들과 싸워왔는지 알게되었습니다. 당신들의 노력이 있기에 지금 저는 조금더 안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살아남아 있는 것 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죽음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살다보면 좋은 것을 더 볼 수 있다고 아쉬움이라던가 그런것들을 화두에 담지 않습니다. 그냥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 따름. 본인이 아니고서야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짜피 모든것들은 타인의 고통일 따름. 체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같은 압력으로 작용하는 체현일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이 느끼는 그 무게는 다르니까요. 결코 같아질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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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내가 빅터 프랭클 교수의 책을 처음 본 것은 한 3년전 전으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를 읽고 난해해 했었다. 책의 광고 멘트와는 달리... 상당히 많은 문장의 구성이 이론적인 텍스트들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단순 명료한 그런 답을 찾고자 그 책을 펼쳤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뭐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잡았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활을 2부는 그가 주장하는 이론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을 3부는 그 연장선상으로 비극속에서 낙관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와 있었다.
역시 1부를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솔제니찐의 <이반~>를 읽을때의 그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묘한 이질감. 레비 선생님의 책을 읽을때도 그랬지만, 그것이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지금에 와서 <이반~>을 다시 읽으면 그때 느꼈던 '재미'가 지금에 와서는 '고통'으로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의 수용소도 생존률이 50% 미만이라고 모 책에서 읽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의 책이 소설이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것들을 담았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부에서는 로고테라피 기법을 이용하여서 그들의 굴절된 부분을 역발상적으로 인지시켜 줌으로서 치료를 하는 예시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나는 그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그냥 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사고의 패턴이 생활 습관처럼 배여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 뭐 아직 3부까지 읽어본 것이 아니고 그리고 로고테라피 이론의 입문서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어떻게 생환했는지가 메인인 책을 봤으니까...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인간은 학살을 자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나 그런 잔혹한 공간에서 숭고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였다. 그래 그런 존재이기도 하지. 그런 사람은 아주 극소수겠지만. 그 공간에서 희망을 보는 그의 생각에 대해서 진중하게 탐독할 에정임. 뭐 그래서 다른 저작들도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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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돌베개
돌베게에서 나온 레비 선생님의 저작으로 <이것이 인간인가>와 세트로 보면 더 좋은 책 이었다. 개인적으로 <휴전>을 가장 읽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책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돌베개의 책을 사면 독자 엽서가 있어서 항상 다른 저작들도 번역해달라고 애독자 엽서를 보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훌쩍
이 책은 레비 선생님이 아우슈비츠에 가기 전까지의 에피소드가 메인이다. 뒷 쪽에는 아우슈비츠의 에피소드도 조금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도 조금... 가장 기묘한 기분이었던건 <이것이~>에서도 읽었던 그 독일인 교수의 이야기 부분이었다. 독자인 나도 분명하게 불쾌해졌는데 이 양반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면... 누가 감히 '용서' '화해'라는 말을 꺼내는 걸까? 그런 단어들을 꺼내는 것은 그런 것들에 침범당해보지 않고 그런것들을 침범하는 군상이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감히 그런 텍스트들을 꺼내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염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기억을 지워도 분명히 어디 한구석에서 살아있다가 치밀어서 올라오는 부분일텐데. 개인적인 부분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나에게도 그런데 말이지 퍽이나 가능하겠어 그런것들이. 그 무지를 그 알려고 하지 않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건 역시 인간의 교만이 아닐련지... 아..아 정말이지. 치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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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리뷰/텍스트 2007. 10. 20. 09:43 by dung

용기를 내어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잡았습니다. 과연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저는 냉정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까가 가장 고민이었습니다. 3페이지정도 넘겼을 무렵…….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이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밥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로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 여행, p15,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그는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것이 현실임을 그곳으로 가기 전에 확인하듯. 그는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텍스트를 받아드리는 인간들의 방어적 구조를. 그는 그렇게 질문을 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분노도 오열도 아닌 뭔가 좀 더 다른 감각. 매우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 미묘한 신경쓰임의 이유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자신과 마주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가 그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그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 "이것이 인간인가?"앞에서 저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 철저하게 타자화하여 마치 그건 현실이 아닌 가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그 감각으로 그의 텍스트들을 익숙하게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감각은 일전에도 느꼈던 수많은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느끼던 그것. 하지만 저는 그때는 생각하기를 멈추었습니다. 어쩐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것이 저를 멈추게 했었던 거 같습니다.

2007/09/07 02:08에 책에서 보고 멈추었던 그 글. 
포스팅 제목은 '고통의 망각과 텍스트의 중독'. 저는 그렇게 정의하고 멈추었습니다.


이 감각은 결코 낯설지 않았습니다. 눈치 챘지만 멈추었던 그때의 감각. 더 오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솔제니찐의 그의 인생을 걸었던 작품. <이반데소비치의 하루>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던 저의 감각과 인정하기 싫지만 매우 흡사했습니다.
이건 자신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방법인가? 아니면 인간이라서 인간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의 방어적 구조인 보호장치인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멈추어야 했지만 곧 다시 저의 타자화에 대해서 알아버렸습니다. 
그런 인간다움을 간직한 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고통을 당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기 시작했고 또다든 그들의 고통에 휩싸여서 그들의 고통을 역사의 기억의 조각으로 넘겼었습니다. 그들이나 또 다른 사람들 모두를 철저하게 타자와 할 수 없는 것이 저 자신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정의하는 개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타자화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그 감각으로. 
강요되는 그 민족으로 정의 되는 정서. 강요되는 우리라는 정서. 그 저변은 우리가족이라는 정서…….
우리가족의 혹자는 우리의 이익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터인더. 언제나 타자화로 마무리하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피투성이 저의 손, 저 자신의 상처와 타자의 상처는 보이지만-정녕 보이는 것인가?- 멈출 수 없다.?"라는 정당화로 마무리되는 방어적 구조.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니.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정녕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싶은 겁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딘가에 있는 당신은 희망이 있다고 흐느적흐느적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당최 이런 것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행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작은 노력에 희망을……." 그건 방어적 구조에 불가한일지도. 스스로 존재를 앞으로 이어가기 위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민폐는 계속된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동안. 이런데도 앞으로 나아가야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을 용기도 없는 것이 여기에 서있는 저. 다행인것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당신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인간이니까.
당신에게 눈을 돌리고, 나에게도 눈을 돌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저 인간을 위한 길이 있다.
우리를 위한 그 길이.
망설이지 말고 걸어 나가자..
뒤를 돌아보지 마.
돌아봐서는 안 돼.
그들에게 휩싸이지 않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
우리들이 주장하는 이것이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정의.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인 우리로 남을 것인가?
인간이 아닌 타자로 남을 것인가?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선택하여라. 
그래서 당신은 인간인거다.

책은 천천히 넘기고 있습니다. 
저는 미련하게도 자신이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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