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2005. 10. 30

어젯밤에 계속 몇 시간 동안 박유하 교수(세종대)의 <화해를 위하여>라는 신작을 읽었다. 그런데 우경화돼가는 일본과 우리가 꼭 박유하 씨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화해' 할 필요가 과연 있는지, 가해 세력의 직계 후계자들이 집권한 구 식민모국과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지 나로서는 솔직히 큰 의문이다. 일본의 입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자는 저자의 참신한 자세애서 영감을 얻을수는 있었지만, 그 의견 중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럼에도 박 교수의 책을 읽다가 한 가지 부분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기를 인용한 부분이었다. 한 할머니가 말했다는 "왜놈보다도, 나를 모집책에게 팔아넘긴 내 아버지가 더 입다"라고 한 대목이었다. 숙고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너무나 쉽게 '민족'의 테두리에 집어넣곤 한다. 즉, 그건 저들 '악한 민족'을 괴롭힌 '사건'으로 규정되곤 한다. 문제는, 여성이 남성 본위의 사회에서 피해를 입는 사건치고 그렇게 단순한 것은 없다는 데에 있다. 일단 여성은 고질적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는 입장에 묶여 있기에 어떤 커다란 피해를 당하게 되면 꼭 한쪽으로부터만 당하지 않는다. 수많은 가부장적 사회를 보면 강간을 당한 아내에게 남편이 "당신의 행실이 가해 남성을 자극해서 이 재앙을 자초했다"고 오히려 질책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여성들은 남성 우월주의적 사회에서 이중, 삼중의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피해의 복합성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당연히 식민지 구조에서 기인한 억압, 강제성, 민족 차별 등이 근본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정작 피해자 입장에서는 자신을 인신매매한 조선인 남성이나, 자신을 정신대에 보내놓고도 제 딸만큼은 빼돌린 '있는 집'의 조선 여선생이 더 미울 수 있다. '가부장제' '계급' '사회에 만연한 폭력' 그리고 '식민지적 민족 차별과 강제'가 중첩한 상황에서 '민족'적 부분만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피해자에게 2차 폭력이 되지는 않을까? 심지어 1990년대 후반 일본의 '국민기금'을 받은 일분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난한 국내 시민단체나 언론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 '국민기금'이 아무리 "의도가 불순하고 국가적 사죄와 배상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성폭력을 당한 경험 때문에 일생이 망가진 사람에게 우리가 '민족'이라는 이름의 도덕적 린치를 가할 권리라곤 없지 않은가?
사실, 1990년대 초반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고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 남성사회 자체가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이중적 잣대를 갖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예증이기도 하다. '민족적 입장'에서는 '우리 조선인'들이 당한 피해에 대해 일본에 '따질 것은 따져야 하는' 당위성이 성립됐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족 중에서 위안부가 있었다는 것을 '수치'로 보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경위가 어떻든 간에 여성이 중산계층 '현모양처'의 전형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은 중산계층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수치'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위안부 과녈ㄴ 문제로 활동하시는 분들은 늘 "그들은 성매매 여성이 아니었다. 강제로 끌려갔을 뿐이다"라는 부분을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사 '성매매 여성'을 지금까지도 얼마나 멸시하고 차별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위안부들이 '정당한 피해자'가 되자면 '몸을 파는 여자'와의 차이가 거듭 확인돼야 한다. 일제에 의한 강제, 일제에 의한 일차적인 피해는 당연히 인정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차, 삼차, 사차로 피해를 입힌 것은 여성이 이등시민 이상이 될 수 없는 이 사회다. 쉽게 '민족적 의분'에만 빠지곤 했던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반성했을까?
- <만감일기>, p 280,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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