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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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 장 아메리, 산책자 
서경식 선생님의 책에서 많이 인용되었던 장 아메리의 선생의 유명한 저작중 하나인 <자유죽음>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출판사는 산책자. 저는 장 아메리 선생의 책이 나온다면, 창비나 돌베개 출판사 일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었습니다. 산책자는 웅진씽크북 단행본 계열사중의 하나로, 최근에 흥미로운 인문학 서적들을 많이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입니다. 게다가 표지들도 좋아하는 디자이너분들이 디자인을 해서 어떤 디자인으로 책이 포장될지도 기다려지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자유죽음>또한 좋아하는 디자이너 중의 한분인 석운님의 디자인으로 표지나 본문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매우 잘 살려줬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에 대해서 작지만(작은 새) 강한 목소리를 내는 느낌을 살린 표지였습니다. 
이 책은 살려고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시기에 월덴님댁에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북크로싱으로 올라왔기에 사기전에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크로싱을 신청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보신 분은 혜란님과 월덴님. 두분의 평은 생각보다 좋지 못했습니다. 두분이 생각보다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를 페이지를 넘기면서... 저도 뭔지 알것 같더군요. 

저 또한 책 자체가 생각했던 내용이나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장 아메리라는 사람을 알게된 경유는 서경식 선생의 책에서 이었습니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책은 <죄와 벌의 피안>쪽 이었습니다. 처음 장 아메리씨의 텍스트를 보게된 책은 서경식 선생이참여한 대담집이었던 <단절의 세기 종언의 시대>쪽으로,가장 기억에 남았던 구절은 서경식 선생이 인용했던 장 아메리의 문장. 그리고 다음에 만난 것이 또 서경식선생님의 다른 책에서 만난 장 아메리의 글의 인용 문구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만난 인용문이 서경식 선생님이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아서 떠난 책에서... 
그의 책에서 인용되었던, 그 문장의 장 아메리와 <자유죽음>에서 느껴지는 장 아메리는 좀 거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느낌의 문장도 만나긴 했지만, 수많은 문장들 중에서 그건 정말 간간히 만나는 우연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방향은 같은 아우슈비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 선생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이었거나, 이 두사람과 달리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던 빅터 프랭클 선생처럼 개인적인 이야기와 본인의 주장을 담은 이야기가 적당히 섞여 있을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고 나서 든 느낌은 <우울증에 반대한다>라는 책과 굉장히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울증에~> 저자 피터 D 크레이머는 책에서 시종일관 정말 힘들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힘을 빌어서요. <자유죽음>에서도 장 아메리는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있었던 일을 토대로 계속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 나갑니다. 사실 그 시대에는 그 사람들이 정말 유명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취약한 이쪽 세계의 사람인 저로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가 인용했던 그 많은 사람들의 태반은 모르는 사람이고... 그 사람들의 저작 또한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 참 많았습니다.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책들은 언제나 나에게 그 간극을 느끼게 해서 참 서글픕니다. 이론으로 무장했던 당시의 시대적 기반에 충실해서 여러사람이 나왔던 간에... 

저는 당신이라면, 그런것들(비하하고자 함은 아닙니다)의 힘(텍스트의 힘이라고 해두죠)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수 있는 개인적인 체험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니었나봅니다. 정말 지겹고 또 지겹고 힘들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지루한 싸움이었나봅니다. 저는 종교가 없고 그쪽(유럽)의 종교적 기반에 의한 가치관의 프레스가 어느정도인지 몰랐기 때문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들은...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은 그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조금씩 좋아져 갑니다. 아주 천천히요. 여전히 편견의 벽은 높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소수지만 당신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대로 받아드리는 집단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 달리 우울증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이 정신분석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구요. 지금의 주류의 치료법은 인지 행동적 이론에 근거해 있고, 과거와 같이 전기치료나 정신분석이 대부분의 치료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치유(치료)의 목적은 당신이 생각하는 '기능성'에 대해서 개선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삽화의 상태가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고통의 경감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방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 견디기 힘든 지루한 고통때문이고 그 고통의 경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이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안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택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은 알고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책을 덮으면서, 당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으며 얼마나 고통받았으며 이 책을 쓰면서도 얼마나 많은 것들과 싸워왔는지 알게되었습니다. 당신들의 노력이 있기에 지금 저는 조금더 안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살아남아 있는 것 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죽음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살다보면 좋은 것을 더 볼 수 있다고 아쉬움이라던가 그런것들을 화두에 담지 않습니다. 그냥 당신의 선택을 존중할 따름. 본인이 아니고서야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짜피 모든것들은 타인의 고통일 따름. 체현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같은 압력으로 작용하는 체현일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이 느끼는 그 무게는 다르니까요. 결코 같아질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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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심리학>

