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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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저의 선생님이 추천하시면서 빌려준 관계로 읽었습니다. 아마 아버님이 아프지 않으셨다면, 이런 책을 읽는 저는 상상 할 수도 없었어요. 책을 읽은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라면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어요. 특히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자식을 용서하셨습니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때때로 가슴이 저리고 아파져오지만, 자식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여전합니다. 원망 같은 것은 더구나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가슴속에 박힌 굵은 못은 그대로입니다. 그 못을 빼 드리는 것은 오직 자식만이 할 수 있는 일, 진심으로 사죄하고 눈물로 씻어드려야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눈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 백 번이라도 눈물을 쏟아 그 못을 녹여내야 합니다."라고 하는 부분이었어요.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랑이랑도 최근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지만, 나이의 문제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면서 형성된 기준들이 달라서 그런지 몰라도 보고 느끼는 면이 상당히 다르거든요. 저는 사실 부모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편이에요. 지금 현재 상황은 부모님은 연로하셔서 저와 남동생에게 좀 더 많은 관심과 애정표현을 원하시지만, 사실 그런 표현들을 하면서 자라지를 않았고 어느 날부터 그런 것들을 요구하시는 게 많이 당황이되요. 그리고 관계가 정말 원만하지 않아서 대화를 하다 보면 한쪽이 폭발하거나 함께 폭발해서 *#$#$%^#$가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도 함께 산다면 그런 나날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뭐 지금은 함께 살지 않는 관계로 그런 건 좀 덜해진거 같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힘들다는 것이 지금의 솔직한 상황이에요.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생각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그게 정말 어려워요. 부모님과 접하는 매 상황이 과거와 연계가 되기 때문에 정말 우울해집니다. 그 과거들로 인해서 분노를 느끼고 좌절을 하고 비탄에 젖어 있을 때가 잦아요. 저의 상태가 그런데, 전화를 하던 만나던 듣는 건 비난이거나 행간 메시지로 원망이 섞여있어서 더 힘들어요.

책에서는 "부모님은 나이를 먹어가시고...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해주더라고요. 그냥 그대로 부모님을 보낸 많은 사람의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그냥 요즘 들어서 느끼는건 부모님이 많이 약해지셨다는 것.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요구들이 생기셨고 그걸 간절하게 바라신다는 거에요. 마음이 아프죠. 해드리기 여려우니까요. 그렇지만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화도 나요. 이게 저의 상태죠. 신랑은 어느 시점이 되면 과거의 그것들이 그대로 거기에 있고 그것들이 해결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되는 거는 아니지만, 그냥 그것들로 말미암아서 받는 고통이 줄어들고 다른 것들이 더 보이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그랬다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서 조금씩 들고 있어요. 그냥 모두가 피해자 인 거고 그러면서 동시에 가해자 이기도 한 거니까요. 그래서 힘들다는 걸 이제야 좀 알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어요. 특히나 여전히 노력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 태도가요. 그게 최선이라고 믿어버리는 그 태도가 저를 정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몰아가거든요. 한치의 후회도 없는 그 태도들이 절 정말 절망스럽게 만들었었어요. 그냥 그렇게 자라오셨고 그런 것들만 보셔서 상처가 많으시고 그 상처들이 있는데 그게 상처인지도 모르고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셨다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래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범주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요. 그건 정말 잘못된 거고 그걸 대물림하는 그런 건 정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잘못을 저의 대에서 끊으려고 저는 공부하는 거지만, 아직도 그런것들에 대해서 부모님과 이야기 하지 않고 있어요. 대화가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저를 위해서 더 절실하게. 그렇지만, 최소한으로 서로 충돌하거나 상처 없이 이야기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뭐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분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면서 그렇지만 저에게는 그랬다고 말하는건 힘들어요. 그래도 결혼하고나니까 더 보이는 것들이 더 생겼어요. 다행일까요? 하여튼 계시는 동안이라도 그분들이 받은 상처들을 이해하고 과거를 졸업하고 감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대를 끊는다는 건 그런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내 자식뿐만 아니라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요. 어려워요. 정말. 신랑의 말대도 그건 그대로 거기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희망합니다. 좀 더 어른이 되는 걸까요? 과거는 과거고 현재의 나는 나이고 과거로 힘들었었고 나는 좋아지기자 노력하는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노력해야죠.

