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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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고미숙, 휴머니스트
북크로싱으로 읽은 책. 월덴님의 포스팅과 그리고 고추장 아저씨 때문이기도 함.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대해서는 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그 관심을 매우 충족시켜주는 즐거운 책 이었음.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유일하게 랄랄라 거리면서 읽은 책. 읽는 동안에는 뭔가 대안들이 많이 떠올랐던거 같은데 읽고나서 좀 지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신기루 같은 느낌을 체험했음.
결론을 말하자면... "어떠한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능. 나는 모처 클럽을 말아먹은 존재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음. 그 이유는 차차 생각하기로 했지만, 결론은 질렸는데도 유지하기 위해서 자의가 아니라 타의 반으로 남아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함. 오래 머물러 있으니까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착화 된다고 해야하나? 뭐 그런... 먼눈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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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된 희망>, 폴리 토인비, 개마고원
책을 고른것은 매우 표지의 힘도 크고(민진기 디자인)... 제목으로 선택된 단어 '거세'에 대한 그 선택이 적절했는가도 하나의 이유이기도 했음. 결론은 '거세된 희망'이라고 제목을 선택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되었음. 책은 영국에서 2004년에 출판된 책인데 2009년인 지금 읽는데도 매우 고통스러웠음. 게다가 원출판사에서 제공한 영국 통계에다가 한국 출판사에서 한국의 상황을 더해서 통계와 분석을 제공하는 페이지가 특히 괴로웠다는... 영국 상황에 여기 이 나라의 상황이 더해지면 O>-< 후후후.
이 책은 3년간(아마도) 면밀하게 기획된 책으로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그 나이때의 이혼한 여자의 설정, 몸으로만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 할 수 없어서 정부기관에 서민 대출을 해야하 하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그 곳에서 살면서 하위층에서 하는 직업으로 돈을 벌어서 먹고 살 수 있는가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담은 이야기다.
그녀가 3년간 그곳에서 살면서 경험한 직종은 국민의로보험서비스에서 외주 파견직 일(잡무), 급식 업체에서의 일(여기도 외주 파견업체), 빵포장 공장에서 했던 일(직접 고용), 텔레마케팅 서비스(청소용역업체의 홍보용, 외주 파견직), 요양보조사(직접 고용) 등등의 일을 했었고, 이 일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쩌면 그럴수가!"라고 외칠수 있는 수준의 노동의 강도에 비해서 매우 적은 수준(최저인금 이하)의 봉급으로 일해야 하는 일 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구직 시스템이 매우 신기(?)해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돈이 드는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설명해주는데 이 부분은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 였음. -_=;;
해당 업체에는 정직원, 파견업체에서 파견된 파견직 그리고 외주 업체에서 고용된 여러가지 직원들(계약직 등등)로 구성되어 있었고 해당 업종에 오래 종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이직률이 높았다. 해당 업종에서 오래 종사하는 사람들은 적은 봉급이지만, 긍지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회사는 이를 이용하여 그들을 더 가혹하게 부려먹는 존재 일 뿐. 모든 상승된 이익의 2/3는 인금 감봉에서 온다는 사실. 봵.

최근 느끼는 건데 살면서 정말 특정 부류의 사람들 하고만 교류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도 그런것들을 매우 통감했음. 고된 노동과 저인금의 공간은 외국인 노동자 혹은 아니면 경제적 위기에 몰린 여자들이 대부분 이라는 2004년의 영국의 모습에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공간을 바라보는 거 같은 착각은 무엇 때문인지. 대처 아줌마의 막장 정치의 행적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고... 공기업 민영화는 여기에서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책의 후반에서는 일하는 노동의 강도와 그 중요성에 비해서 매우 적은 가치로 평가절하 되는 직업군에 대해서 여기서도 지적하고 있었다. 모 책에서 읽은 '가정주부화'가 여기에서도 ~_~ 책의 마지막에서는 지난 몇십년간 받는 봉급으로 치면 하위권에 속한 사람들의 봉급은 거이 오르지 않았는데, 상위권에 있는 사람들의 봉급이 격하게 상승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었고, 그 상위권에 있는 인간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물가 상승을 고려해서 최저인금제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라던가 그외 기가 차는 기타등등의 이야기들이 있다. 허헐.
그녀가 내세우는 제안은 정말 기똥찬 제안들이 가득했지만, 그 양반들이 그런 정책들을 취할리가 만무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 오너를 만나서 하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더더욱 그런 생각들이 떠올라서 말이다. 미국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이야기였던 모 책에서 지적했던, 이제 '계급'은 사라졌고 '신분상승'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라는 그 이야기는 많은 환상을 불러오고 그리고 지금의 이 착취 시스템에 대해서 정당화를 하는 윗 양반들의 체제를 위지하기 위한, 혹은 있는 양반들의 찜찜함을 해소하기 위한 한 방법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그런것들이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된 반공(?)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면 모든것이 끝이니까 말이다.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회는 그래서 아이 원츄. ㄱ-

=+
기억해야 하는 페이지
p 327, 332~,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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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 육아의 답을 찾다>, 토니 험프리스, 다산에듀
육아에 대한 심리학자의 필수 Q&A라고 보면 되는 책. 딱히 '심리학에서 찾는다'라기 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혹은 숨겨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는 책이라고 보면 됨.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자신이 떠오르기도 했고 책에서 지적하는 행동을 했을때 나의 부모님들의 반응을 보면서 매우 좌절했었던 것 까지 기억했다.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육아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게 하는 아주 좋은 책. 개인적으로 <가족의 심리학>보다 좀더 직설적인 책이라고 생각함.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분류에 따라서 잘 나와있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매우 받아들이기 쉽도록 잘 설명되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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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수잔 손택, 이후
이 책은 '은유로서의 질병'과 '에이즈와 그 은유'의 합본책으로 원래는 별판이었는데 한국에서 나올때는 합본으로 나온 책 이었다. 수잔 손택의 저서는 <타인의 고통>을 읽었고 그리고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다가 던저벼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별로 자상한 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각주가 너무 없었고~ 그리고 해석하는 책에 대해서 매우 친절한 설명이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뭐 그 책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흥미가 없었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_~
<은유로서의 질병>에서도 수 많은 문학작품들이 등장하는데 편집자 주와 원저자 주로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었다. 사실 저자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많은 책들의 대략적인 정보라도 알아야지 진도가 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무식한 사람들은 어쩌라고;;; 나의 경우에는 질병에 대한 은유가 담긴 책을 읽은 것은 기억 나는 책이 유일하게 두 권. <제인에어> 와 <페스트> 정도로만 기억한다. -_=;;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나와있던 출판사의 완역이 아닌 책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들만 골라서 읽었으니 오죽하겠는가. OTL
한국판 <은유로서의 질병>의 전반부는 '은유로서의 질병'이 번역되었고 후반부에 '에이즈와 그 은유'가 번역되어 있었다. 은유가 나온 시점은 1977년, 에이즈는 1989년. 그래서 여러가지 거리감이 존재하지만, 그런 차이들이 지금의 그 질병(암과 에이즈 결핵 등등)이 어떤식으로 인식되는지 알게되었다. 다만, 그녀가 살았던 세계와 지금 내가 존재하는 세계의 간극은 고려하며 읽어야 했다. 이 부분은 사실 제목만 유사작인 <우울증에 반대한다>를 읽으면서도 느낀 부분이라서 이번에는 읽으면서 나름 잘 조절하면서 읽었던거 같다. ^^;;

그녀가 에이즈에 대한 은유에 대해서 말한 부분은 내가 금년 초에 읽은 암에 대한 책에 사실처럼 적혀있던 부분이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 개인의 책임이라기 보다는 성향과 교육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시절의 그녀는 그것을 은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새로웠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의 은유라고 말하면 은유인거 같기도하고... 어려웠다. 뭐 시점의 차이겠지. 아니면 민감한 수준?
질병에 대한 은유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해결된(?) 질병은 새롭게 조명 혹은 발견된 질병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뒤로 사라지고 그리고 새로운 질병이 우리를 공포로 몰고가는데 크게 일조하는 것은 정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음. 최근 방송했던 지방 소도시의 에이즈 사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고... 사실 나도 동생씨가 의료현장에서 그런류의 바이러스에 노출되어서 매우 공포를 느꼈던것이 사실이니까 말이다.
처음 이 나라에 그 질병에 대한 이미지가 들어와서 치료법이 많이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그 환상은 지배적인 담론이고 그 환상에 의해서 치료를 거부하고 폐인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부와 언론기관은 뭔가 느끼는 것이 없는가 하는 그런 생각.
"그걸 공부하는 것은 개인의 범주인가?" 그건 아닌거 같다고 생각하지만, 뽐이씨는 내가 너무 국가에 대해서 환상과 확장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가끔 말하곤 한다. 국가도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큰 단체일 뿐. 내가 국가에 대해서 너무 많은 환상을 교육 받았고 그걸 기대하고 투영하기 때문에 더 분노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뭐 나는 사람이 있고 국가가 있는 거지 국가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에 기본적으로 찬성하지 못한다. 단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담론은... -__- 위험하다는 생각. 그것이 국가이던 가족이던 여러가지 관계이던 말이다.
그러는 의미에서 이웃 나라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지 않았던 그들은 인터뷰에서도 '시민'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는 걸 보면... 참 부럽다고 해야하나? 뭔가 복잡한 기분. 우에노 치즈코씨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그런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사용하는 단어의 선택 조차 '우리나라', '우리 **'인데 말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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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진이 많은 책을 보는 취미도  여행책을 보는 취미도 없는데요. 이 책을 보고나서 그게 단순히 취향의 문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여행책이라고 말하기는 좀 모호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그 나라의 가족들의 일주일치 식량과 조리법과 생활상을 담은 책이기 때문에 '여행'의 범주에도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하는 여행책은 이런 책 이었어요.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음식에 대한 것들요.
방송에서 어느나라 어디의 건물에 대해서 보여주면, 저는 그 건물도 좋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뭘 먹는지가 참 궁금했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많은 것들이 충족되었습니다. ^ㅍ^ 히~

책의 구성은 어떻게 보면 <죽음의 밥상>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의 밥상은 접근하는 방법이 독자가 저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하기 때문에 육식위주의 가족과 육식과 채식을 하는 가족 그리고 모두 유기농 채식만 하는 가족들을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주의시키고 그리고 개선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촉구하는 책 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생기는 딜레마라고 하면... 유기농은 단가가 비싸기 때문에 엥겔지수가 정말 격하게 올라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판매하는 유기농이라고 쓰여있는 작물에 대해서도 별로 신용이 가지 않았구요. 그래서 유기농 채소를 사서 먹는 일은 관두었습니다.
최근에는 구청에서 금요일날 열리는 직판매장에서 상추를 사와서 재배해서 먹고있습니다. 정말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뽐이씨와 야채 화분을 좀더 사기로 결심을 했는데... 어디서 사는지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_=;; 곧 해야지요. 진짜 좋은거 같아요. 