리뷰/텍스트 2010. 5. 31. 20:45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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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의 심리학>, 데니스 홀리, 흐름출판
월덴님의 서평이 나쁘지 않아서 잡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푸른육아에서 나온 <불행중독>과 이어서 보면 딱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사실 그 책을 읽었던 시기는 그 책이나 이책이나 대부분의 책에서 정의하는 '(나쁜)습관'에 대해서 저항하던 시기이었고, 그때는 그 책(<불행중독>)을 읽으면서 화도 나도 좀 억울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거든요. 이 책과 그 책중에서 어느쪽을 더 먼저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쪽보다 이쪽(<반복의 심리학>)이 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느낌은 받았습니다. 
푸른육아에서 나온 다른책인 <독이되는 부모>를 <불행중독>보다 먼저 읽었던 관계로, <불행중독>도 <독이되는 부모>처럼 분류별로 굉장히 정리가 잘 되어있기를 기대했습니다만, 그런편은 아니었거든요. 어떤편이었나면, 사례별로 좀 두루뭉실하게 묶여있었던 편 이었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반복의 심리학>은 <불행중독>보다 '나쁜 습관'에 대해서 좀더 세분화가 되어 있으며, 스스로 테스트 할 수 있는 자가 테스트도 모든 파트 마다 있습니다. 다만 '습관'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야말로 고쳐야하는 나쁜 습관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좀더 조심해서 표현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요. 
'나쁜'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은 당신에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식으로요. 저는 보통 '작아진 옷'이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어릴적에 엄마 아빠한테 혼날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했던 행동들을 어린시절의 옷이라고 한다면, 나이를 먹은 지금에도 당신은 여전히 그 옷들을 낑겨 입고 있다고... 그 옷이 작아졌는데도, 당신은 항상 그옷만 봐와서 그 옷이 작아졌는지, 불편한지 옆에 좋은 옷들이 있는지 조차 볼 여력이 없었을 따름이라고. 여러가지 옷들 중에서 당신은 하나를 고를 수 있으며, 그 고른 옷을 어떤 방법으로 입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고... 뭐 그런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곤 합니다.
그걸 '습관'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바람직 하지 못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더 많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랬고... 수 많은 책에서도 그러더군요. 지루한 저항이니까요. 그걸 나쁘다고 완곡한 표현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유연한 표현을 사용해서 지칭하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이 책의 다른 재미있는 점은 저자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나 임상심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일반인이었어요. 김형경씨와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책에 대한 이해가 좀더 쉬웠고, 접근하는 방향도 좀더 편한 편입니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아주 많던데...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되어서 나온 책은 이책이 유일하더군요. 아쉬웠습니다.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졌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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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향, 돌배게
예전부터 김규향님이 예수에 관한 책을 내신다는 정보는 가지고 있어서 항상 이 양반이 화두에 올라왔을때는 친구랑 출판사에서 좀 꺼려해서 출판이 늦어지는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 나왔더라구요. 살까 말까 고민하던차에 월덴님댁에서 북크로싱을 하기에 신청했습니다. 책을 읽어본 소감은 읽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특정 종교에 대한 편견이 정말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거든요. 개신교 출판사에 다닌 경험도 있고, 사회서 만난 저에게 있어서 막장이라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개신교 신자였던 관계로 저의 편견은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뭐 그사람들의 태도가 대부분 일조했던것도 사실이었지만, 저는 그들이 내세우는 메인 교리또한 정말 짜증났었습니다. 굉장히 치사하다고 느꼈거든요. -_- 
스스로 자신들의 교회를 '성전'이라는 스스럼 없이 말하는 태도라던가 비종교인들은 좀 우민같은 느낌이고 본인들은 선택받은 '선민'이라는 태도로 항상 상대방을 대했던 분들, 자신들이 정말 선하다고 착각하는 사고방식, 어찌하면 그렇게 되는건지. 끄응. 그 종교에는 자존감을 초사이어인급으로 올려주는 프로그램도 있다는 건가? 
테러사건이 있었을때 인과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태도라던가 그외에 모든것들이 당신들이 신이 용서해주니까 본인은 별로 걱정이 없다는 태도. 이봐요. 당신의 신이 용서해주실지 모르지만, 당신때문에 피해를 본 이쪽은 당신을 용서한적이 없어요. 그외도... 우와 적으려고 하니까 진짜 많네요. OTL ...암튼 뭐 저는 대충 이렇습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사실이에요.  아 그래서 그들을 도매금으로 지칭해서 사용하는 텍스트는 '근본주의자들' 좀 예의바르게 표현하면 '최대주의자들' 이었습니다. 
<예수전>에서는 인간 예수의 고뇌에 대해서 정면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아닌 인간 예수에 대해서요. 그가 말했던 말들의 은유의 참 뜻이나 그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주류의 개신교인들이 보면 뭐라고 말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만, '빨갱이'라고 외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철저하게 이상주의자였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고군분투하는 그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생활과 정치는 불리될 수 없다는 것,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바라보는 시각은 계급적이 었다는 그의 해석이나 예수가 집권세력에 의해서 살해된것이 어떤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이나 여러가지로 흥미로웠고 좀더 이해하게 되었고, 저의 한쪽으로 기울여져서 피해망상적으로 까지 발전했던 저의 기준이 어느정도 선을 되찾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날리던 격침들을 보면서 저는 정말 시원했었습니다. 마치 지금의 대부분의 주류의 교회의 사람들에게 날리는 듯한. 거참 시원하더군요. 아이고 시원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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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산책자
인상적인 부분이 여러가지가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던 파트는 '글로벌 공포'에 대한 파트였습니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입장과 조우했거든요. 부시2세의 대이라크 연설에 대한 해석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거룩한 테러>라는 책에서 그의 연설의 전문과 빈라덴의 연설 전문을 읽은 관계로... '뭐야 애들 진짜 똑같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책의 입장은 근본주의자들은 개신교나 이슬람교나 비슷한 패턴이고 내세우는 방식이 미묘하게 다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구요. 뭐 지금도 국가테러나 무장단체의 테러나 사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씨는 부시의 그러한 태도를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태도가 아니라 '정치를 종교화'한 태도라고 말합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런식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었거든요. 보는 입장에 따라서 근본주의적인 태도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입장으로 보면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거에 가까우니까요. 여러가지 의미로 새로운 시각으로 사태를 바라보게 되어서 즐거웠던 책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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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생활>,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식채널
월덴님댁에서 북크로싱으로 받은 책인데, 읽는 기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 사실 전반부는 거부감이 심해서 좀처럼 진도가... 정확히 말하면 짜증나서 접고 싶을때가 많았습니다. 전체 파트는 크게 5파트로 나누어져 있고, 그중에서 파트 2에 해당하는 '남과 여, 그들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좀... -_- 유전적이고 성별적인 요소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육자의 태도와 양육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머 뒷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부분이 상당히 해소되긴 했지만, 그런 태도를 전면으로 내세워서 취한 부분이나 텍스트를 선택한 저자의 의도라던가 그런 부분은 역시 불편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좀더 조심스러웠으면 했습니다.
파트 2에서는 유전적인 요소인 성차적인 요소에 따라서 아이를 다르게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로, 전반부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메인으로 나오다가 후반부 즈음 가니까 같지만 조금 다른 입장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그렇지만, 아이들 중에서는 여성의 뇌를 가진 아이와 남성의 뇌를 가진 아이가 있고 그 중간에 있는 아이들도 있으나 그 아이들은 많이 않다는 부분이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 이였습니다.
파트 3에서는 IQ말고 다른 지능 테스트 방법인 다중지능에 대해서 안내하고 있었고, 파트 4에서는 아이의 도덕성의 중요성 그리고 파트 5에서는 자존감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습니다. 파트의 끝 부분에서 실생활에서 활용이 가능한 예시를 다루고 있고 파트 중간에는 그 이론의 소개와 실험 테스트의 결과에 대해서 알려주는 방식의 전개였습니다. 
정말 구체적인 지침을 원하는 분들에게는 어쩜 좀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책이지만, 그 이론들의 기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쯤은 읽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성차에 따라서 두뇌의 발달이 다른 경향을 띄지만, 그건 개인의 차이에 따라서 더 크게 달라지니 자신의 아이가 그날 뭘 하고 놀았는지 구체적으로 관찰일기를 쓰고 그걸 살펴보면 어떤 방향으로 교육을 해야하는 지가 좀 보인다는 충고는 아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암튼간에 책의 띄지에 적혀있던 텍스트 '지금껏 아려지지 않은 내 아이의 무한하고 놀라운 가능성을 밝힌다!"라는 텍스트는 육아책이나 심리학책을 처음 보는 분에게나 해당이 되는 이야기 였습니다. 하나도 새로운 이야기가 없었어요. -_=;;; 책의 표지 상단에 있던 "내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혁명적인 책"이라는 문구도 매한가지 이었구요. 그래서 전 뭐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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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에 소바주 3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중반까지 신나게 읽다가 후반에서 내용이 너무 급하게 진전이 있어서 좀 많이 어려웠습니다. 뭐랄까 '어라?'하는 사이에 여기서 저기까지 달려간 느낌이라고 해야하면 딱 인것 같아요. 아마 그 강의를 눈 앞에서 듣고 있었다면 졸거나 딴짓을 하거나 그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였습니다. 역자의 후기를 보니 저자의 다른 저서인 <녹색 자본론>에는 이 책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저자의 책들이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해도 같은 시리즈 내에서 보완적인 관계면 몰라도 이건 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부분이 좀 많이 아쉬웠어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는 <녹색 자본론>을 읽고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 덕분인지 다음 시리즈인 <신의 발명>도 좀 어렵다는 느낌이...  가 아니라 사실 그런편 입니다. 시리즈 1,2권인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과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보다 신화에 대한 설명이 줄어들고 아론가들의이론들(마르크스, 라캉 등등)에 대한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본 재해석이 더 많은 편이거든요. 덕분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나 레비아저씨의 저작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캉 아저씨는... 음..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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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사생활>, 토니 험프리, 다산초당
이번 신간을 보면서 내내 강츄를 외쳤다.(이 포스팅을 시점에서 이미 신간이라고 말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결론은 험프리 선생의 저작은 역시 다 보는 것이 좋을것 같다는 것. 본인이 읽은 책은 이번 신간까지 하면 총 3권. 다산초당에서 낸 시리즈들 모두 모실 예정이다. 
<비폭력 대화>에서 '자칼'이라고 말하며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주었던 우리가 기존 사용하던 대화의 패턴에 대해서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해가 가능하게 그리고 비난하지 않으며 말해주고 있었다. 뭐 <가족의 심리학>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하긴 했었다. 결론은 나는 '자칼의 언어'보다는 '방어행동(방어적 행동)'이라는 텍스트가 더 편하다는 것이다. 뭐랄까 '자칼나라의 자칼의 언어'는 그 언어의 시스템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느낌이 강한데,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토니 험프리는 과거에는 그 패턴이 매우 효과적이 었다는 부분이 큰 위로가 되었다. 당신의 그 패턴(대화던 뭐던)은 과거에 당신을 살아남기 위해서 매우 효과적인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더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수정을 해야하는 것이고 결고 수정이라는 것이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뉘양스의 태도나 입장이 가슴에 크게 와닿았다. 
또 다른 부분은 <당신이 나를 위한 바로~>나 <불행중독>에서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부모와 비슷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위해를 강하려는 속성에 대해서 크게 지적하거나 아니면 그 상대방을 선택하면 자신의 인생은 '졸망(졸라 망함)'이라는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부부의 사생활>에서는 당신이 그러한 배우자를 만났다면(친구도 포함 되시것다) 그건 당신이 그 시절을 다시 당신의 현재의 궤도에 올려서 다시 좋아지기 위해서 새로운 모색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들은 비슷한것 같으면서도 결코 같지 않는 다른 상황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너의 악취미(주로 습관이나 불행중독으로 명명되어지는)로 최악의 배우자를 구하는 너의 잘못된 태도(불행중독) 때문 이다' 같이 단정적으로 말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다니! 이 얼마나 희망적인 태도인가. 나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진짜임)
물론 그 두 저작에서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한건 아니지만, 뭐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완고한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었으니... 뭐 말 다했나? 그 저자들의 그 입장을 보면서 독자중에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얼마나 큰 절망을 느꼈을지. 재고하는 부분도 없었으니 말이다. ~_~ 그러는 의미에서 이 책은 그 책들과 반대의 위치의 정점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격려를 받고 조언을 받고 싶다면 망설이지 않고 나는 이 책을 추천하겠다. 지금의 선택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 당신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 당신은 이 상황에서도 충분히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면... 
더하자면, <부부의 사생활>의 표지 디자인도 역시 소인이 매우 사랑하는 오필민님이 디자인 하셨다. 표지부터 압도되었는데 역시.. ㅠ_ㅠ 필민님 원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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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아이들>, 장 폴 피카페르, 르트비히 노르츠, 중앙
제2차 세계대전 때 점령군인 독일군과 프랑스 여인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서 1부에서는 프랑스내에서 '독일놈의 자식'이라고 불리어지며 각종 종류별(말그대로 그야말로) 학대를 받던 아이들(지금은 중년이 된)의 증언이었다. 그들은 지금 현재에도 그들의 뿌리에 대해서 말하는데 큰 어려움들이 있었고 여전히 크게 망설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태어난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던가. 그들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었으나 그들의 엄마와 함께 낙인을 부여 받고 살아왔다.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그것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다른 뿌리를 찾아서 떠난 여정에서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2부와 3부에서는 제2차대전 시기의 프랑스인 여성과 독일인 군인간에 태어난 20만명의 혼혈아들이 태어난 그 이유에 대해서 추척하고 있었다. 점령기 시기의 독일군이 취했던 태도나, 프랑스 여인들과 독일군 사이에서 결혼을 금지한 이유 등등 여러가지들을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네의 사정 두가지가 떠올랐다. 일본인 위안부와 전에 했던 모 다큐. 한국군인과 베트남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2세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은 그들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을 찾아왔으나 대부분 부모에게 거부당하고 있다는 이야기. 프랑스에서 독일까지 그들의 다른 뿌리를 찾아 떠난 그들은 그들의 다른 부모의 재산의 상속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살아 계시다면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돌아가셨다면 부모의 사진을 그리고 이복 형제와 자신의 비슷한 부분이라던가 그런것들을 보고 싶어했다.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그들이 '유산'에 대한 권리를 요구 할 줄 알고 거부하는 일도 많았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사생아에 대해서는 유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아버지들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물론 그 법이 지금은 수정되었다고 하지만...
전쟁에는 승자도 패배자도 없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침실 부역(그들의 주장에 의거하면)을 행사한 국가에 대한 대역죄인들 이었을까?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낙인을 받을 만큼 잘못했던가는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것 같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정의 내리고 처벌할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국가적 테두리에서 생각한다면 그들(혼혈아의 어머니들 아버지들)은 국가의 존속(전쟁시기의)을 위험하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테두리로 넘어와서 생각해본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애정을 가진다는 것이 그렇게 죄악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전쟁 당시 그로 인하여 국가에 미친 위해는 거의 미미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다만 여성의 몸을 통해서 전쟁을 상징화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전에는 전후 그들이 부역한 자들에 대해서 처벌하는 태도에 대해서 매우 모범사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수정을 해야할 것 같다. 생활형 부역은 분명 어느정도 선까지는 구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도외적인 책임에 대해서 해방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식인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의 부역과 그들의 부역에 대한 무게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는 것 같다는 것. '알아야 할 권리'를 어디까지 두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개개인의 입장을 생각해본다면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 아닌가. 누가 그들을 비난해야하 할까? 그 부분에 대해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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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피터 싱어, 산책자 
<죽음의 밥상>으로 유명한 피터 싱어의 2009년 신작에 대해서 어떤 기대가 있었고, 책을 덮고 나서는 그 기대가 모두 충족되었고 때로는 여러가지 고민들을 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했었다. 이번 신작은(2009년 출간이니 신작이라고 하겠다) 전작의 느낌을 그대로 받아서 공격적이고 진취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결론을 향해서 한발 한발 크게 내딛으며 독자를 따라오게 하는 책 이었다. 기부에 대해서 사실 본인은 그렇게나 넓은 영역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깜짝 깜짝 놀라는 부분도 있었고 반성하는 부분들도 많았었다. 무엇보다 논쟁적인 부분에 대해서 정면으로 돌파는 그 태도에 매우 감탄했다. 그 부분은 자신의 부에 대비해서 기부를 해야 하는 비율과 많은 기부를 해도 기아는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이타심에 대한 부분이었다.
'자원봉사'나 '기부'에 대해서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내가 마주친 편견은, 그건 시간이 많고 돈도 많은 사람들이나 한다는 편견이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튼 그 지인에게 내가 한 항의 혹은 해명은 현실적으로 당신과 나의 경제적인 위치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논지의 해명이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좀 많이 우수운 변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과 나의 차이는 주위를 바라보는 태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결국 전해지지 못했다. 그것에 대한 나자신의 논리도 취약했기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단지 상품으로 소비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이 인생을 돌이켜보며 자신이 한 일 중에서 가장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은 남들을 위해 자신이 사는 곳을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든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군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동기 부여가 세상에 있을까요. - 헨리 스피라, p 232