책에서 이야기하는 49가지는요. 좋아하는 것 챙겨드리기, 목숨 걸고 용돈 드리기, 그 가슴에 내가 박은 못 뽑아드리기, 엄마 앞에서 어리광 피우기, 전화 자주 걸기(가능하면 하루 한 번씩),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기, 마음이 들어 있는 건강식품 챙겨드리기, 부모님의 일대기 만들어드리기, 부모님의 종교 행사에 참가하기, 부모님 손에 내 손을 마주 대보기, 내가 축하받는 자리에 부모님 모시기, 노화 스트레스 덜어드리기, 체온으로 다가가기, 생신은 꼭 챙겨드리기, '나중에'가 아니고 '지금'하기, 맛있게 먹고 "더 주세요!"말하기, 부모님과 블루스 추기, 인생 9단인 부모님께 여쭈어보기, 열심히 모아서 감동 드리기, 미장원에 함께 가기, 무조건 '잘 된다'고 말씀드리기, 못 이룬 꿈 이루어드리기, 학교나 회사 구경시켜드리기, 부모님이랑 노래 불러보기, 부모님 건강이 최고, 자식 옷 한벌 살 때 부모님 옷도 한벌 사기, 아버지와 포장마차에 함께 가기, 고마우신 부모님상 감사장 만들어드리기, 부모님도 한때 사랑받던 자식이었음을 기억하기, 부모의 유산 이어가기, 어릴 적 나에 대한 부모님의 꿈 들어보기, 부모님의 젋은 시절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드리기, 때로는 착한 거짓말하기, 홀로되신 부모님께 친구 만들어드리기, 소문난 맛집에 모시고 가기, 아버지 삶의 낙을 찾아드리기, 결정하기 전에 여쭈어보기, 실용적인 생활 방편 마련해드리기, 노부모와의 대화법 익히기, 하루라도 건강하실 때 모시고 여행 다니기, 함께 공연 보러 가기, 건강 프로그램 만들어드리기, 곁에 있어드리기, 부모님 댁에 들를 때마다 구석구석 살펴드리기, 부모님 몰래 윤달에 수의 마련하기와 묘자리 준비하기...이었어요.
책은 부모님께 해야하는 49가지를 고도원씨가 독자들이 보내준 사연을 뽑아서 정리한 것이었어요. 아침편지라는건 잡지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특히나 공감했던건 미용실에 함께 갈것. 그리고 다른 것들은 용돈 드리기. 사랑한다고 말로 표현하기. 함께 공연 보러 가기. 부모님 일대기 만들어 들이기. 노화 스트레스 덜어드리기 등등 이었요. 이번 주말에 엄마 생신인데요. 아침편지에 나온 "어릴 적 나에 대한 부모님의 꿈 들어보기"를 해볼려고요. 궁금해요. 그래서 이번 엄마 생신에는 엄마 더 예뻐지시라고 화장품을 사봤습니다. 좋아하시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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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위한 기도