그와 좀 다르게 이 책(<헝그리 플레닛>에서는  전세계의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한 가족(표준적이지 않을수도 있지만)이 먹는 일주일치 식량과 찍은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그 사진으로 이 가족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짐작이 되더라구요.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눈에 보이는 것은 섭취하는 음식물이 인스탄드가 많을 수록 그 가족들의 사이즈가 옆으로 커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지어 콜라를 물처럼 마시는 가족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좀 충격을 받았을 즈음 칼럼이 두둥!하고 등장합니다. 육류 소비의 방식이 바뀌게 된것에 대한 문제, 바다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에 대한 문제 등등에 대한 칼럼이었습니다. 하나 하나의 칼럼들은 책의 중간 중간에 고르게 배치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 저자들은 그 방면에서 유명한 저자들 이었습니다.
다룬 이야기 중에서 많은 것들은 기존에 읽은 책들에서도 봐왔던 부분 이었기에 저 자신에게는 그렇게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정작 충격을 받은 부분은 좀 부끄럽지만, 재활용품으로 내어 놓는 용기(플라스틱, 유리 등등)들 이었습니다. 그 용기를 재활용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뭐 재활용품에 착실하게 내면 잘 재활용이 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 라기보다는 알기를 원하지 않은 거 겠지요. 쩝.

<즐거운 불편>에서 저자 아저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생수나 음료수를 사먹지 않으려고 물을 싸가지고 다니는데 가끔 유혹에 흔들릴때도 많았지만, 최근은 매우 굳건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물도 사서 먹지 않고 끓여서 먹은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나름 뿌듯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외 대부분의 저의 집 뒷배란다에 있는 다른 재활용 용품들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참 많이도 나오더라구요. OTL
최근에는 공산품을 제외한 것들을 동네의 재래시장에서 구매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마트에서 전날 팔다 남거나 하자가 있는 것들보다 대부분 더 저렴했습니다. 포장도 좀더 간소하구요. 장바구니에 담으니까 비닐을 사용하는 일도 좀더 줄어들었습니다. 참 빨리도 알았습니다. -_=;;;;;;  뭐 여튼 마트보다 더 소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작은 가게들도 있어서 채소들이 상해서 나가는 일은 좀더 줄일 수 있을거 같습니다.

참 칼럼을 쓰신 분중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저자는 <잡식동물의 딜레마> 저자의 칼럼도 있었습니다. 번역 하신분께 연락드렸더니 그 분의 새책을 변역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_^ <잡식 동물의 딜레마>는 읽고 싶은 책이 좀 줄어들면 읽을 예정입니다.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여러나라 사람들의 식탁을 구경하는 것은 저에게 정말 즐거운 일 이었습니다. 음식이 메인인 여행 책이 있으면 아마 앞으로는 읽을거 같아요. 그리고 북 디자인은 오필민 씨. >_<: 이거이거! 했더니... 역시나 이었습니다.

여러나라의 맛있어 보이는(저의 기준에) 레시피 메모들_
재료를 여기서 구할 수 없는것들은 열외로 했습니다. -_=;; 그래도 생전 처음 듣는 식재료들도 있더군요.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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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 설마... 했는데, 오필민씨의 작품 이었습니다. 반은 표지 덕에 빌린 책 이었습니다만, 저에게는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여러가지로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구요. 번역도 매끄럽고 보조 설명도 많아서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분에게도 권해드릴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쉬웠던 부분이라면 표지 디자인을 하신 분이 여성이었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지가 조금 아쉽습니다. 가령 안지미씨라던가 *_* 두근두근!
읽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들이 들었던 부분은 크게 프랑스에서 있었던 학교에 차도르를 두르고 등교한 여학생들에 대한 문제와 가사노동의 분담의 문제이었습니다. 특히나 차도르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전에 읽었던 <페스세폴리스>와 <차도르를 벗겨라>도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더 다루는 책이 있는지 찾아 볼 예정입니다.

치도르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소녀들과 여성들을 폐쇄된 세계에 가두고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억압과 여성 소외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당시 이슬람교 집단의 지도자 호메이니가 1979년에 이란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차도를 강요해 야기된 충격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모든 진보주의자들은 이란 통치자들의 불평등하고 부패한 체제에 대항한 이란 '혁명'에 건 기대는 갑작스러운 실망으로 변하였고, 극단적 보수주의가 나라 전체에 팽배하게 되었다. 이란의 사회 정의를 위해 발전의 원동력이 될듯했던 모든 변하에 대해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던 열성적인 서구 페미니스들은 이란 여성들의 의무적인 차도르 착용을 추악한 상징으로 여겼다. 또한 많은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프랑스 영토에서의 차도르 착용 금지에 유리한 논거를 제시하기 위해 이란, 알제리, 아프가니스탄 등의 국가에서는 이슬람의 보수주의가 공포와 죽음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었다. 플로랑스 퐁트레노는 1992년에 <20세기의 여성들>에서, "만일 프랑스가 학교에서의 차도르 착용을 받아들인다면 임핵 절제, 강제 결혼, 일부다처제, 간음에 대한 투석 형별은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라고 썼다. 일부 페미니즘과 국가의 정교 분리주의는 이렇게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차도르를 착용한 소녀들을 학교로부터 추방하는 데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 1면을 장식한 주제는 여성들의 상황이 아니라 이슬람이민자들의 프랑스 통합이라는 문제였다. 가족, 정당 노조, 협회 등을 휩쓴 열띤 논쟁은 프랑스가 자국의 문화 외의 다른 문화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다.
'차도르를 착용한' 소녀들 편에 선다면 논거는 다르다. 이들에게 차도르 착용은 이슬람 가족의 무노하와 프랑스 사회에 통합하려는 의지 사이의 타협을 의미했다. 보통 나이가 더 많은 아랍인들에게 있어 차도르는, 특히 광고에서 보이듯 여성을 경멸하고 여성의 신체를 이용하는 서구의 문화에 저항하여 이슬람의 문화와 도덕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 양면성을 지닌 문화적 저항을 고려하면서 마그레브(모로코, 튀지니, 알제리) 여성들은 '프랑스로 이민 온 마그레브에게서 태어난 여성들'로서 프랑스 영토에서 개인적,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려 애썼고, 체제에 대항해 투쟁할 것도 촉구했다. 수아드 베나니는 <베일과 시민권>에서, 이 여성들은 프랑스 정부의 외국인 혐오에 따른 일련의 정책, 특히 알제리 인에 대한 정책 - 시민의 지위를 획득하기 어려움, 그리고 속지주의의 폐지 - 과, 프랑스를 선교의 땅으로 생각하고 조직망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외국인 거부에 대항하는 이슬람 체제 유지주의자들 사이에서 꼼작할 수가 없다고 밝혔다. 1990년대에 시작된 정체성의 위험으로 이슬람 출신 신세대 여성의 해방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그것은 페미니스트들이 권장한 여성 연대를 통한 해방과는 반대방향이었다.

- 차도르 사건, <저속과 과속의 부조화, 페미니즘>, 사빈 보지오-발릿, 미쉘 장카리니-프르넬, 부키



필요한 메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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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히 렌츠
미인불패, 새로운 권력의 발견
<아름다움의 과학>
프로네시스

도서관에서 흥미반 재미반으로 빌려본 책. 보는 내내 그런 욕구는 충족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함이 공존하게 하는 책 이었습니다. 뭐 특별히 뭘 과다포장해서 이야기하거나 불편한 논조가 계속되었던건 아니지만, 외모에 대한 우리들의 무의식적인 태도의 진실(사실)이 불편했습니다.
저는 뭐 "인간은 원래 차별적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혹은 정의를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거든요. 책에서는 유전학적인 부분이나 통계적인 부분에 의존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요. 어린아이부터 잘생긴(지금 현재 우리들의 기준에 의거해서) 사람에게 좀더 오래 집중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 대좌절. OTL 그래도 자기 부모에게 가장 오래 집중한다는 결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요?