지금 본인이 타인에게 피드백 없이 하는 활동은 ㄱ에서 에디오피아에 있는 소년을 매달 후원, 모 단체를 매달 후원, 그리고 주 1회 3~4시간 정도 자원 봉사? 이걸 자원 봉사라고 해야하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뭐 그렇다고 세간에서 이름을 붙였으니까. 개인적인 느낌으로 말하라면 다른 나라 말을 모어로 가지고 있는 분과 사귀기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가끔 책 기증도 하곤 함.
불합리함에 대해서 불평하기 보다는 사소하지만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건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 타인을 위한 일이라기 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의 하나일 뿐이고 그것에 대해서 확대하여 해석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냥 친구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고 본인이 낭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에서 조금 멀어지기를 원했을 따름이다. 내가 부질없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낭비하는 사소한 돈이 타인의 삶을 그리고 그 가족의 여러가지를 바꿀 수 있다면 나의 낭비적인 소비를 줄이는 것이 더 바람직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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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속삭임>, 보리스 시륄닉, 새물결
내 마음속의 트라우마 치료하기. 세계 최고의 심리 치료사가 사례를 통해 들려주는 상처, 사랑 , 치유의 이야기 <- 라고 되어있었으나 정말 지루하고 또 지루한 책 이었다. 번역의 문제인지 잘 모르겠지만, 여튼간 별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책. 하나의 작은 파트마다 모두 사례도 소개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ㅠ_ㅠ 아놔. 덕분에 이 책은 한달을 넘게 잡고 읽었다. 내돈주고 사서 오기로 읽었다는.... 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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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데 소바주 1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몇년전에 정말 우연히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은 카이데 소바주 시리즈의 두번째로 <곰, 왕이 되다>로, 정말 즐겁게 읽었고 그 마음으로 주위에게도 권했었던 책이었다. 금년에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카이데 소바주 시리즈 를 50% 할인하고 있어서 냅다 질러두었던 책을 잘 묵혀(?)두었다가 이제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 시리즈의 1권부터. 
1권의 주요 주제는 '신데렐라 이야기'로 전세계에 전해지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좀 변형된 이야기들을 보면서 그 이야기 속에 남겨진 신화적 잔재들을 조합해서 그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가는 즐거움이었다. 이 시리즈를 처음 읽을때 느꼈던 그 부분, 마치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한 페이지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까 종장 전 파트인 인디언들이 번형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경우에는 눈물이 나왔다. 
저건 분명 파라다이스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그들은 박제가 되어가고  있고 그 증거로 그들의 이야기들이 텍스트로 전해지고 있으니까 매우 복잡한 기분. 신화는 구전되는 것이고 그걸 텍스트로 만들고 학문화 한 것들은 그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낸 사람들이니. 그래도 저렇게 생각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안도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른 그들의 문화에 침식되어서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안타까워졌다. 보호구역에서 살아야하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그도 아직도 감옥에서 살고 있고... 그래도 나는 반대편 땅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신화를 읽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신데렐라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서 여러가지로 연결된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 나왔는데, 일본 만화에 변형되어서 많이 나오던 가구야 공주의 야기도 역시 등장. 그녀의 청혼자들에 요청한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를 알게되었지만, 역시 불편했었다. 그 이유는 크게 <월광천녀>의 그 시선 때문이기도하고 책의 저자가 이웃나라의 교수라서 인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항상 그들의 신화로 시작하기 때문이기도. 2권을 읽었을때도 '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 '단군신화'에 대한 부분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지만, 다른 나라의 신화는 다루고 있었지만, 정말 가까운 이웃한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인류학적인 시각으로 다룬 책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우리'라는 말을 정말 혐오하는데도, 불편한 부분은 그들이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때 나도 '우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논리로 '우리'가 없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는 주장에 뭐라고 반박해야할지 모르겠는데도,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들은 여전히 불편하고 우리가 아닌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차별'로 느껴진다. 자신에(이 나라의 신화에 대해서 다룬 책을 찾아보겠다는 것)대해서 합리화를 하자면, "그냥 이땅에 오래도록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신화의 원형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정도 이겠다. 
하지만 이 땅에 언제 정착했냐는 그 기준으로 '우리' 그리고 '타자'를 나누는 기준은 불편하다. 이 신화가 '우리'의 근원이고 우리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편하다는 말. 그저 이 땅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과거라고 말해주는 그런 입장을 마주하고 싶다는 것. 민족적(가족적)인 기원이 아니라 단지 그런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불편한 것 이겠지. 나는 당신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당신은 '이타자(외부인)'인가 아니면 우리안의 소수자인가. '국적'적인 부분을 열외로 한다고 해도 지금의 이 나라의 다수가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 국민, 시민)에 대한 기준에는... 그래서 그 신화적 연결성에 대해서 듣는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으려나. 내 안에서 우리는 같은 언어를 모어를 사용하고 있고 같은 시대적 배경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이기도 하지만, 같은 땅 아래서 살고 있는 사람도 우리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노력중이다. 그건 반드시 그래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그건 길들여지지 않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리 생각해야 하는 것. 
그래서 그 기준이 모어를 벗어나서 좀더 자유로워져서 그 기원이 모두 같다는 것까지 연결된다면 자신의 안에서 우리의 기준은 언젠가는 확장될지도 모르겠다.

