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볼테다!!'라고 노래를 부르던 아민 말루프씨의 <사람잡는 정체성>을 받고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표지가 정말 당황스럽더군요. -_-;; 이분 이런 느낌의 강렬한 존재감(!?)의 글을 쓰시는 분이 아닌데... 극단적인 느낌을 주는 표지는 먼가 연결이 되지 않는 느낌을 받으면서 설마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의 전쟁>을 기억하면서 펼친 <사람 잡는 정체성>은 역시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분하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사람을 잡는(죽이는)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레바논 출생으로 초기기독교 종파...(-_-;; 기억이 잘.. 게다가 이런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중의 하나인 *** 부락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종교분쟁으로 많은 고통을 받는 나를 떠나서 프랑스에 안착하여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기자이었습니다.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그, 그리고 같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강요받는 혹자는 강요하는 정체성의 문제점에 대해서 매우 차분한 어조로-아마 이 느낌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과 함께 보아서 더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런 부분은 경험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것을 본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인가라고 조금 생각해봤습니다. 제목처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는 책의 모든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들리고 있었습니다만, <사람잡는...>는 그 또한 많은 고통을 받았음에도-물론 고통의 경험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지만, 상대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규의 차이인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두사람의 고통을 저는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보기에는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서 축약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자서문
1장_ 나의 정체성, 나의 소속들
2장_ 외세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3장_ 지구촌 부족들의 시대
4장_ 표범을 길들이다
맺는말
옮기고 나서
사람의 정체성은 단 한가지로 규정될 수 없다는 그의 이야기에 부끄러워 하며 또 반성했습니다. 지당한 진실이지만, 언제나 가볍게 넘어서 그런 방향으로 가고 말아버립니다. 제한된 경험에 의한 편견은 무섭습니다. 저를 무서운 시선에 가두고 그리고 타인을 제한된 장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전히 무지한(;;) 저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초기기독교 소수단체들이 많았었다는 이야기에 부끄럽게도 놀랐습니다. 물론 과거에 그들은 여러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는것에 대해서는 알고있었습니다. 최근 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번역자주에서도 단호히 지적하는 각주에 다시 한번 반성했습니다.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가장 무서운건 무관심과 무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꽤 오래전에 적다가 다시 적으려고하니 흐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서 어렵네요.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까 다시 적어봅니다.)
많은 분들의 글들에서 종종 인용되었던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서문에서 부터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1961년판 서문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의 서문은 찌프려진 눈을 원래대로 돌릴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상 독자가 다르다고해도... 더욱더 충격이었던건 그가 이 서문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 이었습니다. 그런건가? <- 라고 생각하기에는 저에게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부끄러운 서문을 뒤로한채로 저자신이 그라면 그리고 만약 아직도 살아있다면 결단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책들을 회수해서 화형을 하고 싶은 기분일거 같습니다. 뭐 그때의 그런 생각이 그럴수도 있다...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부끄러운 과거는 무덤으로 가져가고 싶은 기분이랄까요.
제목이 그대로 표지에서도 다가오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시작부터 충격이었지만, 본문 역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느 페이지이었는지는 자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서구의 원조에 대한 언급부분은 어려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네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강탈해갔으며, 이제와서 원조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선행(?)에 대해서 감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더 많은것들을 받야아하는데 그렇지 못한것이다. 라는 이야기었습니다. 번역자로부터 걸러지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받아드리는 저로부터 또 걸러져서 결국 저에게는 이렇게 도착했습니다.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괴성이 느껴저서 보면서 괴로웠던 본문들을 지나 파트 5의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 부분에서는 말을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언가 이책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았는데... 지나고나니 저편으로 지나가 버렸네요. 그렇지만, 파트 5에서 함께 놀던 프랑스 어린이를 죽인 알제리 어린이의 인터뷰 내용은 눈을감아도 생각나버립니다.
상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극복하는것은 어떤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단호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인간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하는일은 너무나 버거워서 도망가고 있는거 같습니다.