결론을 말하자면, "그래 외모 너가 킹왕짱이다. 너는 계급을 상승하는 중요한 요건이다." 하하하하. 아아 ㅅㅂ. ㄱ-
아름다운 사람일수록 배우자의 조건(지금 현재 평가에 의한 계급적 기준)이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유머로 돌던 급훈중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5분더 공부하면 신랑 얼굴이 바뀐다" 였던가? 뭐 그런류의 내용이었습니다. 부정 못하는 사실.
책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통계로 계속 증명해줬습니다. O>-< 마치 독자에게 항복하라는 거 같았어요. 그외에 다른 인상적 이었던 부분은 대칭형 외모(얼굴, 신체)에 대한 선호도 이었습니다. 여러 얼굴을 많이 합성해서 그 평균의 얼굴이(대칭형 외모의) 될 수록 사람들의 선호도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외모가 뛰어나면 취직이 더 잘 되고... 주절주절... 이런 저런 통계들로 외모의 중요성에 대해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성형에 대한 이야기었는데, 저자가 자기 자신이 성형에 대해서 회의적이라고 시작하면서 결론은 성형을 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결론에 도달하더군요. 사실 저 자신도 성형에 대해서 개인의 만족도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문제점은 그 자신들의 정형화 된 미의 가치관에 의해서 상대방에게도 성형을 강요 혹은 종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짜증납니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 그 자신이 성형을 선택하게 될 터인데 그런것들을 주변인 특히 부모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강요받는 이들은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그 가치에 대해서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군요.
성형을 한 사람들이 성형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형을 권유하는 이유도 분명 외모가 바뀌어서 이득을 보고 기쁨을 누렸기때문이 자신의 기준으로 비슷한(?) 사람에게 권하는 것 이겠지요. 종교에 대해서 권유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상담 맹신과도 비슷하고...
역시 저 자신이 당한것(?)이 많이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분노가 치미는 것 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동정하거나 아니면 그런 생각이 있구나 하고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을텐데 말이지요.
타인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이미지에 의거해서 바라보는 것을 하지 않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건 과연 가능할지. 어디서 누구를 만나던 그런 나이의 그런 외모의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는데... 처음 상대방을 보고 있는 그대로를 느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생각해봤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은 완전 무리네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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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이제이션>

리뷰/텍스트 2009. 6. 20. 17:00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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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이제이션>
미국화, 어떻게 볼 것인가 - 김덕호, 원용진.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 시기 미국화 - 유선영. 한국에서의 일상생활과 소비의 미국화 문제 - 김덕호. 한국 대중문화, 미국과 함께 혹은 따로 - 원용진. 한국 정치의 미국화에 대한 역사적 조망 - 안병진. '친미'와 '반미'사이에서 (한국 언론을 통해 본 미국의 이미지와 미국화 담론) - 김연진. 해방 이후 남한 개신교의 미국화 - 이진구. 한국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미국화 (근대화론의 한국 전파와 한국에서의 수용) - 정일준

제목은 거창한( ?) 영어제목 이었습니다. 미국화를 다루는 책인데 저런 제목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는데요.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되었습니다. 미국화에 대한 여러가지 부분(역사, 종교, 문화 등등)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참여한 책인데도 책의 독자의 수준을 고려한 일괄적인 기준이 아주 잘 지켜진 책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명이 저자들의 글을 묶어서 내는 경우 사용하는 텍스트의 차이로 혹은 독자 기준의 설정의 높이의 차이로 파트(다른 저자)마다 달라서 읽는데 어려움이 많은 책들이 많았는데 전혀 그런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편집자의 힘인지 아니면 책을 기획하면서 저자들이 모여서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토론해서 저술을 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사실 과거사(혹은 역사)에 대해서 대부분(대부분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어찌되었던) 교과서에서 배우고 주위 분들에게 주워 들은것들과 펀향되어있는 매체로 접하는 정보를 통해서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이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공부(?)를 하는 사람도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이런말을 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뭐 저는 저게 일반적이라고 느껴지는 집단에 소속해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치게 학술적인 내용으로 무장한 책을 보면 머리가 터지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 책은 학술적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그닥 학술적인 느낌이 강하지 않았고 책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어서 끝까지 즐겁게 읽었습니다. 사실 인문학 도서를 보면 지나치게 학술적인 텍스트들로 무장하고 그리고 번역체로 무장하고 그리고 어려운 이론으로 무장해서 용기를 내서 독서를 시작해도 초반에 읽다가 책을 던저버리게 되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 이건 저의 경험이었습니다.
용어의 개념도 머리에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읽을 책들이 그다지 없다는 현실이 매우 좌절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매우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그래서 입문서를 읽고 다시 읽어도 어려워서 좌절했었는데... 그 책의 번역자가 참여한 다른 한국여성에 대한 책을 보고 그 사람의 문체(번역자)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지요. 후후후. ㄱ- 저주 할테야요. 덕분에 ㅅㅍㅂ 양반의 책은 사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파트의 '근대화론'에 대한 부분은 조금 지루하긴 했습니다. -_=;;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개신교와 관련된 미국화에 대한 부분, 일제 식민지 시절의 미국화, 이 나라가 미국에 대해서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지를 조명한  ''친미'와 '반미'사이에서' 정도 이었습니다. 아 미국문화에 대한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적인 정치를 이나라에 들고와서 미친 영향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부분은 개신교의 교세 확장에 대한 부분도 비슷했었습니다. 순복음교회가 그렇게 커진 이유를 조금 알게되었다고 해야하나요? 뭐 그랬습니다.
역사와 관련해서 다룬 파트를 보면서 <부동산 계급사회>를 함께 읽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함께 읽으니까 매우 좋았습니다. 이 나라의 지난 정권에 대한 미국화의 시점으로 바라본 시각과 그리고 부동산 정책으로 바라본 시각으로 바라본것에 대해서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보면서 꽤 좌절스러웠지만요. "이거나 저거나 오십보 백보구나."라는 생각은 더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최근 이전 정권에 대해서 잘못된 부분(뭐 이건 저의 주관입니다 )까지 아름다운 것으로 이미지화(혹은 신격화)하는 경향들을 느끼는데 그런 분들에게 저런 부분에 대해서 인지하고 그렇게 하는지도 궁금해서 그 파트를 읽으면서 흥미롭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고 좌절감도 심히 들기도 했습니다.
어딜가나 이율배반적인 것은 존재하고 어쩔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정권에 대해서 처음 가지고 있던 이미지(환상)가 무너져서 그 차이가 더 심하게 느껴지는 것 인거 같습니다. 사실 그 이율배반적인 부분도 저는 대안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이요. 그런 것이야 말로 저의 환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역사'에서 나온 책은 이 책이 처음인데 저의 궁금증도 매우 해소되었고 책의 기획이나 편집 노선도 저의 취향이라서 책 날개에서 소개하는 다른 책들도 읽어볼 예정입니다.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일그러진 근대>, <한국근현대사의 이상과 형상> 일단 4가지 읽어보고 나중에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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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리뷰/텍스트 2009. 6. 20. 16:58 by dung

*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

<아파트 공화국> 개정판을 내준 후마니타스에서 나온 책 이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을 읽지 않은 분이 있으시다면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저는 사실 <아파트 공화국>의 본문의 내용은 한겨례에서 나온 모 아저씨의 서울 자전거 여행 책에서 인용한 부분들을 먼저 보고나서 매우 궁금해져서 찾아본 케이스 였습니다. 다른 나라(다른 정체성?)의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아파트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었고, 그리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되었던 책 이었습니다.

뭐 그런 기대들을 가지고 책을 펼쳤는데요. 독서는 하루만에 완료했습니다. 쉽고 즐거웠고 가끔 통계를 보면서 눈이 빠지기도 했지만요. -_=;; 책의 표지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표지와 본문의 모든 일러스트는 저자의 딸네미(따님이라고 해야하나 싶은데요. 그냥 친근감에 그냥 딸네미라고 적었습니다)가 그린 일러스트 였습니다. 서민을 발로 의인화해서 '발바닥씨'라고 설정한 부분이 귀엽고 재미있고 친근했습니다. ^^ 미소도 나왔구요. 발바닥씨는 본문 중간중간에 계속 나와서 가끔 통계나 여러가지로 인해서 괴로워지는데 그 페이지에 있는 유쾌한 일러스트 때문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몰랐던걸 정말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알고나니 더 무섭습니다. <부동산 계급사회>랑 함께 '미국화'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책 제목은 <아메리카나이제이션>. 제목이 저렇게 된 이유도 하아. '미국화'답게 제목도 미국화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뭐 여튼간에 교과서에 적혀있었던 것들, 혹은누군가가 말해왔던 것들, 가끔 책에서 간혈적으로 봤던 이 나라의 과거에 대해서 여러가지 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면이라고 하긴했는데 어느 입장에서 보면 한쪽면만 봤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뭐 그런거지요. 저는 저의 입장에 가까운 면을 보기를 희망하고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아파트 공화국>을 보면서 내내 궁금했던건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라고 속으로 계속 생각했습니다. 외부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가장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없었거든요. <부동산 계급사회>는 그부분에 대해서 퍽퍽  던지시더군요.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하면서요.
책의 파트가 끝나면 펼침면으로 친절한 정리까지. 우어어어어어어. 네네네. 기억하겠습니다. 마지막장에는 대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이사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에 대한 대안도 있었습니다. 전세에서 전세로 가다보니까 돈을 그날 받아서 그날 들고 올라가서 주인집에 줘야하더라구요. 근데 그날 그런식으로 이사하는 집이 맞물리면... 훗. 저 이사할때는 7가구가 함께 움직였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지금 들어온 집주인(정확히는 집주인이 아니라 이전 세입자)에게 처음 돈을 주기로 약속한 시간으로부터 많이 늦은 시간에 돈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부분은 전세금을 이자없이 몇일만 융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을 받아야 이사를 나가기 때문에... 그놈에 돈. ㄱ- 네. 집주인이 줘야하는 돈이지만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에게 돈을 받아서 그 돈을 우리에게 다시 주는 방식이 정말 짜증났습니다.

고로 간추린 6장 대안을 찾아서는 타이핑을 치기로 결심. -_=;; 열심히 쳐봤습니다. 아래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안입니다.