그 이외에 기억에 남던 신화적 잔재는 예전에 모 방송에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특이한 행동에 대해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신화적 해석을 알려주고 있었다. 콩과 제비집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알고...  방송에서도 이런 부분을 다루어 주면 참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페이지를 넘겼다. 뭐 예나 지금이나 '죽음'에 대한 부분은 공포니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좀 서글퍼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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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한겨례출판
D양 집에서 모시고 온 책. 얼마전에 읽은 빅터 아저씨의 책도 D양의 신랑의 책이었으나 소인이 양도받음. 감사요. ^_^* 덕분에 박노자 선생님의 책은 최근에 나온 신간 이외에 전부 가지고 있게 되었다능. 한권은 친구 M씨의 집에서 아직도 있지만; 콜록.
박노자 선생이 노르웨이에 가서 살면서 느낀 것들이 메인인 책들. 9.11 인근의 시점까지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음. 가장 놀라웠던 것들은 뭐 다른 것들도 놀라움 투성이었지만, 9.11에 대한 주류(?)의 시각. 너무 놀라워서 몇번이고 다시 읽어봤으나 사실이라고 하니... 부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뭐 애시당초 비교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는 관계로.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음.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잘 강탈해가서 드시고 여전히 잘 드시고 그걸로 잘들 사시는 구나 하는 느낌.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지만, 그 배경에 '강탈' 혹은 '착취'나 '무시'가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의 결론.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부러웠습네다. 이럴때 해야하는 말은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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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 이철우, 북로드
던져버렸습네다. 별로 취향도 아니고... '심리학'에 대한 이야기 이긴 하지만, 주로 통계를 근거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관계로 본인의 주요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더군요. 얻어온 책이라서 그냥 보내드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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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내가 빅터 프랭클 교수의 책을 처음 본 것은 한 3년전 전으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를 읽고 난해해 했었다. 책의 광고 멘트와는 달리... 상당히 많은 문장의 구성이 이론적인 텍스트들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단순 명료한 그런 답을 찾고자 그 책을 펼쳤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뭐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잡았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아우슈비츠에서 생활을 2부는 그가 주장하는 이론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을 3부는 그 연장선상으로 비극속에서 낙관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와 있었다.
역시 1부를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솔제니찐의 <이반~>를 읽을때의 그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묘한 이질감. 레비 선생님의 책을 읽을때도 그랬지만, 그것이 분명히 있었던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 지금에 와서 <이반~>을 다시 읽으면 그때 느꼈던 '재미'가 지금에 와서는 '고통'으로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의 수용소도 생존률이 50% 미만이라고 모 책에서 읽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의 책이 소설이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것들을 담았다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부에서는 로고테라피 기법을 이용하여서 그들의 굴절된 부분을 역발상적으로 인지시켜 줌으로서 치료를 하는 예시들이 간간히 나오는데... 나는 그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그냥 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사고의 패턴이 생활 습관처럼 배여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 뭐 아직 3부까지 읽어본 것이 아니고 그리고 로고테라피 이론의 입문서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어떻게 생환했는지가 메인인 책을 봤으니까...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인간은 학살을 자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나 그런 잔혹한 공간에서 숭고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였다. 그래 그런 존재이기도 하지. 그런 사람은 아주 극소수겠지만. 그 공간에서 희망을 보는 그의 생각에 대해서 진중하게 탐독할 에정임. 뭐 그래서 다른 저작들도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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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돌베개
돌베게에서 나온 레비 선생님의 저작으로 <이것이 인간인가>와 세트로 보면 더 좋은 책 이었다. 개인적으로 <휴전>을 가장 읽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책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돌베개의 책을 사면 독자 엽서가 있어서 항상 다른 저작들도 번역해달라고 애독자 엽서를 보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는... 훌쩍
이 책은 레비 선생님이 아우슈비츠에 가기 전까지의 에피소드가 메인이다. 뒷 쪽에는 아우슈비츠의 에피소드도 조금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도 조금... 가장 기묘한 기분이었던건 <이것이~>에서도 읽었던 그 독일인 교수의 이야기 부분이었다. 독자인 나도 분명하게 불쾌해졌는데 이 양반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면... 누가 감히 '용서' '화해'라는 말을 꺼내는 걸까? 그런 단어들을 꺼내는 것은 그런 것들에 침범당해보지 않고 그런것들을 침범하는 군상이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감히 그런 텍스트들을 꺼내는 것인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염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기억을 지워도 분명히 어디 한구석에서 살아있다가 치밀어서 올라오는 부분일텐데. 개인적인 부분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나에게도 그런데 말이지 퍽이나 가능하겠어 그런것들이. 그 무지를 그 알려고 하지 않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건 역시 인간의 교만이 아닐련지... 아..아 정말이지. 치밀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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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병동>, 하하키기 호세이, 시공사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소설책이었습니다. 좀 울었습니다. 책의 앞부분은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현재가 만들어진 과거의 한 단편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른 세사람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는 '단편들이 모인 책?'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본 내용으로 가면서 그 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끝까지 읽고나서 다시 앞부분의 세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까 눈물이 나오더군요. 여러가지 의미로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해준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던 말은 병원에서는 우리들을 환자라는 대상으로만 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병원 밖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고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데 병원에 오면 그 '과거'는 사라진다는 그런 부분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은 여러 책에서도 많이 봤었는데요. 호세이 선생님의 잔잔한 묘사에 그부분이 더 크게 왔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인간'으로 대접받기를 희망하죠. 그게 어떤 상황이던 자기가 어떤 존재(사회에서 규정하는(가 되었던 그건 부분적인 것이고 본질적인 부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의 이력이 더 생겼을 따름. 그냥 좀 아픈 사람일 뿐이고, 좀 많이 아팠을 따름이고... 그런것들을 인정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편협한 시각은 극복하기가 참 어려워요. 편견이라는 것은 그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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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신>, 서경식, 창작과 비평사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고 두번째로 접하는 서경식 선생님의 미술에 관한 에세이 책이었습니다. 창작비평사의 책들을 읽다보면 외래어 표기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많이하게 됩니다. 2002년이면 그렇게 오래전도 아닌데... 서경식 선생님의 작품중에서 '프리모 레비'를 기리는 책도 <쁘리모 레비~~>로 시작하거든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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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서경식, 돌배개
'고통'을 담으려고 치열하게 살았던 예술가와 그 작품들 그리고 그 고통을 보면서 서경식 선생님이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더 가깝게 알게되었습니다. 사실 <청춘의 사신>은 좀 뭐랄까 작가에 대한 설명 때문인지 좀 지루하다는 느낌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서양미술~>쪽보다 약하다는 느낌이었는데요. <고뇌의 원근법>을 보면서 그런 느낌은 없었습니다. 역시 번역의 문제일련지... 책을 덮고나서도 오토 딕스의 작품들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고야의 판화 시리즈들을 처음 봤을때의 감각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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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국>