리뷰/텍스트 2009. 1. 1. 18:21 by dung
오 주여,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의 젋은 애국자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용사들이 전장으로 나아가나이다 이들과 함께하소서!
우리의 영혼도 이들과 함께 나아갑니다. 따스한 난롯가의 단란한 평화를 뒤로하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찟어 피 흘리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천둥 같은 총성을 저들의 부상병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내지르는 비명 속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가지없이 떠돌게 하소서.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겨울에는 삶을 에는 한풍에 노리개게 되어 영혼은 찢기고 노고에 지친 몸으로 헤매게 하소서.
주님께 안실할 무덤을 간구하더라도 거절하시고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저들의 소망을 산산히 날려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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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님의 책과 제목이 비슷해서 착각했던 책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를 읽었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간디에 대한 불편한 진실과 킬링필드에 관한 진실이었습니다. 어릴적이 보면서 충격받았던 영화 킬링필드. 그 이면의 진실에 대해서요. 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요. 역시 였습니다. 뭐 이제는 실소할 기운도 없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일까요. 저자신에게도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올바른 길을 간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눈앞의 자신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건 인간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본능인가 아니면 본능으로 치부하는 나태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는 진실을 일부 보여주기는 했지만, 더 큰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영화였으니 그 목적은 충실히 달성한거 같습니다.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모르고 있었겠죠. 뭐 다른 것들을 통해서 진실을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더 먼 훗날이 되지 않았으려나 싶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기안의 모순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것들에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신성화하는 것들에 대한 이면의 다른 부분을 봤을때 그 좌절이 크지 않습니다. "역시나 또 그렇구나."라는 느낌입니다. 절망적인걸까요? 그래서 킬링필드 다음은 뭐가 될지 정말이지 너무나도 궁금합니다.
뭐 어떤 매체이던간에 만든 사람의 가치관과 시점으로 바라보아지기 때문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것이라는 것은 존재할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하고 싶은 것들은 있습니다. 뭐 적어도 저에게는 그런데요. 그 '긍지'가 가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런것들에 대해서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란건지 궁금합니다. 영화 제작의 동기라던가 제작자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기억하건데 영화가 저에게 전달하는 느낌은 치열했고 그리고 진실을 기억해달라는 메세지가 담겨있었는데요. '그 진실'은 무엇을 토대로 재생된건지 알고 싶어졌어요. 그냥 영화 '삼나무의 내리는 눈'과 같은 시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알고 싶습니다. 그는 무엇을 느끼고 영화를 만들었지요.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가 중 일부가 떠올랐습니다. 처음 이 시(이때는 시로 알고 있었어요)를 본건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인용 부분이었어요. 돌배게에서 전문이 실린 동화책(?)이 나온걸 알고 사서 읽고 울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기도는 그런거였다는걸 너무 처참하게 알려주는 동화였습니다. 저 자신이 살아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서도 공존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데도 언제나 마음은 공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의 의미가 아닌 상호 공존을 상상하곤 합니다.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하는데도 계속해서 생각해요. 그건 꿈속에서도 보기 힘든 꿈인데도 말이죠. 망상속에서만 존재하는 공존. 그래도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생각하는것이 위안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저는 잘 지내고 싶어요. 그렇지 못한 자신의 마음도 존재하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싶어하는게 본심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왔던 발리가 생각났어요. 그 사람들의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네덜란드를 손님으로 받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서요. 가장 중요한것들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건 가능할까요? 점점 물질만능에 눈멀어가는 우리네들을 보고있다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귀가 의심스러워졌습니다. 아직도 긴가 민가하고 있구요. 잘못 느낀건 아닌건지 잘 모르겠지만, 알고싶은것들이 좀더 많아 졌습니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좀더 알고 싶어졌어요. 비슷한 경험을 해온 당신들의 이야기를요. 아시아의 근 현대사에 대해서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 해주시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만천하에 드러난 크메르루주 쪽 학살 주범 폴 포트와 달리 미국 쪽 학살 주범은 누구였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모든 관련자들이 '최고 명령권자'로 지목했던 사람은 닉슨 대통령이었고, 그 닉슨을 보좌했던 인물이 바로 헨리 키신저 안보고문이었다.
"베트콩들이 남부 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 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주물렀던 헨리 키신저가 강조한 캄보디아 비밀폭격 논리였다.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캄보디아에 거점을 차린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다."
이건 1973년 들어 결국 캄보디아 비밀폭격을 눈치챈 의회가 공습을 중단하라며 난리를 치자, 키신저가 맞받아쳤던 말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60만-80만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들이 베트콩이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결론이 난다. ......"부수적인 일." 60만-80만 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양민을 학살하고도 미국은 전쟁에 따른 피치 못할 일들이라고 정의했다. 걸프전과 경제봉쇄로 100만 명에 이르는 아이들이 숨진 이라크 사태를 향해서도, 오폭을 4,000명이 넘는 시민들을 살해한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도 미국은 똑같은 목소리로 "부수적인 일"임을 강조했다. 미국식 정의만 있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미국식 킬링필드를 지우려는 캄보디아 학살재판, 그래도 이 학살재판을 인정할 것인가? 그래도 킬링필드 전설을 따라 감동적인 눈물을 흘릴 것인가?
현대사의 최고, 최대 거짓말인 이 미국식 킬링필드 전설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마롤, 앞으로 더 이상 세계 시민사회가 미국으로부터 '개죽음'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경고다.
- '킬링필드'의 전설을 끊는다, p57




아시아네트워크  http://asianetwork.co.kr/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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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준비 없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경우에는 못 다한 일들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야말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겪어야 할 가장 큰 고통이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내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면 우리는 엄청난 분노와 회한, 슬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그런 감정들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
- p86


표지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던 책이기도 했고 그리고 아버님 때문에 근래에는 이런 부류의 책들에 흥미가 많아졌는데 역시 도서관에서 신간코너에서 발견하고 빌린책 입니다. <인생수업>, <상실수업>, <죽음 죽어감> 그리고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중에서 뭘 먼저 사서 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사기전에 먼저 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구매 예정인 책은 <죽음 죽어감>이 먼저일거 같아요. 책은 시원스러운 판형이었는데(163*217) 본문 역시도 시원했습니다. 읽는데도 부담 없었고 사진들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는 구조였습니다.