주택계급별 맞춤형 주택 정책
*집은 남아도는데 전.월세가 40%에 달하는 주택자산 분배의 불공평을 해결하려면 주택계급별 상태와 처지에 맞는 맞춤형 주택 정책을 펴야 한다.
- 다주택 소유자: 택지 국유화와 임대 소득세, 보유세 강화
- 1가구 1주택자: 보호정책
- 집이 있으나 대출감 부담 등으로 셋방 사는 가구: 내집 입주 지원정책
- 보증금 5,000만원 이상의 셋방 사는 무주택자: 내집마련 지원
- 보증금 5,000만원 미만의 무주택자: 전,월세 안정 대책
- 지하방 비닐집 등에 사는 극빈층: 주거 상향 정책

제2의 토지개혁과 택지 국유화
* 땅의 소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택지에 대한 단계별 국유화를 추진해야 하며, 3채 이상 소유한 다주책자를 대상으로 매년 30~40조 규모의 영구채권을 발행하는 방법으로 택지를 국유화할 경우 5년 안에 전체 택지의 20%를 국유화 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이정도 채권 발행은 채권시장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영개발
* 건설 재별을 위한 공급 중심의 주택 정책을 서민을 위한 복지 중심의 주택 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복지부에(가칭)주택청을 신설해 주며 정책을 총괄하도록 해야 한다.
* 국민의 땅인 공공 택지를 건설 재별에 헐값으로 넘길 것이 아니라 공영개발을 통해 공공주택을 지어 무주택 서민에게 임대하거나 분양해야 한다.
* 한 예로 송파거여신도시를 100% 공영개발할 경우 38조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1조원 이상의 순이익을 내면서도 4만 5,000천가구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할 수 있는 등 사업성이 뛰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부동산 특권 폐지 내집 꿈 부활
* 건설 재발이 누리는 아파트 선분양제와 분양 원가 비공개, 집 부자들의 탈세 피난처가 돼온 임대사업 세금 특혜 등 부동산 특권을 폐지해야 집값을 잡을 수 있다.
* 무주택자 중 약 100만 가구로 추산되는 내집마련 가능 계층에게 택지 국유화로 내집마련 비용 인하, 아파트 분양 제도 및 청약 제도 개선, 금융 지원 등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셋방 스트레스 프는 주택 정책
* 현행 2년인 전월세 계약 기간을 실질적으로 10년으로 늘리고, 전월세 인상률 5%제한 규정을 현실화하고 월세 전환률 10%등 상한제를 도입하는 방법으로 셋방살이를 하면 겪는 스트레스를 없앨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 방이 안 빠져 발을 동동 구르는 세입자들을 위해 전월세금 보증센터를 설치하고 최우선변제금도 4,000만 원 수준으로 높여 전월세 보증금 떼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지하방 탈출 사다리 정책
* 반지하, 비닐집, 쪽방 등에 사는 극빈층의 주거 상향을 위해 '지하방 탈출 사다리 정책'을 펴야 한다.
* 지하에 사는 가구가 땅 위로 올라오는 데는 가구당 1,831만~3,512만 원이 필요하다. 매입형 임대주택 및 전세형 임대주택을 연간 6만 채로 확대하는 등 10년 정도에 걸친 단계별 접근이 바람직하다
* 비닐집.쪽방 등에 거주하는 가구에 대해서는 주소지 인정, 시설 개선, 원룸형 임대 주택 공급 등 단기 대책과 함께 주거와 복지를 결합시킨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6장 대안을 찾아서, p331


추가를 하고 싶은거는 집주인이 다음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받아서 나가는 사람에게 주는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줄 수 있는(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서 알게된 무서운 사실(!)들은 우리나라 집 부자님은 집이 1,000채가 넘는 다는 사실. 그 부자님은 삼성의 이모 아저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 임대사업은 임대사업자라는 사실. 두둥!<- -_=;;;;;; 저의 무식함이 들어나는군요. 허허. 이 나라의 대기업들이 아주 많이 땅부자라는 사실. 땅사서 돈 많이 벌으셨더라구요. 희죽. 강남(서초, 강남)에서 자기집에 사는 비율은 40%가 조금 넘는 다는 것. 그 지역의 많은 주택소유자들은 3채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도 꽤나 있다는 사실. 뭐 알고 있었습니다만 책에서 보니 느낌이 꽤나 달랐습니다. '토호'라는 용어는 우석훈 선생의 책에서 처음 봤는데요. 이 책에서는 토호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단어가 자연스레 연상되었습니다.

돈이 돈을 부르고~ 그 돈은 또 돈을 부르는 방식으로 부동산을 통해서 재산을 착실하게 늘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멀리 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저의 주위에도 착실하게~ 저 자신도 '내집 마련이 아니라 내집을 사되 집값이 오르는 지역에 집을 사야지 남는 장사'라고 머리에 넣고 있었습니다. 집은 거주의 공간인 삶의 터전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의 공간이었습니다.
치졸한 변명을 하자면, 그 공간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일지도 모릅니다. 함께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거죠. 집은 거주의 공간보다는 투자의 공간이라고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살면서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르던 그시절에 저는 부동산을 지나가다가 부모님의 집값을 보며 참 좋아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경멸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한쪽발은 그쪽에~ 그런 주제에 타인들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자신도 거기에 걸쳐 혹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기혐오. 
그건 부모의 재산이고 저 자신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집의 문제로 고민하게 되면서 먼가 지면에 닿았다고 해야하나요? 그러니까 "현실이 닥치니까 느끼게 되었다"가 정답인거 같습니다. 운이 좋아서 대출을 끼고 집을 산다고 해도 그렇게 신나게(?) 오를 수 없다는 확신으로 인한 박탈감. 세월이 흘러서 내가 집을 산다고해도 그 집의 집값이 올라서 최후의 안전장치(?)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이제는 평생 벌어도 살기 좋았던 그 동네의 집을 살 수 없을거 같다는 불안 등 여러가지가 저의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3*년 동안 가장 오래 거주했던 그 동네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배란다로 산이 보이고 공기도 좋고... 사람도 별로 없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사를 나온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평생 벌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집을 매도하고 나서 집값이 수직 상승하였고 이사간 집을 팔고 웃돈을 아무리 많이 언져도 다시는 그 집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집값이 오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유는 이 책에서 알게되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돈을 부를 수는 없고~ 나쁘게 되면 마이너스 인생~ 그남아 좋으면 +- 0 인생으로~ 역시 인생은 계급. 돈으로는 계급을 살 수 있고 돈이 없는 자는 계급 상승은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 보다 어렵다는 것 이었습니다. 참 좋은 나라에요.
저의 부모님은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계급을 상승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거 같습니다. 그냥 원래 있던 계급을 물려 받았을 뿐. 물론 학벌이라는 계급은 스스로 취득(?)한 것이지만요. 하지만 그것 조차도 개인의 계급적 배경에 없다면 그렇게 취득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입니다.
가지고 있는 계급은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래로 내려가는데 더 도움이 되는 구조이겠지요. '좀더 위의 계급'은 돈으로 사는가 아니면 학벌로 사는가의 문제였을 뿐. 저는 계급을 돈을 주고 살 능력도 학벌로 살 능력도 없으니 불안한게 정상이겠죠. 먼눈. -_-
그리고 그 계급을 정하는 고정된 시선(가치관)에 저도 맞추어졌고, 그래서 자신을 비난하는 메카니즘을 멈추기가 참 힘듭니다. 그 기준에 의거하면 저는 어느 등급일지 생각하면 암담해집니다. 적어도 자식을 낳는다면 이런 세상에서 키우고 싶지는 않아요. 먼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를 잘하고 집이 잘사는 그런 것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요. 자식이나 주변에 대해서 그 두가지를 제외하고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람(어른)들을 만나본적이 거이 없습니다.
하지만 뼈에 각인된 그 사고의 패턴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식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지 암담할 따름입니다. 저는 그대로면 공부를 잘하면 더 좋아하고 더 칭찬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그런 부모가 될 거 같아요. 그런건 정말 싫은데 말이죠. 어디까지 타협을 해야하고 어디까지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가 저의 가장 큰 숙제입니다.
갈길이 참 멀어요. 하아. 그래도 힘내고 으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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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에서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혹은 풍족한 삶을 살 수 없는 고통, 즉 커져가는 빈부 격차가 경제적 고통을 야기한다는 점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고통이 우리를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하고, 갈기갈기 찢어 놓고, 공동체와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인정할 때 비로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가진 자, 조금 가진자와 아무 것도 없는 자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보고도 이 나라에 계급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니 어이가 없다.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이 지금 아무리 왜곡되어 있지만, 이상 속에는 부는 공유할 수 있으며, 계급 제도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존재할 가지도 없는 나머지 다수를 지배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라는 인식도 담겨 있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다국적 백인 우월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든 가부장제도가 야기한 심각한 불평등, 그로 인해 시모하되는 빈부 격차 때문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계급을 돈 문제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경제적 특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격을 훼손하면서까지 돈을 벌어 스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들 중 부자는 소수지만(남을 착취하지 않고 부를 축척하기는 어렵다.) 대다수는 그들에게/우리에게(나도 이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모든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급 특권을 가지고 있다.
......
- 계급제도 없는 삶, p 209


모님이 추천하신 책인데 이제야 봤습니다. -_=;; 사서 보려했지만... 뭐 여러가지 사정상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봤습니다. 그치만 아마도 살 예정. 이번달에 책을 할부로 질러줬으니까 다음이나 그 다음이 될 예정이에요. 사실 뭐 저는 '계급'이라는 단어와 거리감을 두고 살아왔는데요. 최근 느끼는 여러가지 불편함들이 바로 저 문제 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보면서 알게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회에서 '계급'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일을 거이 본 적이 없는거 같아요. 계급에 대한 부분은 은유적으로 묘사되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치환되는거 같아요. 가령 예를 들자면 지역이나 학연이나 나이 성별 등등 으로 말이죠. 근데 그건 계급이자나요. 저는 역시 계급이라고 생각해요.