리뷰/텍스트 2009. 10. 13. 06:16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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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지배하는 사회 여자들의 성과 사랑
<결혼제국>, 우에노 치즈코, 노부타 사요코, 이매진 
우에노 치즈코라는 인지도 보다는 순전히 출판사와 제목때문에 보게된 책. 이매진의 책은 이전에 <오빠는 필요없다>를 봤었는데, 그때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책들도 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표지의 힘도 있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책을 읽은것 자체는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지만, 저자들의 태도는 너무 불편해서 그 표지만 봐도 짜증이 밀려나왔다.
그런 느낌이 들게했던 저자는 노부터 사요코씨 보다는 우에노 치즈코씨. 이 양반의 문제는 내려다보는 느낌이 지나치다 못해서 넘처 흘러서 매우 불쾌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은 그 사회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고 당사자들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그런것들은 아에 배제한 느낌이었다. 물론 아에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태도가... 뭘로 비교하는 것이 적당할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역시 교만한 엘리트. 그녀의 문체에서 내내 내가 받은 느낌(메시지)은(는)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너희들은 우민이다. 어리석은 보통(우민)들' 등등 이었다. 이 감각을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1장 서브프라임 매리지의 시대'의 머리글을 좀 지나서 부터였다. 그 다음도 계속 그러긴 했지만, 초장부터 그래서 가장 처음이 강렬했다면 강렬했던거 같다. 