표지에 나온 사람은 42세에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베스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담담함이 본문에 있는 사진들에서도 얼핏얼핏 보였습니다. 책을 보면서 느낀것들은 시한부를 받은 당사자들보다 주위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더 인정하려 하지 않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모습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주말마다 시아버님을 뵈러가지만, 아버님이 때때로 하시는 체념의 대화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이 보고 자라온 가치관 대로 저는 대답을 하고 있지만, 그런 대답을 하는 사람은 가족 구성원 중에서 저 뿐입니다. 이게 잘하는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다른 분들이 잘 하고 있는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고통에 대해서 공감해줘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드려야 하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려워요. 좋아하는 선생님과도 이야기 해봤는데요. 저의 능력을 살려서 지금까지 아버님이 걸어오신 길을 책으로 만들어보는 것이 정말 그분께 힘이 될꺼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구도 그랬구요. 뭔가 하기는 해야하는데... 답답해요. 그런걸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해도 되는건지도 자신이 없구요. 엘리자베스 퀴슬러 로스 교수의 책들을 다 보면 먼가 더 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존재에 대한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한건 친우 ㅊ선생과 한 대화와 그리고 좋아하는 동생 D양의 할아버지의 이야기 정도인거 같습니다. ㅊ선생의 상실에 대해서 정말 어느정도인지 절실하지 못해서 어느정도인지 물어봤더니 저의 동생정도라고 말해줬습니다. 듣는 순간... 저는 전화기를 던지고 화장실로 직행; 이때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심했거든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패닉상태. 하아. 상상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니요. 그런건... 살아있는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되는 존재인데. 함께 살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모두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버님도 신랑도 어머님도 도련님도 그리고 저 자신도.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책 판형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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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신의 무지와 지금까지의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잡은 책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를 보다가 그만 울었습니다. 핼쑥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감추어진 옷속에 있는 그의 몸은 얼마나 앙상한지 짐작이 되는 이유는, 지금 투병중이신 아버님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보여지는 모습을 짐작컨데 얼마나 힘들게 움직여왔는지 저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정말 힘들었을터인데, 그는 여기저기를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사이트를 관리하고 책을 읽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황이더라도 원폭 2세 환우들에 대한 문제로 계속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것들은 인간(우리들)에 대한 혐오. 그 안에는 저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렵습니다. 생명권을 가장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눈앞에 이익이나 무관심을 피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내가 중요한 것처럼 남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가 만났던 대부분의 관계자 분들은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냥 우리 주위에 있는 보통의 사람들. 2세들이 대물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외면하는 원폭 1세들. 심지어 계속(운동을) 한다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는 사람까지. 자기 자식도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자식들 때문에 결국에는 회피하는 1세 부모님들. 본인이 선택해서 얻은 고통이 아닌데도 주위에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거이 없었습니다. 고통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그것때문에 삶은 더더욱 고통으로 얼룩지고 있는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단정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간의 문제 때문에 2세의 유전적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는 일본 정부와 아에 방치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면 약자이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되는 일이 참 많은거 같습니다. 책들을 보면 사죄를 하는 독일 그리고 사죄 하지 않은 일본의 태도에 대해서 비교하는 책들이 종종 보입니다. 그렇지만, 식민지배에 대해서 사죄한 국가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 자신이 알기로는 없는걸로 알고있습니다. 그들의 사죄는 있는 사람들(국가)에 대한 사죄지 없는 사람들(국가)에 대한 사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침략전쟁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혹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 더 비약하면 도움이 되었다는 논리로 약자의 고통은 더욱 비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신랑과 결혼한다고 했을때 신랑의 건강의 문제로 반대했던 저의 가족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어쩔수 없는 문제인지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만 나의 가족들에게만 아니길 바라는 마음. 뭐 저는 거기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동생이 아픔이 있는 분을 배우자로 선택하여 저에게 소개한다면 그의 결심을 존중하고자 노력할겁니다.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적이라고 치부하고 그럼 단체에서 배척하거나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들은 정말 지향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몸또는 마음이)아프다는 이유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다른 사람들이 박탈 할 수 있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넝마가 된 특별법이 언젠가는 수정되기를 바라고... 과오에 대해서 일본정부나  이 정부(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우리'에 언어까지 뿌리내린 느낌입니다.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정말 이상하네요.)그리고 미국정부도 그들에게 사과하고 보상해주기를 희망하며 그들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특히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희망합니다. 아는 것이 없는 주제에 편협적인 시각으로 보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것이며 알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신랑이 우리들의 아이들이 자랄 때는 좀더 웃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이해하고 울어주고 공감하고 함께 나아가는 세상이 되었스면 좋겠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갔을때 들었다는 그런 말들을 듣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줄었스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은 이야기가 저의 결심과 소망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오늘은 전화를 해볼려구요. 저의 직업적 기술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책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해서 정말 좋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네이버를 검색하다가 무려 '제노사이드'라는 게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씁쓸한 이마음. 좀비 제노사이드더군요. 그냥 좀비의 은유적 의미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게임은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그런 여러가지 것들이 우리들을 더 아무생각 없이 행동하고 말하도록 하는 근원인거 같아서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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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사에 대한 침묵 내지 은폐는 한국 사회에 일반화된 현상이다. 이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한국의 히로시마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복잡한 가닥들이 얽혀 있는 역사적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행운이나 불행으로 돌려버리는 것은 가장 손쉬운 해결 방식이다. 물론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이 아니라 그저 덮어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상처는 안에서 곪아 터지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단 문제를 공론화하여 진상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 점에서 히로시마는 합천보다 우월했다. 문제의 원인과 결과 현황이 명백해지고 나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하고 그런 다음 정당하고 적절한 해결 방식을 강구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가 해결의 이러한 알파와 오메가를 회피하려 할 때 온갖 잔꾀와 가식, 손익계산 또는 냉담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히로시마식 평화가 합천식 체념보다 별로 나을 바 없었다. 형률 씨는 오히려 한국에서 진행되는 과거사 관련 입법이 일본에서는 이루어진 일이 없는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 6장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특별법 입법을 외치다, p173