얼마전에 지인분의 아버님 결혼식에 참석했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결혼식이었는데요. 결혼 미사를 하시는 신부님 말씀이... 남자는 여자를 소개해준다고하면 "그 여자 이뻐?"라고 물어보며 여자는 "그 남자 직업이 뭐야?"라고 물어본다며 오늘 신랑은 "교수"입니다. 여자분은 남편을 참 자알 만나셨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저 자신이 듣기에는) 강조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내내 불편했는데요. 옆에 있던 다른 여자분에게 물어보니 그분도 그 신부님의 설교가 참 불편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뭐 "교수"라는 직업이 그렇게 대단한(?) 직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결혼 미사에서 그렇게 강조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말이에요. 그 설교의 나머지 부분들은 성의 이분법의 선을 또박또박 지키고 있었고 그리고 직업에 따른 계급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는 설교이었습니다.
좀 극단적으로 듣자면, 여자분은 남자분의 직업을 통해서 계급을 상승했다는 말로까지 들렀어요. 뭐 근데 보통 소개를 받는 경우에는 상대방에 대해서 질문할때 보통 '직업'이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 자신도 직업(혹은 계급)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이야기 했던 적이 많았던거 같습니다. 
가령 사랑하는 다롱롱의 이야기를 할때 직업적인 부분을 이야기를 자주 하게되는데 그런게 그런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롱롱의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은 저의 짜증나는 이야기를 4~5시간을 닥치고 들어주는 자상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런 이야기보다는 직업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요소도 있지만, 계급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요.
저는 언제나 저 자신이 속한 배경(계급)에 대해서 쉽게(?) 말하는 편 이거든요. 물론 그 이야기가 계급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런 계급의 막장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어떤 입장일지 생각해 본 적이 거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민망합니다만, 그랬습니다. 고백하고나니 더욱더 부끄럽습니다.

뭐 여튼간에 어떤 종류이던간에 노골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계급)에 대해서 자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주위(상대방이 전혀 모르는)의 높은 계급의 사람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분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바라보는 저 자신(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저도 저 자신이 속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충동과 그런 충동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이 일어나는 3가지의 감정이 싸웁니다. 그 상황 그대로도 불편한데 말이죠. 그런 저의 3가지 감정 때문에 매우 불편하고 통제하기 힘들어집니다.
저는 주로 그런 사람들을 지칭해서 극단적으로 가면 '천박하다'라는 표현을 망설임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그 단어는 저 스스로에게도 포함되는 단어에요. 그 사람에 대해서 천박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저도 가지고 있는 부분이고, 다만 그걸 '노골적으로 들어내지 않는다', '노골적인 것을 수치로 안다', '그건 은유적이라도 표현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라고 인지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하지만, 자신의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매우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이니까요. 저는 좋은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걸 걸치고 먹어보고 싶다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는 욕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좋은것이라는 가치(혹은 기준)가 저에게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어느 순간 그 기준들에 의거해서 모든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도 몰라서 당황했었습니다.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었거든요.
욕망하는 자신은 수치스러워요. 탐욕스럽다고 해야하나요? 좋은것들에 대해서 욕망하는 자신에 대해서 기묘한 이질감과 죄책감이 항상 함께 합니다. 스스로를 위하서 욕망하는 것들에 대해서요. 도덕적 가치를 부과해서 그 부분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칼날을 들이대는거죠.

이런 자신이 있는 반면에... 살아가다보면 자기 자랑과 자기 주위의 자랑으로 끝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부류에 저도 포함이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자신이 가진 주관적인 잣대의 정도이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저의 선을 넘어선 사람은 정말 탐욕스럽다고 느끼거든요. 역겹다거나...
근데 그 상대방이 자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부러워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아 혐오스러워요. 부러워 하는 마음은 어쩌면 소비를 욕망하는 것이 정상적인 이 시대에는 모범적인(?) 모습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먼소리를 하는 건지.
금년 초에 있었던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 옷이 몇백만원짜리라고 자랑했습니다. 허허허. 그분은 나이도 많은 어르신. 근데 저도 그 옷을 보면서 비슷한 가격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상대방의 말을 듣고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저걸 살 능력은 되지 않으니까 나는 뜨게질을 배워서 저런 디자인의 옷을 만들어서 입어라도 보고싶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다른분이 합세하여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입힌 브랜드에 대해서 한시간 가까이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이야를 들으면서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그 브랜드의 옷은 소인도 입었소. 그게 자랑이오? "라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뭐 듣고 흘리면 되는 이야기 이거나 아니면 저도 반격(?)을 하면 되지만요. 저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냥 닥치고 듣고 있었군요. 
거기서 문제는 그 이야기를 하던 장소는 애도의 공간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혐오감이 일면서도 비슷한 저에게 더더욱 혐오감이 일었어요. 살아가는 이상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픈 상황이더라도 그런 생각들을 할 수는 있다고 가끔 생각하곤 했어요. 그치만 그 상황에 저런 것(물질적인 가치)에 부러워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은 역시 용서 할 수 없어요.

결국 그네들은 자기들의 계급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놔서 저는 분노한거죠. 당신의 계급에 나도 결코 처지지 않는다고 말이이요. ㄱ- 헐. 그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닌데 말이지요. 그 상대방이 '학벌'에 의한 계급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저의 컴플렉스를 자극한 것일지도 모르고, 저도 비슷한 인간인데 그걸 억누르는 어떤 부분이 막아줘서 대놓고 그 이야기를 신나게 하는 인간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치만 그러면 뭐해요. 머리속에서는 저도 신나게 외치고 있는데요. 여기서 아아 시발.
이 나라는 그런 계급 자랑 혹은 비교가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인거 같아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가까운 웹용어로 말하면 '엄친아' 등등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급을 획득하지 못하면 가치 없는 인간으로 전락해버리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거 같습니다.
스스로 그 계급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은 주위의 그런 계급인 사람들을 이야기해서 자신도 그런 계급에 소속해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또 이어가나가는 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로 자신의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주위에 없는 비슷한 계급인 사람들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있다는 것을 알림으로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이야기가 저의 이야기로 돌아갔네요.
모님은 이 책을 읽다보면 좀 많이 불편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요. 저에게 있어서 그 부분은 공부하지 않는 그들에 대해서 동정의 가치가 없는 느낌으로 읽히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그 부분은 <미친년>에서 실리콘 밸리의 그 아줌마와 같은 류의 느낌이었습니다.
빡오른 모드로 말하자면, 그렇게 의식이 트이고 운이 좋고 머리도 좋고 노력을 하는 근성도 있는 인간들은 별로 많지 않다는 것. 그걸 모두 개인적인 불행으로 치환하는 것은 소생은 용서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사회에서 책임져야 할 문제도 개인의 문제. 물론 사회가 해결해주지 않으니까 그런 마음을 갖고 그리고 노력해야 한다는 논조인거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이 기존에 보던 것들과 조금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고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만이 아니라 주변의 여건 그리고 주위의 도움 그리고 운(?)도 있어야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것들이 동시에 찾아 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녀의 시선은 내려다보는 시선이고 다른 그녀의 말대로 '하위 주체는 스스로를 대변 할 수 없다'의 느낌인가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아래에서 아직도 발버둥 치며 책을 보고 스스로의 무식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만 말하면 매우 화가납니다. 끄읏.


+
조금더 자신에 대해서 관찰해본 결과 저의 탐미(탐욕)은 옷과 그릇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옷은 코트류 니트류. 그릇은 귀여운 것. 이만하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어찌되었던 무한소비형 인간으로 가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볼 예정입니다. 자본주의의 소비주의를 경계하는 자신이 되어야하는데... 뭐 일단 선부터 긋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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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서울>

리뷰/텍스트 2009. 6. 6. 19:59 by dung




*
<성난 서울>
아마미야 카린
+ 우석훈
송태욱 옮김
꾸리에


모잡지에서 보고 읽고 싶었던 책.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책은 '우석훈'과 공저라고 되어있지만, 공저 형식이라기 보다는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부록'을 더한 느낌이었습니다. 이 부록이 아마미아 카린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리고 책에 대해서 좀더 부드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부드럽지 못한 부분이 있지도 않았지만요. 표현이 어렵네요.

우리네나 일본이나 처한 위기들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의 이미지는 친구중에서 워킹을 간 친구들도 있고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도 있어서 그곳에서는 아르바이트(프리타)생활을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그런 느낌만 있었습니다.
맥도날드에서 대한민국 돈으로 환산하면 만원에 가까운 돈을 받고 일한다던가 뭐 그런것들이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아르바이트가 그렇게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제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한 곳은 S사에서 운영하는 놀이시설 ㅇㅂㄹㄷ였습니다. 98년도에 처음 받은 시간당 아르바이트 비용은 4천원에 가까운 3천 얼마였습니다. 주말에만 일하는 아르바이트는 비용이 더 올라가고, 그리고 방학때 일하게 되면 아르바이트 비용은 2천 얼마로 내려갔습니다. 동네의 가게에서 알바를 하면 2,000~3,000원 사이를 받을 수 있었고,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되면 비용은 3,000~4,000원 정도로 올라갔던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고기집(갈비집)에서 일하면 5,000원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기집 단가가 매우 높아서 친구가 아르바이트를 할려고 들어갔다가 반나절 만에 탈출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고기집 아르바이트가 5,000원 이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때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시간당 2,000원 미만으로 기억합니다. 낮시간에는요. 밤에는 가격이 조금 더 높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그네들의 아르바이트 비용은 저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비용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저는 그 S사에서 ㅇㅂㄹㄷ 아르바이트를 모집할때 1차 서류전형, 2차 면접(면접관 3명;;) 그리고 3차 교육(6일인가 5일인가 8시간을 교육을 받았습니다)을 통과해야지 그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습니다.
편의점에서 맥도날드에서 일하는데 그 비용이면 일본으로 치면 동경에 있는 디즈니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 얼마를 받을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다른 매체로 접하는 그네들의 정보는 그런 괴리가 있었고 저는 그것을 올바른 정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저 나라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라구요. ㄱ- 하하하.