딸을 살해하고 냉장고에 시체를 유기시킨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그 이후의 전개가 계속 그런 감각이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이 '이타적'이라고 못을 받는 부모들을 보면 짜증이 쏟구치지만, 그래도 저런 문체로 저런식으로 모든것을 쓰레기 취급(?)하는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의 흐름을 분석하기에 앞서서 당신들이 해야하는 일은 대안이나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2부에서는 그녀(우민)들의 명품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우에노씨의 시각은 그냥 그녀의 도덕주의에 입각해서 비난하는 시각 뿐 이었다. 하나 더 더하자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명품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도 했다. '당신은 미적 감각이라는 것이 없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서는 노부타씨의 방어도 재미있었고 자신은 그 우민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계속 해명하던 부분을 보고 있자니 실소가 나와서... -_-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도덕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타인을 비난하자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신이 누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윗 세대에서는 분명 '사치' 혹은 '허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적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 부분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의 생각에는 아에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뭐...
비싸서 사는 사람도 분명 있지만, 그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반해서 사는 사람도 분명히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었고 그리고 그건 노부타씨도 매한가지. OTL 그걸 그냥 튼튼해서 산다는 말을 하다니. 이건 충격이었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뭘 살때는 그 이유가 분명할텐데. 정말 그런 이유로 산다는 말인가. 이유는 분명 그것 말고도 더 있지만, 어쩐지 본인은 그런 이유를 모르는 것 같고 그걸 이유로 드는 것이 더 당연하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 같았다. 그건 그녀 안에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도덕주의'에 입각해서 아름다워서 좋아서 사는 것은 용납 혹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절대 틀리지 않다는 그 자신감에서 우려나온 문체. 그리고 그걸 잘(?) 살린거 같은 번역자분의 자상한 의도도. ㄱ- 아이 원츄. 번역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부분은 '종군위안부'를 사용한 그 부분에서 책을 집어던졌습니다. 헐. 저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그들이나 이걸 번역한 번역자 그리고 출판사의 편집자분도. 혹시 그녀의 그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극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주해도 없어서 그건 저 뒤 넘어로 넘겼습니다.  

그렇게 까고나서 당신들이 던질 답에 대해서 매우 궁금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책의 마지막까지 넘겨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냥 처절한 해부만 있었을 뿐. 그래서 매우 허무했던 책. 책의 표지나 본문의 도비라 디자인은 매우 취향이었음. 본문의 배치도 그랬고... 참 이쁘게 만든 책인데 읽고나서 이런 기분이 들어서 씁쓸했음. 
이 나라의 현실이나 일본의 현실이나 별다른 차이점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당신들이 그들에게 비난을 가하는 것은 역시 일본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구나 하는 생각. 종 차원에서 하는 우려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는 유감스러움. 당사자의 입장이나 당사자의 시각은 젼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슬픔. 물론 간간히 노부타씨가 그네들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변명(?)을 하긴 했지만, 그녀 또한 내려다보고 한심하게 여기는 시각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역활모델도 없고 대안도 없고 부모세대가 내세우는 가치관은 이중적이고 모든것들을 다 하도록 강요받는 가운데에서 올바로 서서 자기의 길을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그 나라의 미래를 종으로서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그런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과연 보통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분명한것은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혹은 부모에게 괴롭힘을 받는데도 그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나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대안이 없기에 그 집에서 그 자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걸 한심하다고 여기다니. 당신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보슈. 당신이 말하는 그대로 퍽이나 잘 살겠소. 누구는 과거에 살고 싶어서 이 환경에서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알다니. 

자존감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도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음.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부분이 크게 결여되어있어서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그런것들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내내 <셔플리>가 생각이 났음. 몇 권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이 흘러가는 강에서 뭔가 기둥을 잡고 늘어지는 그 감각과 비슷하다면 비슷해서인가 아니면 그녀들이 말하는 그녀들이 바로 <셔플리>의 그녀들이라서 그런거 같기도 했고, 뭐 이건 <셔플리>를 다시 봐야지 알 수 있을거 같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부분까지 못올라가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그걸 알려주고 대안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당신들의 의무가 아닌지. 특히나 노부타씨. 모든 임상심리사는 아니겠지만, 저런 시각으로 내담자를 바라보는 임상 심리사가 있다는 것도 이쪽에서는 매우 충격아닌 충격이었음. 
그런 모든 것들은 내려다 보면서 이야기 할 것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유감인 태도로 그리고 가슴 아파하는 태도로 이야기 해도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인데. 당신들에게는 참 쉬워서. 이쪽도 매우 유감. 하아.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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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죽어감>

리뷰/텍스트 2009. 10. 9. 12:23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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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대표적 저작으로 많은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이었다. 읽으면서 이 책을 좀더 읽찍 일었다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장 컸었다. 시아버지가 아프실때 그분의 말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라서 많이 당황했었고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분이 어떤 감정들을 느끼셨고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들을 하셨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의 단계는 5단계로 분류되며, 제 1단계는 부정과 고립, 제 2단계는 분노, 제 3단계는 협상, 제 4단계는 우울, 제 5단계는 수용이라고 이 책에는 나와있었다. 각 단계마다 자신의 경험과 시한부 환자들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분들이 죽음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구성이었음. 아래의 인용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한 아저씨의 이야기.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부인에 대한 분노에 대한 그들의 답변이다.

우리는 그에게, 그의복잡한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그에게 다음번에 만날 때 부인에 대해 느끼는 분노에 대해 애기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면 창밖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고통은 아마도 모든 분노와 좌절감을 안으로 삼켜서 생긴 걸 거예요. 망설이지 말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세요. 그러면 아마 고통이 사라질 거예요."라고 대답해주었다. 

