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

리뷰/저장고 2009. 6. 5. 16:54 by dung

......
사람들은 보통 '기억력'과 '건망증'이라고 말한다. 기억에 '력'으로 붙이고 건망에 '증'을 붙이는 것은, 전자를 능력으로 후자를 무능력 혹은 병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기억은 좋은 것이고 망각은 나쁜 것일가. 니체는 거구로 말한다. '망각'이야말로 건가오가 힘의 징표이며 능력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교통사고나 끔찍한 폭력을 당해 심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우.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 매일 복수를 꿈꾸는 사람은 어떤가. 그는 과거의 상처에서 코를 뗄 줄 모르는 개처럼 현재 속에서 과거만을 사는 사람이다. 이런 이들에게는 기억이 병이고 망각이 건강이다.
니체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에게 망각은 의식의 소화작용이다. "우리 몸에서 '육체적 동화'가 이루어지는 수천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들은 우리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의식의 문과 창들이 일시적으로 닫히는 것이다." 건강한 몸을 생산하기 위해 신진대사가 자동으로 일어나듯, 우리 의식에서도 새로운 기억을 얻기 위해 필요한 망각이 자동으로 일어난다. 건강한 자는 특별한 노력 없이도 적절하게 잊을 줄 안다. 이 자동 제어 메커니즘이 고장났을 때, 즉 의식이 "일종의 소화불량 상태에 바졌을 때", 우리는 과거의 말들에 체해서 고통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근심도 없이 풀을 뜯는 저 '초식동물'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각 덕분에 불행을 모르는 초식동물의 행복을 우리가 무엇 대문에 부러워한단 말인가. 니체는 기억을 비난하고 망각을 찬양하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기억을 병으로, 망각을 건강으로 다룬 것은 어던 조건 아래서만 그렇다. 니체의 물음은 이런 것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망각과 기억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병든 사람에게는 어던 것인가.
건강한 자에게 망각은 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수 잇는 숱한 갈등 속에서 자기 자신을 관리하게 해주는 제어장치이다. 건강한 자의 정신은 스스로 "약간의 정적, 의식의 백지상태"를 작동시킨다. 그렇다면 기억은 어떤 것인가. 건강한 자에게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 곧 '의지의 기억'이다. 자신이 의욕한 것을 잊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능력. 그 때문에 그의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 그는 '원한다'와 '하겠다' 속에서 기억한다. 기억의 미래적 용법 혹은 미래의 기억이라고나 할까. 과거를 기억할 때조차 그는 미래적이다. 그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현재와 다른 미래를 갖기 위해서다. 그는 항상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미래)'속에서만 '그랬다(과거)'를 바라본다.
그런데 약자들, 병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거꾸로 나타난다. 그들의 기억과 망각은 철저히 과거적이다. 어떤 것만을 기억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도 새롭게 기억하지 않으려는 의지. 그들은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 고착되어 있다. 사건이 일어났던 어느 순간, 그때의 정서 상태 그대로 그들은 얼어붙어 있다. 과거만이 그들에게는 생생한 현재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영향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잊지 못하므로 새로이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기억력만 있는게 아니라 기억증도 있다고, 그리고 기억력이라는 말은 정마로 힘과 능력에 의해서 기억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니체가 강조하듯이, 변신의 힘이 자기에게 있음을 아는 사람, 그만이 약속할 수 있고 기억할 수 있다. "설령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말을 '운명에 대항해서'지킬 만큼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힘으로서의 기억, 힘에서 나온 기억을 갖고 있다. 반대로 과거의 어던 흔적에 머물러 있는 사람, 어떤 새로운 기억도 구성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가.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 기억증이라는 진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1부 책속으로, 기억, p36, 고병권, 그린비



+
니체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 짜~아저씨의 문고판 책을 사서 3페이지 읽고 던저벼린 기억이 나네요. 저는 그게 소설인줄 알았거든요. ㄱ- 음후후후후.


반응형
BLOG main image
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by dung

공지사항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407)
우리집 곰두리들 (149)
만날만날 (52)
토동토동 (370)
리뷰 (514)
나의 시간 (145)
알아차림과 수용 (0)
S - 심리치료 (145)
S - 일러스트와 디자인 (24)
w - 모에모에 설정 (0)
W - 나의 끄적끄적 (0)

달력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04-29 06:07
tistory!get rss Tistory Tistory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