부끄러우니까 변명을 하자면~ 그네들의 드라마속에서도 만화속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들이 많았고... 이 나라의 드라마처럼 대기업이다 재벌이다 하는 그런 설정이 아닌 그냥 보통(제가 생각하는 보통의 이미지입니다. 대기업이 아니고 작은 회사에 다녀도 긍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뭐 그런 뉘양스로...)의 삶을 살아도 그것들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으로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파견직'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파견의 품격을 보면서도 그 배경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정직원이 될 수 없는 그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지, 그리고 정직원인 여성은 30대 이상이라는 그 설정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드라마에서는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성난 서울>을 보면서 일본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세대라는 말을 처음 알게되었고, 그들이 정규직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알게되었습니다. 여기랑 별로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나라에서는 '휴학'을 선택하고 기다린다는 것. 아니면 고시 등등을 준비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에 시사프로그램에서 20대 노숙자들에 대해서 다루었을때 받았던 충격들. 그리고 여기의 현실이 그쪽에도 조금 다르지만 결국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문화 멘토분이 면접을 보러 간 회사는 '파견회사' 이었습니다. 모집 부분은 헨드폰 관련 조립 공장. 시간당 비용은 최저 임금. 제가 여러가지 질문을 하자 "고용보험이나 그런것들은 파견회사에서 전부 들어준다 그걸 들면 비용이 나가니 보통은 들지 않는다"라는 설명들을 이어나갔습니다.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그 질문들을 제가 따라가서 물어보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질문이라는 느낌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공장의 위생이나 안전 상태에 대해서 먼저 질문하지 않으니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하니 담당자가 바뀌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공장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정규직이나 계약직이나 파견직 비율은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최근의 공장은 정규직을 아에 모집하지 않나봅니다. 면접본 모든 회사가 그런 회사라고 그녀가 알려줬습니다. 그 공장들은 S사나 L*사에 헨드폰 부품을 납품하는 공장. 그것이 뭘 의미하는 지는 눈에 그냥 그려졌습니다.
가격의 하락은 그런 부분에서 이루어 지는 것 이었습니다. 그걸 저는 매체로만 접하다가 저의 눈으로 확인하면서 받은 느낌들이 너무 뭔가를 후벼파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 중엣 우리가 가격이 저렴한 것을 요구하면 기업들은 그런 부분에서 비용을 삭감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피해는 약자들이 받는 다는 논리로... 그런 것을 막자는 운동에 대해서 소개했던 것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죽음의 밥상>에서 소, 돼지, 닭 고기의 낮은 가격은 그들이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넘기기 때문에 그런 가격이 책정되는 것이라는 이야기. 폐수를 처리하지 않아서 인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병으로 고생한다던가...
정말 아무것도 다를게 없었습니다. 그냥 그것이 물건이 되는가 아니면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살아있는 다른것이 되던가... 

'부록'에서 우석훈의 말처럼 흐름을 반대로 한(?) 전향은 저도 처음 이었습니다. 그건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가능하군요. 놀라웠습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책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졌습니다. 반가운 소식은 에이전시에 근무하는 지인분이 그 출판사에서 아마미야씨의 다른 저작도 출판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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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
발레리 위펜
유숙렬 옮김
레드박스

'우울증' 관련해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이 되었습니다.
우울증으로 고생하시거나 주위에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가족이나 지인분이 있어서 도움이 되고 싶으시다면, 즉시 읽어보실 것을 매우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참고로 저는 친구들의 생일에 선물을 할 일이 있다면, 이 책을 사줄 예정입니다. 이전에는 <비폭력 대화>, <독이 되는 부모>, <당신이~>, <가족의 심리학> 를 선물했는데요. 저 책이 0 순위가 되었습니다.

특히 첫번째 파트인 '우울증이라는 검은개'와 마지막 파트인 ' 우리의 삶은 우리가 변화시킨다'는 소책자로 만들어서 뿌리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생겼습니다. 친구에게 권했는데요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무려 첫 파트를 요점만(별로 요점이 아닐지도?) 타이핑 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부디 병원이나 상담센터에 가시는 분들이 늘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초인가 기억력 감퇴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치매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이었습니다만, 저는 그 방송에 인터뷰를 한 사람들을 보면서 저 분들은 아무래도 '중증 우울증'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방송에서의 결과는 저의 예상과 같았습니다.
본인의 감정을 받아내기가 정말 힘들었을텐데 그것조차 모른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지 공곰히 생각했습니다. 이 티스토리에 '메모'폴더에 파트 1을 타이핑하면서, 우울증의 발병 수치는 선진국으로 가면서 더 올라가는 그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지와 그리고 고통스러워도 고통이 일상이라서 고통이 증가하더라도 모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는 우울증 환자가 적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예전에 읽은 책 이었는데요. '킬링필드'로 많은 사람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증세에 시달리지만, 약을 먹는 사람들도 손에 꼽는다고... 그래서 그런 부분의 지원이 많이 시급하고 긴급을 요한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만약 우울증에 대한 진단비가 무상이고 약도 무상이라면 많은 어려움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 우울증 환자가 많을거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내전을 겪고있는 나라라던가(가족의 죽음, 삶의 터전의 사라짐, 기아, 병 등등)... 병원에 갈 시간이 있을까요? 그 이전의 생존의 문제 때문에 짐이 하나 늘어도 그냥 짐인가 보다 하고 지고 가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시선이 위로부터 내려보는 시선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분명 당사자들은 이런 저의 시선에 불유쾌함을 느끼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명쾌하게 불쾌 할 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 고통은 존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튼 저는 덕분에 우울증에 대해서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치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책의 앞날개에서 저자의 다른 책에 대해서 소개가 없던데... 이 분의 저작은 이 책 한권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저도 원저지만 번역이 특히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완경' 매우 반가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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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에 매우 읽고 싶은 책이 실은 '절판'이 아니라 '법원에서 판매금지 가처분'을 당해서 서점에 풀리자마자 구할 수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웹에서 열심히 서치를 하다보니 웬만한 도서관에는 없는 도서 였습니다. 출판사에 문의한 분들도 구할 수 없다는 답변들만...

책 제목은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모님의 포스팅을 보고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요. 다른분의 포스팅을 보면서 그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두분의 포스팅 주소는
http://blog.naver.com/multi219.do?Redirect=Log&logNo=70036097925
http://blog.naver.com/multi219.do?Redirect=Log&logNo=70036101632

http://blog.naver.com/moonlove98?Redirect=Log&logNo=120065404739

법원에 분노의 전화를 하겠다고 뽐이씨한테 말했더니 차라리 청화대에 글을 쓰라고 하더군요. ㄱ- 그래야 하는 건가. 차라리 국회에;;;
여튼 별다른 의식 없이 살고 있었는데 이 나라는 참... 정말 부끄럽습네다.

그리고 또 읽고 싶은 책은
<왜 아이들은 부모를 살해하는가>인데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나봐요. -_=;;;;;;;;;;;;;;;;;;;;;;;;
그렇다면 영어원서인가? ...... O>-<
<내적불행>도 번역서보다는 원서쪽이 더...라고 말하며 상담선생님이 권해주셨는데요. 저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_=;;;;;;;;;;;;;;;;; "학교 다닐때 공부 열심히 할 껄"이라고 그 순간에는 절실히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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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불행>

리뷰/텍스트 2009. 4. 13. 09:49 by dung


요전에 처음 읽은 푸른육아에서 나온 <독이 되는 부모>를 보면서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번에 읽은 <내적불행>도 제목을 참~ 잘 지은 책 이었습니다. 내용은 책 제목에서 연상되는 그대로 입니다. 
매우 명확한 유형별로(주관적으로 느끼기에) 나누어서 전개되는 책은 아니었어요. <독이 되는 부모>와 비교 했을 때요. 그런면에서 <독이 되는 부모>는 정말 잘 만들어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유형별로 정리해서 받아들이기 쉽게(독자의 입장에서)된 책은 거이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살짝 그런 기대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분류는 있었고 그 분류에 따라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편했습니다. <내적불행>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처음 접하는 부분도 있어서 좀 당황스러운 부분들이 있었어요. 특히 어린아이에 대한 부분이 그러했어요. 자신이 얼마나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절실하게 느낀 책 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책들에서 대부분의 성격은 ~7세에서 80%인가 정도 형성된다고 봤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사람은 어느정도 성향은 타고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이 책에 의하면 아이는 태어나서 느끼는 것들은 부모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 존재이고 부모가 표현하는 방식이 나를 사랑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내적불행이 쌓여가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당황했습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르테르에 시달리거나 우울증에 빠져 있는 여성의 태아는 자극에 반응할 때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만들어내며, 이들의 스트레스 호르몬은 다른태아들보다 더 상승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태어날 때 다른 아이들보다 더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비정상적으로 짜증을 냈더라도 부모가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태아를 돌보면 아이는 차분하고 융통성 잇는 어린이로 성장한다. 아이들 뇌 속에 성마른 성격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4장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자,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p143