시아버지의 경우에는 병의 진행이 빨랐기 때문에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올라오셨던거 같은데, 내가 느끼기에는 우울의 증상이 가장 큰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여러 책들을 보면 환자들에게 우울증 약을 투여해서 좋은 결과들을 많이 봤었는데 이 나라의 병원 시스템에서는 그런 처방이 있는지 없는지가 궁금해졌다. 물론 그분의 상태때문에 그런 약들을 처방하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지만, 역시 질병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나의 결론. 
'그렇게 급격하게 몸에 커져간다면, 3달에 한번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이라도 검사를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혹시 그 3달이라는 것은 의료보험에서 기준한 기준에 의거해서 3달에 한번씩 검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엘리자베스 교수님은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가장 큰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었고, 그들은 대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좀더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것들을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가장 컸었다. 책에서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환자 자신이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가족들이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였다. 나 자신도 그러했기에.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좋아지실 거라는 말을 반복했었다. 
<죽음과 죽어감>은 환자 자신과 그리고 주의사람들에게 그리고 의료계통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상실수업>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책. 
그래도 이 나라는 제사라는 것이 있어서 가족들이 먼저 보낸 사람들을 함께 기억하는 공간이 존재해서 매우 다행이라고 느꼈다. 나는 사실 제사에 참석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이런것들을 느끼게 되었다. 먼저 간 가족에 대해서 가족간에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니고 그런것들이 매우 어려운데 제사라는 상징화된 공간에서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다른 가족들을 보는것이 서로간에 큰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것들을 공론화해서 고통을 나누고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물론 제사가 그런 의미로 상징화 되어서 좋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주체에 대해서는 형평성 있게 일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별에 따라서 누구는 어디를 가도 주체가 되고 누구는 어디를 가던 주체가 아니라면 그건 얼마나 가혹한 처사인가. 물론 그런 것들은 그냥 상징으로 남은 부분이라고 하겠지만, 민감한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기도하고. -_-
그리고 개신교의 시스템의 장점에 대해서 매우 잘 알게되었고, 목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지도... 여튼 그래서 여러가지를 얻게된 책. 그래서 나의 그녀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음. 힘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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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수업>

리뷰/텍스트 2009. 10. 5. 15:42 by dung
*
<상실수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이레 
엘리자베스 여사님의 책을 몰라서 사둔걸 이제야 꺼내서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인생수업>, <상실수업>,<생의 수레바퀴>,  <사후생>은 독서를 완료했습니다. 지금 읽는 책은 <죽음과 죽어감>입니다.  사실 저는 가장 유명한 <인생수업>을 먼저 읽은게 아니라 우연히 시한부 인생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담은 <죽는날까지...>를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게되었고 그래서 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고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는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막상 책을 사고 드리려고 하는데 이게 잘하는 건지 잘 몰라서 읽어보고 드리려고 생각하고 차일 피일 미루다가... 반년이나 숙성(?)후에 읽게되었는데요. 정말 좋습니다. 주위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은 도서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특히 <상실수업>이 특효 처방전 이었습니다. <인생수업>도 좋았지만요. 

사랑하는 이가 죽어서 느끼는 상실의 분노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해당이 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나 이 파트는 슬픔도 포함되는 파트라고 생각이 들었고, 여러가지로 다른 의미의 상실도 그렇고... 저의 경우에는 이 책이 정말 큰 지지가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추천한 매우 쩌는(표현이 이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저의 실망감을 표현할만한 단어는 저런 느낌의 단어 이외에는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개신교가 절대 진리라는 가치관으로 도배된 모 정신과 교수의 책보다는 만배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뭐 원저가 오래전에 출판되었다고 하지만, 뭐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던져버린 관계로 후속편도 볼 생각이 없습니다. 다른분들이 끝까지 보시면 그래도 좋다는데 전혀 그러고 싶지 않을 정도였어요. 이런 책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더 충격적이에요. -_-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이 책은 특정 종교의 종교인(개신교도)으로서 느끼는 그 교만함(선택되었다는 느낌이나 진리라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고로 개신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기에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종교인이나 불교인이나 모두에게. 진정한 의미의 진리(?)라면 이런 전달능력을 갖춘 책이 아닐까 싶어요. 뭐 비아냥 거리는 건 그만해야지요. 아휴. 그래도 말하고나니 속시원. OTL

자신의 분노는 강도나 정도는 어느정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의 기준으로(유교적 가치관) 잣대를 잰다면, 매우 배척받는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그 말은 그야말로  명언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라니. 스스로가 분노하면서도 주입된 가치관에 의해서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 패턴을 솔직히 멈추기가 참 힘들어요. 그걸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두요.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 조차 죄책감을 느끼도록 교육받았으니까요. 
분노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혹은 용납하지 못하는 기분이란. 낄낄. -_- 경험하지 않고는 모르리라. 자신에게 살의가 치민다는 건 정말 치명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노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분노를 바라보고 분노를 알아주고 스스로를 도닥이고...  결론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보살피라는 말이 아닌가. 
이 사회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제도권에서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그걸 스스로 습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도권이라는건 교육과 가정 모두 포함) 이 나라에서 살면서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습니다. 퍽이나 사랑하겠네요. 그렇다고해도 표현하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다가 써먹을라우? 

+
그나저나 이레 출판사는 <인생수업> 표지를 그렇게 만들어서 선입견으로 보지 않는 사람까지 만들었다니. -_-아 짜증남. 뭐 그녀의 대부분의 책을 내줬고, 번역도 매우 좋아서 읽으면서 매우 기뻐했지만 역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것대로 화가나는 건 참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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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수레바퀴>

리뷰/텍스트 2009. 9. 29. 22:40 by dung
<생의 수레바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황금부엉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교수가 남긴 유일한 자서전인 <생의 수레바퀴>를 보면서 뭐랄까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책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와 2부격에 해당되는 부분에서는 중간에 좀 울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3부를 읽다가 좀... 우주로 가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요? 저자가 죽음에 대해서 지켜보고 연구하다보니 죽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암사체험)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뭐 이때까지는 좋았어요. '음. 그렇게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넘어가니까 매우 사이비틱한 모 부부가 나오면서, 그 부부중의 남자쪽이  영혼을 물질화를 하는 능력이 있고 그의 힘을 빌려서그 영들과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메세지는 매우 상징적이고, 저자 주관에는 그들이라는 존재가 저자의 여러가지 생각들을 사고의 폭을 넓혀주거나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만, 소인이 보기에는 그냥 사이비;; 로 보였습니다. OTL
유명한 모 학자의 기계로 유체 이탈을 경험해보고 그 후에는 스스로도 몇번이나 그걸 경험해보고... 그리고 우주에서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간 느낌으로 그 사이비틱한 부부가 물질화를 해서 보여줬던 두 영들과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의 존재를 그리워했는데 상반신만 나타나서 대화를 했다던가;;; 저의 능력에는 수용 불가능 하더군요. 좀 뭐랄까 허탈한 느낌의 웃음이 나오는 감각이라고 해야하나요? 뭐 그랬어요. 
그래서 3부를 보면서 매우 실망했었습니다. 그게 4부로 넘어가면서 좀 위로 올라더군요. 좋은쪽 방향으로요. 4부에서는 그런 영적인 영역(?)에서 좀 넘어가서 다시 현실세계로 내려온 감각이었습니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서 센타를 설립할려고 한다고 인터뷰를 했더니 온 동네 사람들에게 협박당했지만, 그녀는 그녀의 신념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부분이나, 자신의 병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좋았습니다. 
전반부(1부, 2부)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2차 대전 이후에 자원 봉사를 다니면서 인간의 참혹성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 그리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분노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의식 개선을 위해서 세미나를 열고 환자 개개인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들, 병에 대해서 긍정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뭐 사실 저는 종교인이 아니고, 주위에 계신 개신교 신자분들의 귀신에 대한 이야기(영적존재에 대한 이야기. 귀신도 영적 존재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책에서는 귀신이라는 말은 없고 영적 존재라고만 언급하더군요.)에 황당해 하는 것이 저인지라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특히 영을 물질화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좀... 암사체험까지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요. 요정의 존재라던가. ~_~;; OTL 요정의 존재에 대한 부분은 애니메이션 '백작과 요정'이 생각났어요. ㅜ_ㅠ 매우 울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아 선생님;;; 
뭐 좋은 건 좋은걸로 남기고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그냥 숙제로 남기거나 뭐 저런 경험도 있을 수도 있다(? 이것 조차 어렵군요.)라고 생각은 못하겠고... 그냥 뭐 저쪽에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의 느낌이 어떤지 넷서핑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사후생>에서도 이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먼가 3부를 읽으면서 <인생수업>과 <상실수업>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 부분은 전에 한양대에서 만났던 3차원과 전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던 분이 딱 떠올랐습니다. 아하하하. 


