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읽으면서 타이핑 해야겠다는 부분이 하도 많아서 지금 타이핑하면서 또 추렸습니다. 거이 모든 페이지를 접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부모를 반드시 존경하고 사랑하고 부모가 원하는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할 필요는 없다는 그녀의 말은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몸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부모의 요청대로 행동했을때 몸이 받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안다면 현실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는 것에 저도 매우 공감했습니다. 과거에 학대받았던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이 사실이 주류에서 외면 받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점차 그녀의 주장에 동감하고 비슷한 연구자료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했을때는 안심했습니다. 앨리스 밀러가 1923년 생이니까 과정을 다 마치고 한참있다가 책이 나왔다고 해도 그것도 매우 오래전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건가?' 했습니다. 뭐 아직도 주위에는(저의 지인들은 아니지만)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옛 직장의 상사는 딸을 손으로 때린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매로 때리면 사랑이 덜 느껴진다고... -_- 먼눈.
폭력을 사랑으로 치환하는 것은 오랜 전통인가봅니다. 그건 결코 사랑이 아니죠. 폭력은 폭력일 따름. 폭력의 행사는 본인의 마음속의 분노가 원인이지 상대방이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기준에 상대방에 따르지 않았을때의 분노이지, 상대방의 그 행동 자체로 분노를 느낀다는 건 말도 않돼요. 그리고 폭력을 행사함으로서 본인의 스트레스 해소에 대해서는 뭐라 할말이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들의 변명이 궁금해요. 뭐라고 할지...
사실 서양에서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경'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요. 네번째 규율(십계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는 걸 보고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존재는 하는구나 라고 알았습니다. 그래도 이 나라만 하겠나 싶지만요.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다음에 도서관에 가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사랑의 매는 없다>도 빌려봐야겠습니다.
부모도 피해자고 자식도 피해자고... 그리고 그 자식이 자라서 노력이 없다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겠지요. 부모의 부모도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이기도 하구요. 그 연결고리를 절단하기 위해선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할꺼 같습니다. 아직도 보고 자란 습관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고, 나의 감정은 온전의 나의 것을 전제로 깔고 대화해야하는데 화가나면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학습된 방식, 들어왔던 방식으로 재현을 하고 말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됩니다. 저의 모습에서 부모의 모습을 보니까요. 그건 정말 견딜 수 없어요. 부모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포괄적으로 어느 정도는(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깊이의 나락이 얼마큼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지 깊다는 것, 그래서 좀처럼 위로 올라오기가 힘들다는 것. 공부해도 반복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노력이 부족한걸까요? 라고 가끔 생각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그 결론에 대해서 저는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거 같아요. 책에서 나온 사람들 처럼. '그렇게...까지는 아니다.'라고, 그래서 아직도 고통스러운 거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말이죠, 정말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몹시 두렵습니다.


+ 그녀의 도서들
<사랑의 매는 없다>, <천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는 현재 절판. 알라딘쪽 리뷰를 보니 그녀의 저작중에 제일 엑기스라고... 별 다섯개로도 모자르다는 말에 좌절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에게 애정, 관심, 보호, 친절,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부모가 늘 자기와 의사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선물을 받은 몸에는 좋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사랑받고 자란 어른은 훗날 자녀에게 그와 똑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선물을 전혀 받지 못한다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그 최초의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갈망이 '과거의' 그 아이를 평생 떠나지 않는다. 이 갈망은, 훗날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 또한 사랑을 덜 받고, 또 교육이라는 핑계 아래 무시당하고 학대받은 아이일수록, 어른이 된 이후에 자기 부모나, 부모와 같은 존재에게 더 강하게 매달린다. 그리고 엣날 그 중요했던 시기에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들에게 기대한다. 그것이 몸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몸은 자기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잊지 못한다. 텅 빈 구석이 있으면 그것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 수록, 과거에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받는다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게다가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를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주로 자기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전가한다. 이와 같은 메커니즘을 의식하고(진실한 감정에 대한) 억압과 부정을 극복하여 우리가 지나온 어린 시절의 현실을 되도록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훨씬 그 이전부터 충족시키고자 했던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자신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부모가 베풀어주지 않았던 관심과 존중, 감정에 대한 이해, 필요한 보호, 조건 없는 사랑을 스스로에게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과거에 바로 우리 자신이었던 그 아이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을 심리요법에서 배우려면, 우리를 지금 모습 그대로 받아줄 수 있고, 보호하고, 존중하고, 가엽게 여기고, 또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이 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학대받던 옛날의 그 아이를 위해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 프롤로그 폭력과 체별 앞에 무력했던 어린 시절, p17~19

아마도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같이 그런 태도(잔혹하기 그지 없는 온갖 사건을 긍정적이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해석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것)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는 자기가 보고 느낀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해석한다. 곧 제3자가 보았으면 명백한 범죄라고 규정할 행동을 선행으로 해석하려고 애쓴다. '간접 보호자'도 없이 가해자 앞에 통째로 내던저진 상황에서, 아이에게는 감정을 억압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이 아이들이 훗날 성인이 되어 다행히 '전문가 증인'을 만나게 되면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가해자를 동정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또 가해자를 위해, 가해자가 느끼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을 느끼려 하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부연하자면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명확하게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치로 몸은 큰 짐을 벗을 수 있다. 이제 몸은 어른이 된 자기에게 어린 시절의 그 비극적인 과거를 위협하듯 상기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 성인이 자신의 모든 진실을 알고 싶어 할 때, 몸은 당장 그가 자기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보호해준다고 느끼게 된다.
나는 폭력적인 방식의 '교육'을 학대로 간주한다.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존중받아야 할 아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일종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가 모욕과 품위 상실, 학대를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에 맞서 저항한다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성인이 된 아이는, 그런 교육을 본보기로 삼아 대물림하고 배우자와 자기 자녀를 대하며, 직장과 정치판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다. 요컨데 과거에 두려움에 떨던 그 아이의 불안을 외적인 권력의 도움을 받아 떨어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그런 교육을 행한다. 그로 인해 인간을 경멸하는 자들과 독재자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한번도 존중받아본 적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성인이 되어서는 거대학 권력의 힘에 기대어 사람들에게 그 존경을 강제로 얻어내려고 한다.
권력에 대한 굶주림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절대로 사라지지도 충족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정치에서 목격할 수있다. 더 큰 권력을 차지할수록 그런 인간들은 결국에는 반복충동에 빠져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의 그 무력감을 되살리는 행동을 저지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 프롤로그 폭력과 체별 앞에 무력했던 어린 시절, p25~26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억압했던 고통을 자기 안에서 느끼고, 몸이 감정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를 정신적으로도 받아들여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에 부모에 대한 관계까 유지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이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결코 사랑이 아닌, 지금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부모에 대한 애착, 곧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애착은 감사와 연민, 기대, 부정, 환성, 복종, 불안,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 몸의 메세지,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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