"생명권에 앞서는 인권은 없다." 그는 자신의 운동이 다른 무엇보다 생명권을 수호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사회적 차별의 철폐와 평화의 앞날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그는 "핵 시대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이 바탕이 된 인건회복운동"을 주장했던 것이다. 형률 씨의 운동은 마지막 순간까지 애초의 문제의식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 8장 목숨과 맞바꾼 환우의 인권, 원폭피해자 운동은 인권회복 운동이다, p224

전쟁에 대한 한국 원폭 2세 환우의 관점은 히로시마식의 전후좌우가 다 빠져 있는 "허구적인 평화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 정부를 포함한 일본인들 대부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이 일본인의 국민적인 피해 경험이며 인류사에 의미를 남긴 보편적인 경험이라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전 세계에 반핵과 평화를 호소하는 국가적 사명을 가진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미국의 원폭 투하를 자초한 책임은 직접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동시에 식민지 지배와 전쟁 동원 등에 대한 일본의 가해 책임도 은근슬쩍 감춰버린다. 이러한 일본식 '피폭 민주주의'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먼저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도 정신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피폭 민주주의'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먼저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도 정신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피폭자 원호법'과는 달리 한국의 특별법은 '간접 원폭피해자;인 원폭 2세 환우를 벚조문에 명문화하고, 그 존재의 뿌리를 밝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키는 어떠한 핵무기의 위협에 대해서는 안전한 사회 방어망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형률 씨는 누누이 강조했다.
특별법에는 진상 조사와 더불어 기념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형률 씨는 '한국의 히로시마'라고도 불리는 합천에 '한국 원폭피해자의 인권과 평화를 위한 박물관'이 설립될 때 그의 운동도 일단락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이 다시는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반인륜적 범죄와 그것이 낳은 참상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국내외 반전평화운동세력들과의 연대를 모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다녀와서 느낀 점이 많았다. 기념사업이 추구할 것은 자료의 정리나 학술적 연구도, 물론 "허구적인 평화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은 더더욱 아니다. 개개의 생명들이 감수해야 했던 고통에 공감 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역사의식과 도덕적, 정치적 의식을 키워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대의에 부추어볼 때, 합천은 인권과 평화의 울림이 시작되는 진원지로 거듭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곳에 군사독재자의 망령이 깃든 '일해공원'을 세웠단 말인가. 참으로 웃지 못할 소극이 아닌가. 이와 같은 퇴행을 막아내는 것이야 말로 특별법 제정의 시대적 당위성이다.
- 고인의 삶을 계속되게 하기 위하여, 김형률이 그린 특별법의 밑그림, p261-262




한국원폭2세환우회
http://cafe.daum.net/KABV2PO

한국원폭2세피해자 김형률 추모사업회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99-1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내 tel_ 02-735-5811-2

메모_ 관련서적들
기억을 둘러싼 투쟁, 김민철, 아세아문화사
히로시마의 불꽃, 김원일, 문학과 지성사,
기억과 망각: 독일과 일본 두 개의 전후, 다나카 히로시 외, 삼인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독일인과 일본인의 전쟁 기억, 부루마, 이안, 한겨례출판
고통의 역사: 원폭의 기억과 증언, 정근식, 선인
한국의 히로시마, 이치바 준코, 역사비평사
전쟁을 기억한다: 히로시마 홀로코스트와 현재, 후지와라 기이치, 일조각

