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상에서 카메라의 눈앞에 노출되지 않는 고통이란 없는 듯 하고, 다시 우리는 미디어가 펼쳐내는 이 고통의 이미지들의 과잉 앞에 노출된다.
정지영상이나 동영상에 덧씌워지곤 하는 모자이크는 오히려 이 고통의 스펙터클을 더 사실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그 이미지 속에 재현되고 있는 고통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와 시공간을 같이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정작 고통 자체는 증발되고 사라진다. 우선 고통의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충격의 효과들은 그 자체로서도 단명할 뿐 아니라, 상업주의 매체들이 유발하는 끝없는 자극의 인플레로 인해, 하나의 고통이 이미지가 유발하는 충격과 자극은 곧이어 또 다른 고통의 이미지에 의해 쉽게 상쇄되기 때문이다.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고통, 그것도 타인의 고통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의 스펙터클의 외설성 그 자체에 있다. 투명함, 황홀경, 외설 등의 모든 것이 지수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포화 속에서 보드리야르는 역사, 정치, 성, 주관성, 육체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에 주목했다. 고통 역시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사라진다. 살을 에[는 체험으로서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동정과 공유는 이미지 속에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현되는 고통 역시 그 실체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탈)현대사회의 대중매체에서 맥락에서 탈각된 이미지들은 몽타주 속에서 고통 역시 파편화되며, 그 고통을 유발한 사회적 관계망은 이미지들의 연쇄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그 결과 고통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개인적 불행의 일회성 이미지들, 자신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상실한 고통의 이미지 덩어리로 간락한다. 나아가 고통의 이미지들뿐 아니라 고통 자체가 그렇게 된다. 사진의 발명 이래 시각 이미지는 최고의 존재증명으로 군림해왔고, 이제 21세기의 시각 이미지들은 인간의 눈에는 기술적으로 거이 완벽하다. "여기 있다. 무슨말이 더 필요하냐?"는 이 이미지들의 극사실주의는 고통과 관련된 반성적 사유를 봉쇄해버리가 십상이다.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스스로를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매혹은 더 이상 생산의 양식이 아니라 사라짐의 양식이다. 그 매혹이 고통에의 그 아슬아슬한 매혹이라 하더라도.-고통의 스펙터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주은우, 167p~168p,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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