그나저나 이미지를 찾으면서 보니까 개정판이 나왔어요. 게다가 표지도 매우 이쁨. ㅠ_ㅠ; 초판본에서 정체를 알 수없는 초현실주의 풍 일러스트는 정말 아니다 싶었거든요. 본문의 나비를 모티브로 한 디자인이랑도 거리가 멀었구요. 쳇.-3- 좀더 늦게 살껄 그랬나봐요. 후회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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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의 심리학>

리뷰/텍스트 2009. 8. 18. 19:53 by dung
*
<IF의 심리학>, 닐 로즈, 21세기북스
흥미롭게 읽은 책. '사후가정사고'의 종류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으며... 본인이 사후가정사고의 2가지 종류중에서 어느쪽을 더 많이 하고 있는지도 알게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식(나에게는)으로 인식하고 있던 부분이 바뀌었다는 것. 대충 뭐 그런 격언들 말이다.' 후회하지말고 지금을 살아라'라던가 그런것들. -_-
덕분에(?) 후회하고 그 격언이 생각나서 더더욱 후회에 빠지는 패턴이 매우 많았었다. 우후후후. 책에서는 후회는 꼭 필요한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후가정사고중에서 어떤쪽으로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재미있던 책. 번역자의 말에서 미국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부분을 번역하기가 아주 어려웠다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무리는 없었다. 즉 번역이 좋았다는 이야기.
부담없이 즐겁게 읽기에 좋은 책. 자신이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더 많이 후회하는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더 많이 후회하는지 알고 싶다면... 보시기를 추천.
아래는 책을 읽다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이다. 읽으면서 매우 미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결론을 내림. 쩝. 인간이란...

사회심리학자들은 피해자의 불행에 대해사람들이 피해자를 비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이 경향은 '공정한 세상의 가설'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심리적 면역체계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합리화의 한 형식이다. 즉 감정으로 상처받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고양적(자기만족적) 방식으로 세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 어떤 무고한 사람(아마도 우리 자신과 비슷한)에게 일어난다면 우리에게도 그 동일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세상은 일반적으로 정의롭고 대부분 공정하다"라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암묵적인 전제에 위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공정'이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피해자를 비난한다. 다시 말해 희생자의 결점을 찾아내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피해자를 구분짓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 나쁜 후회, 피해자 비난하기, p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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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은 읽고 바로...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_=;; 기억이 잘... O>-< 우어어어어.

+
<여자의 심리학>, 배르벨 바르데츠키, 북폴리오
사실 제목이나 표지의 느낌(내가 샀을 시절의 표지는 저 옆의 표지가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책.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주위에게 추천하는 도서가 되었다능. 발간할때 영화랑 같이 이벤트도 했다던데 조용히 사라졌던 책이라고 모님이 이야기 해주셨음. 아무래도 책의 제목의 문제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다. -_-a
책은 '나르시즘 인격장애'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이 범주안에는 폭식증, 거식증 이런 유형의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의 성격의 분류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한다. 나는 사실 이 말(나르시즘 인격장애)을 처음 들어봤다. 최근 교양 수업을 하면서 이상심리학에서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본 기억이 있어서 그건가 했더니 좀 다른 범주였다. 깊이 들어가면 저변에 깔린 바탕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뭐 다른걸 넘어가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담자들의 자기의 치료의 경험에 대해서 스스로 적은 부분'이라고 해야겠다. 개개인의 문제에 대해서 치료를 하면서 자신이 바라보고 개선하고 노력했던 것들을 축약해서 적은 부분인데 이것이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남는다. 
그 외에는... 책을 읽은지가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_=;;; 나도 참;;;

+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서경식, 철수와 영희
좋아하는 서경식 선생님의 책. 매우 끄덕이면서 읽었지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부분'이었다. 선생님은 이 나라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매우 간과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악당'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나에게는) 거이 없었다. 
오히려 매체에서 그 나라에 대해서 신성시 혹은 이미지화(우월한 국가)에 대한 글들 또는 주장들만 봤었는데, 내가 반대되는 글들을 보지 못했다는 건가? 주류 매체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있으며 반대쪽은 악당으로 몰아갔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난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간에 '악당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가 이 나라의 사람들 다수에게 있다면, 그건 그 국가가 지금 하는 행동 그 자체라기 보다는 이 나라에서 개신교에 대한 거부감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미국에서 그네 나라의 상징인 건물이 불탈때 언론에서 말하는 내용과 반대의 입장의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간 저렇게 될 줄 알았지만, 저정도 일줄이야. 그들의 한이 크긴 컸구나. 그렇다고 해서 저걸 용인하거나 용납할 수는 없지만, 저런식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뭐 그런 생각들을 했던거 같다. 
선생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던걸로 기억하지만(아마도) 그래도 그 사람들이 그 나라에서 주류라면, 반대의 의견에 힘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냥 따라가는 사람들에 대한 면죄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몰랐다', '무지했다', '살기가 힘들어서...', '어쩔수 없었다' 등등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염치 없는 인간이 아닐까 싶다. 고말을 그대로 당신들에게 돌려준다면... 당신들은 뭐라고 말할까? 당신들은 '유감이다'라는 말을 듣고싶은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민'으로서 누리고 있다면 '그 국민으로서 책임'도 인지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런것을 가르쳐 주는 주는 공간이나 매체는 본 기억이 없는것 같다. 물론 그 책임의 다른 범주의 교육은 열심히 받았지만 말이다. ~_~
만약 이 나라에서 파병한 군인들 때문에 피해를 본 국가의 사람이 와서 '너네 나라는  #@$@#@#@??!!!'라고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죄송하다는 말 이외에 달리 생각나는 말도 없다. 상대방이 죄송하다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그거야 말로 진정 안도(혹은 감사)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
<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 권혁범, 김기중, 박노자, 김은실, 권인숙, 유명기, 김근, 김진호, 전진삼, 문부식, 삼인
사고 보니 당대비평 특별호 이었다. 여는 글인 임지현 선생님의 글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줬다. 읽다가 몰랐던 부분도 많았고... 특히나 권혁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오잉? 하고 말이다. 그외에 뭔가 생각했던 것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 -_=;;; 하아.
더하자면 권혁범 선생님의 책을 사볼 예정이다. 이전부터 사보고 싶었지만 글을 보고 사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보고 싶다는 건 임지현 선생님쪽이 더 강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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