제노사이드조약 [Genocide Treaty]
일시  1948년 12월 목적  집단살해범죄의 방지 및 처벌
집단살해범죄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제노사이드란 특정의 민족이나 집단의 절멸을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살해하거나 생활조건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하며, 집단살해 또는 단체적 살해로 번역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나치스 독일과 일본에 의한 전쟁범죄인 ‘인도에 관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에 대한 비판으로서 국제연합이 1948년 12월 제3차 총회에서 채택, 51년 발효시킨 조약이다.
이 조약은 국민·인종·민족·종교 등의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를 국제범죄로 규정하였다. 또한 이 조약에 의하면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①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일, ②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일, ③ 육체적 파괴를 가져올 생활조건을 과하는 일, ④ 출생을 방해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 ⑤ 어린이를 다른 집단으로 강제이송하는 일 등의 집단살해를 행한 자는 전시·평시를 불문하고, 또 통치자·공무원·사인(私人)의 구별없이 처벌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공동모의에 참가한 자·교사자·공범자도 함께 처벌된다. 심리(審理)·처벌은 각국이 자국의 법원을 통하여 실시한다.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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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선생님의 책들중에서 어느정도는 선생의 얼굴이 표지에 있는것이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문학 서적에서 책 표지에 저자 얼굴로 디자인을 하는 책은 흔치 않은 관계로... 박노자 선생님의 신간이 나올때면 이번에는 어떻게 나왔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는 편인데 최근의 신간(신간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던 가장 최근작인 관계로)인 <만감일기>의 디자인은 좋아하는 디자이너중의 한분인 오필민씨가 디자인 한 책이었습니다. 책이 나왔을때 보고 알았죠. 오필민씨 디자인이라구요. 이분의 책은 이분만의 특이함이 있거든요. 한국의 북디자이너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분이에요. 박노자 선생의 책들중에 오필민씨가 디자인 한 책들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1.2권이기도 해서 처음에는 <만감일기>가 인물과 사상사가 아닌 한겨례출판에서 나온 줄 알고 있었다가 인물과 사상사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건 박노자 선생님의 강연회에 갈때마다 느낀건데요. 강연회 사진이 항상 청춘시절의(좀더 오래전의...) 사진입니다. *_* 우어어... <만감일기>의 각부마다 선생님의 사진으로 디자인을 한 도비라를 볼때마다 그 사진들이 생각나서 즐거웠습니다. 가끔 생각하는데 선생님의 사진이 표지에 자주 쓰이는 이유는 선생님의 정체성 문제도 있지만, 얼굴의 미모도 매우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ㅛ=;;; 부끄럽지만, 저는 얼굴 팬이기도 하거든요.

책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면... 뭐 어려운 것들도 있었고 매우 공감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아래는 매우 크게 공감한 부분인 '군 폭력 관련 보도를 보고'입니다.

......우리에겐 똑같은 '때리는' 행위라도 위로부터면 '사랑의 매'고 아래로부터라면 '패륜' '부모.교사 폭력'이 된다. 같은 내용과 방식의 발언도, 화자와 청자의 지위에 따라 '훈계'가 될 수도 았고 '감히' 하지 말아야 할 '말대꾸'가  될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가 어떤 문화적 혁명을 통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따르고 복종해야 한다'는 부자유친식의 폭력적이고 중세적인 이데올로기를 깨끗하게 청소하지 않는다면 군 폭력의 심층적인 문화적 배경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은희 님'이라고 부르고 교수가 학생을 '한별 님'이라고 부르는 등 동등한 호칭을 구사하고 수업시간에 서로 '요'자를 붙어 대화한다면 교사가 학생들에게 손들기가 조금 어려워지지 않을까. '선생님'과 같은 호칭엔 좋은 의미도 많이 담겨져 있지만 그 지긋지긋한 가부장적인 요소들은 평등사회를 머나먼 꿈으로 만드는 것 같다.
- 나를 넘어, 2005.11.5 군 폭력 관련 보도를 보고, p94-95


살아오면서 저의 큰 불만의 큰 축의 하나가 저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집안일에 대한 압박감이었어요. 더 솔직하게 말하라면 나이라는 이유로 '너는 무엇을 해야한다'라고 강요받는것들에 화가났어요. 뭐 즐거운 마음으로 강요받는 가사노동에 임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랬어요. 그래서 집안일을 하면서도 그 불평은 항상 동생에게 토했고... 그래서 남동생씨는 오랜만에 집에와서 엄마가 저에게 동생에게 먼가 차려주기를 요구할때 화를 냅니다. ㄱ- 후후후. 자기가 차려먹는다고요. <- 매우 잘키웠어요. 학교에서도 남자선배들이 여자선배나 후배들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면 본인이 화를 내서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결론은 얼마나 인식하고 바라보는가의 차이인거 같아요. 원래부터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완벽하게 타고나는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학습으로서 그 성향이(남성성, 여성성이라고 명명되어진) 완성되어(?) 지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이야기 하고 싶었던건 이게 아닌데... '권위'라는것이 무서운거라는 걸 매우 통감한적이 있었어요. 어릴때 아버지한테 혼날때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다고 혼나고... 그렇다고 변명을 하면 그게 말대꾸가 되어버려서 난감했던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라고 결심했었거든요. 인터넷 클럽일을 하면서 '권위적이지 않는 시삽이 되자! 모든것을 독점하지말자!'라고 항상 마음속으로 되뇌였는데요. 항상 그렇게 되기는 힘들었어요. 분위기를 잡아야할때는 저 또한 배운 방법 그대로 재현하는 존재였거든요. 다른걸 하고싶어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몰라서 충격받았었어요.
그리고 더 문제인건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거든요. 저는 그게 착각이길 바랬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그때는 정말 기가 막혔어요. 뼈속까지 배여있는 생활속에 남성성(혹은 가부장적)에 대한 우리들의 길들여짐을 알고 충격받았었습니다. 지금은 그때 제가 조금더 생각해서 노력했다면, 달라졌을수도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 후회는 그만하고 앞으로 노력해야죠.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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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은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다. 문명/자연, 주체/객체, 이성/감성, 정신/육체, 공/사 등의 이분법에서 두 항은 '다르지만 동동한 것'이 아니라, '인식자 대 타자'의 관계로서 인식자를 중심으로 타자를 정의내리고 세계를(상호 관련이 아닌)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모든 이분법은 위계적이며, 거의 반드시 성별적으로 작동한다. 이런 이분법에서 전자는 후자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후자에 대한 지배는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자의 자리에 놓인 목소리들은 침묵당하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린다. -p129