생각해보니 저의 그런 생각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것들 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부분을 극복하려고 노력중인데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부모의 부분을 물려받아서 저는 이어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어요.
책을 읽어보다보면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들은 원래 타고나기를 행복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자신과 부모가 잘못된 방법으로 키워서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서 좌절하고 그것을 행복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그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을 수령에 빠트린다는 것 이었어요. 그 책에 나오는 모든 내담자들의 상담 사례들이 그러했어요.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니까 설명이 되더군요.
전 지금까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계속 대인관계나 직업이나 여러가지 것들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그런 것들은 자기 자존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요. 자존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고... 그 표현방법(접근방법)의 차이인지 몰라도 좀 충격이었습니다.
자존이 낮기 때문으로도 설명되지만, 자존이 낮은 이유는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것이고 그 잘못된 것들을 역활모델로 삼기 때문에 계속 그것들이 반복되는 것 이었어요.
뽐이씨랑 살면서 저의 그런 부분들을 더 많이 알게되었어요. 저는 분노하거나 감정을 표현할때 부모님에게 학습된 방식으로만 표현하고 좌절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절망하고 나락에 빠지는 패턴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노력하고 있어요. 뽐이씨가 지적해주고... 그리고 지금은 좀더 생활에 습관이 될 수 있도록 비폭력 대화 입문 1을 배우고 있어요.
전문가와 상담하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건 참 좋다고 생각해요. 정말 도움이 되었었구요. 다만 그 비용의 문제가 큰 부담이라서 일상생활을 영유하면서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그리고 표현하는 것은 비폭력 대화가 정말 좋은거 같아요. 그래서 입문 1과정이 끝나면 연습모임도 나가 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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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반대한다>

리뷰/텍스트 2009. 4. 11. 11:48 by dung



<트라우마>를 출간한 출판사의 책으로, 이 책에 대해서는 <트라우마>의 날개를 보고 알게되었다. 매우 강렬한 제목에 호기심도 생겼고, 어떤식으로 반대한다는 건지도 궁금해서 사서 책장에서 반년정도 묵혀두었다가 얼마전에 읽기 시작해서 오늘에야 독서를 완료했다.
책 제목은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연상시키는 제목이었다. 책의 주제는 우울증에 대해서 기존(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편견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으로 우울증은 명확한 질병으로 분류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책이었다.
저자의 전작 <프로작에 듣는다>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전작들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한 책. 무엇보다 광범위한 정보에 놀라고 그리고 우울증이 우리들의 신체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에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라고 생각할 정도 였다.
여러 연구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들에 대한 보고들을 보고있자니... 우울증이 해당 질병의 치료를 방해하고 그리고 해당 질병을 발병하게 하는 큰 요인이었다. 암, 감염성 질병, 혈관성 질환, 심장병, 동맥경화, 뇌졸증 등등.
우울증의 병리적 특성은 뼈, 내분비선, 심장, 혈관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보고와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었다. 우울증이 먼저 와서 영향을 끼치고 그 질병이 발병하면 우울증 증세가 따라오는 '후기 발병 우울증 혹은 혈관성 우울증'으로 인하여 치료가 더디고 회복력도 더디고 환자 자신이 병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기가 힘들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연구 결과는 심장병이 있는 환자들에게 A군인 환자들은 심장병약만 처방했고, B군의 환자들은 심장병약과 우울증약을 함께 처방했다. 10년인가 20년후에 그 환자들의 생존률은 B군의 환자들이 A군의 환자들보다 2~3배정도 높았다는 결과를 보고 충격. 이 환자군은 심장병이 발병하기 전에 우울증이 없는 환자군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이 부분은 조금 가물가물. 그렇다고해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 나라의 이 책에서 열거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우울증 치료도 병행받고 있는지는 매우 회의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통계치를 보지는 못했지만;;;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서 1부에서는 저자의 내담자들의 사례들과 우울증에 대한 연구가 진해중이거나 결과가 나온 부분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알려주며, 2부에서는 서양에서의 우울증의 은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우울증은 질병이며 치료하지 않으면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삶의 전반을 망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 모두가 말이다.
사실 2부에서는 나는 그쪽 사람이 아닌 관계로 아마 이 책을 읽는 이 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간극을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거기서는 우울증에 대한 은유는 마치 판타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동경이라던가 뭐 그런거 말이다.
자살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우울증이나 간질환자 이었고, 오늘날은 우울증의 스펙트럼에서 좀더 상세하게 양극성 장애로 분류되고 있다고 했다. 양극성 장애로 고통받는 예술가들은 조증일때는 열심히 창작을 하고 울증일때는 그 작품을 고치는 경향도 있다고 했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실비아 플러스 라던가 고흐, 버지니아 울프 등등 많은 예술가가 예전에는 우울증이나 간질로 고통받았던걸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 학자들의 견해는 양극성 장애로 여겨지고 있다고 했다. 양극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조증과 울증의 높낮이를 좀 낮추기 위해서 처방한 약을 먹게되면 창작 부분에 상당히 문제가 생긴다는 보고가 있다고 했다.

저자는 맺는 부분에서 약이 할 수 있는 판타지(혹은 망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두뇌 유입을 막는 효과적인 약물(항당류코르티코이드, CRF 차단제)이 개발되어서 신경증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고통이 둔화된다던가...
우울증인 사람들이 우울증 증세가 둔화되면 성격적으로도 변화가 있어서 여러가지가 달라진다던데... 우울증의 스펙트럼을 어디까지 봐야하는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약물이 개발된다면 중증의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매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우울증 삽화를 막는 방어체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온전히 체험해야지 후에 감정의 후폭풍이 찾아오지 않을텐데 약물으로 그걸 억제한다고 해서 과연 해결이 가능한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던 그건 불완전한 것이고 약물치료와 본인의 슬픔에 대해서 애도하는 것이 함께 병행되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
읽다가 흥미로운(혹은 걱정되는) 것을 알게되었다.
인터페론으로 치료를 받는 일부 사람들에게 약물의 부작용으로 기분장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참기 힘든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고 그 빈도는 매우 높다고 보고되었다고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충분히 안내해주는지 그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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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기술>

리뷰/텍스트 2009. 4. 8. 22:43 by dung


고민하다가 그냥 구매했습니다. 오늘 반나절 정도 걸려서 읽었습니다. 윗집에서 드릴 소리가 들리지 않을때를 이용해서 읽었습니다. 책은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라서 쉽게 읽었습니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구요.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가브리엘 뤼뱅)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부 요약되어 있었습니다. 맺음말은 연결이 좀 약한 편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문학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은 편이거든요. 맺음말이 문학작품을 이용해서 맺고 있었어요. 그래서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도 정말 지루했었습니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했던 책들 중에서 읽은 책은 한권이던가 두권이던가 그래서 더 그랬던거 같지만요. -_=;;
그 작품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시대적 배경, 작가의 개인적인 배경)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뭐 그런 지식이 없는데 바로 작품에 대한 분석을 들이대면 이해하기가 어려운건 당연한거라고 생각해요. 거리감도 좀 있고...

책은 가해자를 '가학적 가해자(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사랑을 주었을 사람이 고통을 준 경우)', '이기적 가해자(가해자가 고의가 아니거나 무의식적으로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경우)', '무고한 가해자(아이가 어릴때 사망한 부모나 자신이 과거에 극심한 고통을 겪어서 아니면  지금 겪고 있어서 자녀에게 자신의 상처를 돌봐주어야 한다고 의무감을 지우는 부모 등등)'로 나누어서 그 (상담)사례를 들고 있었습니다.


...아이(혹은 그 아이가 자란 어른)가 피해자일 때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이는 가해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에게 부모(혹은 부모의 대체물)는 사랑하는 존재이므로 부모는 원친적으로 죄를 씻는다.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금기며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미움을 쏟아부을 수 있는 또 다른 외부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사그라지지도 않는 적대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이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적대감은 강력하고 매몰차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그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딱 한가지다. 자기 자신이 유일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싱다. 공격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데 적대감은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으니 결국 독은 피해자이게 돌아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피해자는 진짜 죄인을 놔두고 스스로를 잔인하게 벌한다.
- <증오의 기술>, 고통바든 피해자와 무관심한 가해자, p 14


'이기적 가해자'의 경우에는 프로이드의 상담사례(저서)를 인용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프로이드 학파(?)의 이론을 따르고 있어서 책의 중간중간에 그런 용어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 텍스들이 생소한 분들에게는 그런 텍스트들로 설명하는 부분들은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 부모는 절대자고 아이는 약자라는 사실을 책에서는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가학적 가해자의 경우에는 소아성폭력에 대한 두가지 상담 사례를 들고 있었고, 그 경험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괴롭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상담사례의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이사'가 아이들(상담자)에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고 충격을 주는 지도 알게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 또한 그런 기억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이사로 인하여 전학을 가게되었고 전학간 학교에서 정말 힘들었었고,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부모가 많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이기적 가해자의 경우에는 부모를 간호하거나 부모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무고한 가해자의 경우에는 저의 친우가 생각나면서 좋은 사람이지만 좀 부담스러운 친구도...그리고 저의 부모님도 생각이 났습니다.