우리네들의 상처는 여전하며 시선은 극복되지 않았으며 그리고 과오는 계속되는거겠지요? 가끔은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반성하면서 또 반성하다보면 언젠가는 보일꺼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울하네요.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의 전쟁>을 기억하면서 펼친 <사람 잡는 정체성>은 역시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분하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사람을 잡는(죽이는)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레바논 출생으로 초기기독교 종파...(-_-;; 기억이 잘.. 게다가 이런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중의 하나인 *** 부락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종교분쟁으로 많은 고통을 받는 나를 떠나서 프랑스에 안착하여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기자이었습니다.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그, 그리고 같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강요받는 혹자는 강요하는 정체성의 문제점에 대해서 매우 차분한 어조로-아마 이 느낌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과 함께 보아서 더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런 부분은 경험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것을 본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의 차이?인가라고 조금 생각해봤습니다. 제목처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는 책의 모든곳에서 비명과 절규가 들리고 있었습니다만, <사람잡는...>는 그 또한 많은 고통을 받았음에도-물론 고통의 경험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지만, 상대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규의 차이인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두사람의 고통을 저는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보기에는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서 축약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자서문
1장_ 나의 정체성, 나의 소속들
2장_ 외세에 의해 근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3장_ 지구촌 부족들의 시대
4장_ 표범을 길들이다
맺는말
옮기고 나서
사람의 정체성은 단 한가지로 규정될 수 없다는 그의 이야기에 부끄러워 하며 또 반성했습니다. 지당한 진실이지만, 언제나 가볍게 넘어서 그런 방향으로 가고 말아버립니다. 제한된 경험에 의한 편견은 무섭습니다. 저를 무서운 시선에 가두고 그리고 타인을 제한된 장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여전히 무지한(;;) 저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초기기독교 소수단체들이 많았었다는 이야기에 부끄럽게도 놀랐습니다. 물론 과거에 그들은 여러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는것에 대해서는 알고있었습니다. 최근 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번역자주에서도 단호히 지적하는 각주에 다시 한번 반성했습니다.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가장 무서운건 무관심과 무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꽤 오래전에 적다가 다시 적으려고하니 흐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서 어렵네요.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까 다시 적어봅니다.)
많은 분들의 글들에서 종종 인용되었던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서문에서 부터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1961년판 서문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의 서문은 찌프려진 눈을 원래대로 돌릴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상 독자가 다르다고해도... 더욱더 충격이었던건 그가 이 서문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는 점 이었습니다. 그런건가? <- 라고 생각하기에는 저에게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부끄러운 서문을 뒤로한채로 저자신이 그라면 그리고 만약 아직도 살아있다면 결단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책들을 회수해서 화형을 하고 싶은 기분일거 같습니다. 뭐 그때의 그런 생각이 그럴수도 있다...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부끄러운 과거는 무덤으로 가져가고 싶은 기분이랄까요.
제목이 그대로 표지에서도 다가오는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시작부터 충격이었지만, 본문 역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느 페이지이었는지는 자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서구의 원조에 대한 언급부분은 어려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네들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강탈해갔으며, 이제와서 원조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선행(?)에 대해서 감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더 많은것들을 받야아하는데 그렇지 못한것이다. 라는 이야기었습니다. 번역자로부터 걸러지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받아드리는 저로부터 또 걸러져서 결국 저에게는 이렇게 도착했습니다.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괴성이 느껴저서 보면서 괴로웠던 본문들을 지나 파트 5의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 부분에서는 말을 이어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언가 이책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았는데... 지나고나니 저편으로 지나가 버렸네요. 그렇지만, 파트 5에서 함께 놀던 프랑스 어린이를 죽인 알제리 어린이의 인터뷰 내용은 눈을감아도 생각나버립니다.
상처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극복하는것은 어떤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단호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다면 정말 좋으련만, 인간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하는일은 너무나 버거워서 도망가고 있는거 같습니다.
우리네들의 상처는 여전하며 시선은 극복되지 않았으며 그리고 과오는 계속되는거겠지요? 가끔은 앞으로 나아갈 때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반성하면서 또 반성하다보면 언젠가는 보일꺼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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