'개인'이 진정 의미 있으려면 그 개인의 권리의 인정과 사회적 평등 그리고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집단으로 환원되거나 대표자에게 동잘화될 수 없는, 독립적이면서도 관계적인 개별자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집단, 개인의 이해와 '대의'가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될 때, 그 집단 내부의 차이들이 문제로 설정되고 공개적으로 토론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진다. 그것은 정당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 "해당 행위", "조직을 깨는 짓"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을 희생하거나 '죽어야' 성립하는 집단이라면, 그 집단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애초에 '개인 대 집단' 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의문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게 아닐까? - p142
<오빠는 필요없다>, 이분법의 경계에서 말을 잃다, 전희경, 이매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 '집안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강간은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그 여성이 속한) 남편, 집안, 민족, 국가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된다. 사회운동 집단의 담론에서도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미국이 한반도(윤금이)를 강간했다, "윤금이 몸에 뿌려진 하이타이(세제)는 한반도에 뿌려진 미국의 정액이다"등......-  p107

자신이 버는 것 이상을 소비하는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광범한 분노와 규탄은, 남성의 소비는 소비 자체로 환원되지 않고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휴식이나 권리로 받아들여지는 반면 여성의 소비는 잉여로 받아들여지는 성차별적 해석의 산물이다 -  p111

"남성은 행동하고 여성은 보여진다. 남성은 여성을 바라본다. 여성은 보여지는 자신을 본다." 사진작가이자 비판적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의 이 말은, 시선은 그 자체가 권력관계를 내포하면서 동시에 권력이 작동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또 여성주의 이론가 로라 멀비는 정신분석을 발전시켜 영화 속에서 '남성적 응시'가 구축되는 방식을 설명했다. 이 때 '남성적 응시'는 현실에서 사회적 권력의 지지를 받기 때문에 여성적 응시와는 다르게 행동력과 소유력을 수반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무엇보다 '몸'으로 환원되는데 , 이때 '몸'이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성 사회가 전시하고 동원하고 사용하고 교환하는 몸이다. 여서으이 몸이 어떻게 훈육되고 '관리'돼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과 경합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  p115
<오빠는 필요없다>, '여성적인 것'의 타자화, 전희경, 이매진



매우 공격적인 제목이었는데 말이죠. 근데요 표지가 정말 귀여웠어요. 그 일러스트가 주는 느낌은 좀 가벼웠거든요. 그래서 크게 부담없이 책을 잡아서 빌렸습니다. 책은 표지도 재미있었지만, 본문 디자인도 재미있었어요. 책의 하시라가 있는 하단이 기존의 책들의 두배였는데, 물론 이런 책들은 종종봐왔습니다. 그치만 신국판 정사이즈에서 저런 책은 저로서는 처음 봤거든요. 하시라의 페이지 번호가 숫자간의 간격이 큰것도 신기했고요. 박음질 선을 이용한 차례나 도비라 구성도 좋았었습니다. 특히 페이지 마다 있는 각주가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맨 뒤의 전체 주는 먼가 앞의 디자인들과 거리가 먼 디자인이라서 좀 깼다고해야하나요? 뭐 그랬습니다.

책 자체도 뒷표지의 소개를 보고 고른게 아니라서 책을 넘겨서 읽기 시작했을때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뭐 언젠가는 이쪽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었기때문에, 저의 기대와 다른 부분이었지만 즐겁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인터뷰한 사람들의 신상정보가 있는 곳에서 정말 괴리를 느꼈습니다. 학벌이나 출신에 대한... 뭐 그런거겠지만요. 책은 운동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운동이라고 하면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여기 있는 여성분들은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단절, 주류가 아니라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서의 괴로움이나 항상 주변인이 되어버리는 모습이나 뭐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지금은 여성주의 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은 좀더 진보적이라는 편견을 여실하게 깨주었다고 해야하나요. -_- 뭐 그랬습니다.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도 성별의 구분은 여전했고, 그러한 구분에 따른 고통을 토로하면 받는 대접들이 그곳에서도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여학생회에서 일했던 친구가 말해줬던 이야기들이 그 책들에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매우 답답했습니다. 그녀들이 느낀 좌절이 어느정도 였는지는 상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 공간에 있는 남성분들은 저희 아버지대의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거든요. 어디가 다른지 당최 모르겠다는... 어쩌면 더 할지도;; 그 분들은(운동하시는 남자분들) 여성이 해야한다는 부분의 일을 하는 것이 없었다는 증언뿐 이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집 영감님께 실례일지도 모르겠네요. ㄱ-; 그남자가 그남자인가;; 뭐 그런 생각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특히 성폭력 관련 이야기는... 하아.