책의 날개에서는 '마음과 용서의 올바른 사용법'에 관해서 10가지를 알리고 있었는데, 본문의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습니다. 상담사례를 이야기 하고 있었지 그 부분에 대해서 정리하고 요악하여 넘버링 해주는 정말 친절한(?) 책은 아닙니다.  
게다가 가브리엘의 상담자(내담자)들은 보통(보통이라고 규정하는데는 주관적인 기준들이 지배하는데요. 저는 그냥 극단적인 수준의 경험이 아니라 대부분 경험하고 공유하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것들을 상처 혹은 고통이라고 여기지 않고 나약하다고 여기는 것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고 그것들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의 상담 사례가 아니라서 우리들(저의 의미의 보통의)에게 적용하기에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저렇게까지 삶의 전방위에서 영향을 미치는 구나'하고 또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자신의 지금의 모습이 그 증거이기도 하지만요. 다른사람의 상담사례를 보는것은...  그래서 비폭력 대화 첫 수업때 저 자신에 대해서 요약해서 설명할때 울었나봐요. 하아.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심리학 관련 저서중에서 상담자의 상담사례를 비교적 깊있고 광범위하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책들(주로 국내 저자의 책들)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읽으면서 좀 부분적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니면(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퍼낸 경우) 개인의 경험이나 아니면 만난 사람들에 대한 관찰의 이야기들이 대부분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자의 다른 책들도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는데,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서 소개된 책은 없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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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선생님의 책이라서 신청했습니다. 예상대로 글이 좋아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양이 적어서 반나절 만에 독서를 완로했습니다. 이번에도 여러가지 배운것들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인 부모님이 보시면 좋을거 같은 책이었어요. 2~살 지나서 보면 딱일거 같습니다. 엄마도 읽고 아빠도 읽고 그러면 좋겠지요. 아빠의 역활에 대해서도 책에서는 지속적으로 알려주거든요.
이 책에서 앨리스 밀러의 저작이 인용되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보아님이 이 분의 베스트라고 하셨던 <천재가....> 책이었어요. 그치만 절판 Y_Y 흑흑. 보고싶습니다. 출판사에 재판 출판 압박을 해야하나, 아니면 이 분의 다른 저작들이(비교적 최근에 출판된) 양철북 출판사에 출판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지 고민중입니다. 하핫;

책은 부모가 알아야 하는 자녀의 4가지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책입니다.(앞쪽이 자녀의 마음이고 뒷쪽이 궁합이 맞는 부모의 태도 입니다) 
'알고 싶은 마음-눈높이 맞추기', '성취하고 싶은 마음-도전 허용하기', '표현하고 싶은 마음-감정 표현 격려하기', '제멋대로 하고 싶은 마음-위험에서 보호하기'
차례를 살펴보면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상세하게는 아니더라도 소제목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차례를 적습니다.

알고 싶은 마음
- 아이의 수준을 과대평가 하지 말자
- 아이의 인지 발달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자
- 아이의 수준에 맞는 자극을 주자
- 대화를 통해 뇌를 발달시키자
- 아이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자
- 아이가 질문할 땐 아이의 수준에 맞게 대답하자
- 곤란할 경우에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자
- 천재성을 보애는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추자
- 산만한 아이는 먼저 주목하게 한 후 이야기하자

성취하고 싶은 마음
- 도전과 성취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 스스로 성취하도록 답답해도 조금 더 참고 기다려 주자
- 습관적으로 간섭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 습관적인 간섭은 아이의 주체성을 훼손한다
- 자주 간섭당하면 분노가 쌓인다
- 말로 간섭하기보다 행동으로 직접 보여준다
- 비교는 주도성의 방해자
- 실패했을 땐 화내지 말고 격려해 주자
- 주도성은 고집부리는 것과 다르다

표현하고 싶은 마음
- 모범답안보다 솔직한 감정 표현을 더 격려하자
- 감정 표현을 증진시키는 부모의 반응법
- 위협적으로 말하지 말자
- 부정문보다는 긍정문을 사용하자
- 감당하지 못할 고민 상담을 아이에게 하지 말자
- 스스로 의사 표현할 기회를 빼앗지 말자
- 표현하는 모범을 보이자
- 감수성을 키워주자

제멋대로 하고 싶은 마음
-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야 한다
- 규칙의 울타리는 높고 단단하게 세우자
- 떼를 쓸 때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
- 참을성을 길러주는 의미
- 아이를 단념시켜야 하는 상황
- 아이를 단념시킬 땐 부드러우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 사소한 것으로 아이와 감정싸움을 하지 말자
- 권위는 잘 지켜야 아이를 보호할 수 있다
- 요구는 거절하되, 욕구는 받아준다

아빠에게 쓰는 편지
- 아빠와 엄마의 차이
- 아빠라서 좋은 점
- 아이에게 청량제가 되자
- 아이와 둘만의 시간을 갖자
- 유쾌하고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주자

읽다가 새롭게 알게 된것은 '자존감'을 형성하는 원천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받는 경험'과 '성취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쌓여서 자존감을 형성한다고... 그래서 아이가 도전하는 것을 막아서지 말야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끄덕끄덕)
주도적 행동과 고집부리기의 차이점도 알게되었습니다.
주도성-성취감을 느끼게 함, 새로운것을 시도하는 것과 관계있음, 과정을 중시함

고집부리기- 자기애적 만족감을 느끼게 함, 습관적인 것과 관련이 있음, 결과를 중시함
그리고 아이를 버리고 가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
월덴님 댁에서 북크로싱으로 읽은 책입니다.
http://walden3.kr/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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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오랜만에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관계로 처음에는 단어(텍스트)들의 생소함에 당황했으나, 그냥 읽으면서 진도를 나갔습니다. 몇차례 읽다보면 처음에 읽었을 때 보다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니까 처음 읽은 지금 남아있는 건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처음 읽은 느낌에 대해서 포스팅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읽고나서 든 생각과 비교해볼려구요.
책은 버틀러의 한나 아렌트와 아감벤의 이론에 대한 비판적인 논으로 시작했는데요. 저는 사실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서경식의 저작에서의 인용에서 접한 것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서 만나본 기억이 없어서 그녀의 이론들과 그리고 버틀러의 반박들을 생각하면서 넘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감벤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버틀러도 앨피에서 나온 버틀러에 대한 입문서를 본 것이 전부이고, 스피박의 경우에는 끝까지 다 읽은 책은 유일하게 한권. <대담>. 읽다가 나의 무지식 몰이해로 차후를 기악한 <포스트식민이성 비판>, <다른 세상에서>. 그리고 <포스트...>를 읽다가 어려움을 느껴서 앨피에서 나온 입문서인 <스피박 넘기>를 읽었습니다. 앨피에서 나온 입문서들은 많은데요. 저는 추천한다면, 스피박, 버틀러, 지젝의 입문서를 추천합니다. 비 추천은 데리다, 보부아르 입문서. 그 외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를 않아서요.  
머 그런고로 번역자인 주해연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야, 그 때 당시의 미국의 상황을 알고 나니 좀더 가까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기 시작했는데, 당시에 9.11이 있었고 그래서 미국에서 어떤식으로 행동했는지 인지하고 읽었으면 더 몰입이 잘 되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는 의미에서 '번역자의 말을 먼저 읽었어야 했는가?' 하는 후회가 들었어요. 뭐 다시 읽을꺼니까 두번째의 감상은 좀더 넓어지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녀들의 논의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들은 '국가를 그 국가의 언어로만 불러야 하는건가?'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부시 아저씨가 미국의 국가는 영어로만 불러야 한다고 하셨다던데... 만약 그런 시위가 이 나라에서 재현된다면 어떨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오는 반응들은 눈에 보여서 안습.  OTL
책에서 주된 논의 였던 '국가 없음'에 대해서는 기존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좀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민족국가든 다민족국가든 그 국가에서 외부자(시민이 아닌 존재, 국민이 아닌 존재, 불법체류자, 망명자 등등)를 정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권력의 힘이라는 사실. 우리(민족국가 혹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외부자를 받아드리는 것을 제한해야하며, 외부자의 요건에 대해서 정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의 핵심인가에 대한 부분. 그 국가의 국민에 대해서 정의하는 것은 누가 정의하는 것인지도, 불법체류자는 국민이 아니니까 소비되어 사라지는(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본국으로 추방되는) 존재이어야 하는 부분, 그 부분에 대해서 자신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는가? 뭐 그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질문이 마구 던져졌어요. 그야 말로 질문의 천국. O<-< 별로 고민하지 않았던(보려 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해야하나요? 뭐 그랬습니다.
책을 보다가 가장 저의 가슴을 관통했던 부분은 번역자의 말에서 이 논의가 있었던 당시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불법체류자'라는 명명에 저항하며, "어떻게 사람의 존재가 불법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또한 이들은 파업을 통해 이민자 없이 미국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고, 평소에 이민국 단속의 표적이 될까 자신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과는 달리 공적 영역인 거리에서 자신의 목수리를 냈다. 시위 과정에서 라틴게 이민자들은 이국 미국 땅이 자신이 살아갈 곳이라는 의미로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불렀다." 


사람의 존재가 불법일 수는 없는건데 말이죠. '불법체류자'라는 말이 가진 언어적 은유와 참담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타국의 시민은 우리의 번영을 위해서만 존재 하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가. 국가 이전에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정의된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순간 사라지며, 그들의 존재는 그런 단어로 치환되어버립니다.
'우리'라는 말은 그래서 공포스럽습니다. 언제나 느끼는 부분이지만, '우리'가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통용됩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든 정당화가 되어버리죠.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텍스트 기반으로 비난받습니다. 격렬하게. '우리'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 할 수도 없는거 같아요. 어떤것들이 '우리'를 '우리'로 있도록 정의하는 지에 대해서도요. '우리'에 대한 기준이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도요. '우리'는 더이상 교과서에서 정의한다고 해도 '단일민족'이 아닌데 말이에요. '우리'에 대한 신화는 점점 우주로 가는거 같아요.
사실을 말하면, 기존의 '우리'가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인지시키는 교육이 '우리'를 뒷받침 해주는거 같습니다. '우리'에 들어온 '소수자'를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여전히 '우리'는 우리일뿐 '우리에 들어온 소수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냥 '우리'안에 존재하는 '외부자'일 따름이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우리'를 향하는 그 고통의 외침은 '우리'에게 과연 도달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저는 매우 회의적이에요. 특히나 이 정권에서는 말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우리'였던 사람도 우리가 아닌 혹은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존재로 재현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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