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어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잡았습니다. 과연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저는 냉정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까가 가장 고민이었습니다. 3페이지정도 넘겼을 무렵…….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이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밥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로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 여행, p15,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그는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것이 현실임을 그곳으로 가기 전에 확인하듯. 그는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텍스트를 받아드리는 인간들의 방어적 구조를. 그는 그렇게 질문을 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분노도 오열도 아닌 뭔가 좀 더 다른 감각. 매우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 미묘한 신경쓰임의 이유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자신과 마주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가 그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그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 "이것이 인간인가?"앞에서 저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 철저하게 타자화하여 마치 그건 현실이 아닌 가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그 감각으로 그의 텍스트들을 익숙하게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감각은 일전에도 느꼈던 수많은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느끼던 그것. 하지만 저는 그때는 생각하기를 멈추었습니다. 어쩐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것이 저를 멈추게 했었던 거 같습니다.
2007/09/07 02:08에 책에서 보고 멈추었던 그 글.
포스팅 제목은 '고통의 망각과 텍스트의 중독'. 저는 그렇게 정의하고 멈추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카메라의 눈앞에 노출되지 않는 고통이란 없는 듯 하고, 다시 우리는 미디어가 펼쳐내는 이 고통의 이미지들의 과잉 앞에 노출된다.
정지영상이나 동영상에 덧씌워지곤 하는 모자이크는 오히려 이 고통의 스펙터클을 더 사실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그 이미지 속에 재현되고 있는 고통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와 시공간을 같이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정작 고통 자체는 증발되고 사라진다. 우선 고통의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충격의 효과들은 그 자체로서도 단명할 뿐 아니라, 상업주의 매체들이 유발하는 끝없는 자극의 인플레로 인해, 하나의 고통이 이미지가 유발하는 충격과 자극은 곧이어 또 다른 고통의 이미지에 의해 쉽게 상쇄되기 때문이다.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고통, 그것도 타인의 고통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의 스펙터클의 외설성 그 자체에 있다. 투명함, 황홀경, 외설 등의 모든 것이 지수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포화 속에서 보드리야르는 역사, 정치, 성, 주관성, 육체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에 주목했다. 고통 역시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사라진다. 살을 에[는 체험으로서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동정과 공유는 이미지 속에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현되는 고통 역시 그 실체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탈)현대사회의 대중매체에서 맥락에서 탈각된 이미지들은 몽타주 속에서 고통 역시 파편화되며, 그 고통을 유발한 사회적 관계망은 이미지들의 연쇄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그 결과 고통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개인적 불행의 일회성 이미지들, 자신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상실한 고통의 이미지 덩어리로 간락한다. 나아가 고통의 이미지들뿐 아니라 고통 자체가 그렇게 된다. 사진의 발명 이래 시각 이미지는 최고의 존재증명으로 군림해왔고, 이제 21세기의 시각 이미지들은 인간의 눈에는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하다. "여기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는 이 이미지들의 극사실주의는 고통과 관련된 반성적 사유를 봉쇄해버리가 십상이다.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스스로를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매혹은 더 이상 생산의 양식이 아니라 사라짐의 양식이다. 그 매혹이 고통에의 그 아슬아슬한 매혹이라 하더라도.
-고통의 스펙터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주은우, 167p~168p,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이 감각은 결코 낯설지 않았습니다. 눈치 챘지만 멈추었던 그때의 감각. 더 오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솔제니찐의 그의 인생을 걸었던 작품. <이반데소비치의 하루>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던 저의 감각과 인정하기 싫지만 매우 흡사했습니다.
이건 자신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방법인가? 아니면 인간이라서 인간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의 방어적 구조인 보호장치인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멈추어야 했지만 곧 다시 저의 타자화에 대해서 알아버렸습니다.
그런 인간다움을 간직한 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고통을 당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기 시작했고 또다든 그들의 고통에 휩싸여서 그들의 고통을 역사의 기억의 조각으로 넘겼었습니다. 그들이나 또 다른 사람들 모두를 철저하게 타자와 할 수 없는 것이 저 자신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정의하는 개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타자화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그 감각으로.
강요되는 그 민족으로 정의 되는 정서. 강요되는 우리라는 정서. 그 저변은 우리가족이라는 정서…….
우리가족의 혹자는 우리의 이익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터인더. 언제나 타자화로 마무리하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피투성이 저의 손, 저 자신의 상처와 타자의 상처는 보이지만-정녕 보이는 것인가?- 멈출 수 없다.?"라는 정당화로 마무리되는 방어적 구조.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니.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정녕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싶은 겁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딘가에 있는 당신은 희망이 있다고 흐느적흐느적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당최 이런 것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행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작은 노력에 희망을……." 그건 방어적 구조에 불가한일지도. 스스로 존재를 앞으로 이어가기 위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민폐는 계속된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동안. 이런데도 앞으로 나아가야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을 용기도 없는 것이 여기에 서있는 저. 다행인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