책을 읽으면서 신랑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되었는데요. 뭐 신랑의 이야기는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위치에서 강압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은 거이 일관대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뭐 큰 직장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관계로(전 항상 작은 회사에서 일했었거든요) 그런가? 싶었는데, 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 정당의 대변인씨라던가... 허허. 뭐 사실 저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에서 강자가 취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은 남성주의적인 행동이라고 정의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가해자가 되는것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그부분에 대해서 사회에서 말하는 대로 예민(!)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재현하는 존재가 되는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사실 그런것들을 재현할 때가 재현하지 않고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우보다 더 많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 그냥 답은 닥치고 공부... 그리고 다른사람의 고통에 좀더 귀 기울이고 이해할 수 없다면 노력을 해라. 정도인거 같습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한다. 여자는 여자다워야한다. 두가지의 기준에 의해서 고통받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공부해야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내가 여자라서 고통받는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봤는데요. 반대인 입장은 거이 해본적이 없었습니다. 아이고;; 부끄럽군요.

예민한 쪽의 책들에 대해서 포스팅 할때는... 매우 고민이 됩니다. 전해받기를 그대로 전해받는것도 아니라 잘 모르는 저의 사고로 걸러진 관점이라서 저의 글을 보고 어디에 있는 누군가가 또다시 상처받는건 아닌가 해서요. 부족하고 잘 몰라서 그런거에요. 공부하려고 노력중이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주시거나 살짝 비밀글로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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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M씨를 기다리며 서점에서 신간들을 보다가 <베델의 집 사람들>이라는 책이 나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인터넷에서 주문하기로 결심하고 돌아서서 인터넷에서 보다가 베델의 집에서 나온 책이 국내에 소개된 책이 <베델의 집 사람들>과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조만간 몰아서 주문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지난주 토요일날 도서관에 갔더니 신간코너에 떡하니 <베델의 집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로 대여 고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는건 정말 좋은거 같은데... 사서 보기로 결심한 책들을 좀처럼 사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책을 주문을 할 때가 되면 순위에서 그 책들이 밀려나서 말이다.-_-;; 보고싶은 책은 웰케 많은지;; 하하하.

사실 책을 처음 잡게된 동기는 귀여운 표지때문이었다. 집의 위에 올라가있는 귀여운 수염 아저씨의 그림을 보고... 궁금해져서 책을 잡았는데 베델의 집의 정신장애인들과 베델의 집과 관계가 있는 일반인들의 글을 모아서 낸 책이 <베델의 집 사람들>이었다. 책의 중간중간에 있는 귀여운 그림들처럼 책은 그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매우 유쾌했다. 그리고 즐거웠고 읽는 도중 그들의 행동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때가 몇번이나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사업체를 운영하는지 알았을때도 정말 유쾌했고... 이런 직장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한다면 직장에 출근할때 좀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회사다닐때 더 좋아져야 한다는 것이라던가 기한내에 끝내야 한다는 것 등등으로 압박받았던 일들이 생각이 나더군요.
책을 읽으면서 찡했던 부분은 환자들의 글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지금 그대로도 좋다는 것,특히 못난 자신 그대로가 좋다는 것, 약함은 그대로 가치가 있다는 것, 실수해도 좋다는 것, 불안한것도 당연하다, 헤매더라도 중도에 실패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등등 정말 많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고 충격적인 것은 위의 생각의 확장선으로서 "환청"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환청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해주고 가령 약을 바꿀때 환자와 대화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환청씨에게도 의사를 물어보는 에피소드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환청'이 아니라 '환청씨'라고 호칭을 해서 환청에게 하나의 인격을 부여해줘서 환자와 그의 환청과의 대화를 유도하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기존 사회에서 좋지 못한것으로 배척받는 것들에 대해서 긍정하는 마인드가 정말이지... 눈물이 핑글 돌았습니다.

못난 그대로 살아가다
저는 항상 자신에게 많은 벌점을 주며 살아왔습니다.
가와무라 선생님이나 무카이야치 씨는 "못난 그대로의 시미즈 씨로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못난 그대로의 자신'이 싫었기 때문에 "못난 그대로도 괜찮다"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못난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용기가 무척 필요한 일입니다. 못난 그대로의 자신이 싫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저 자신이 만든 이미지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못난 내가 싫어, 싫어"라고 결국은 7년 동안이나 자신에게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 자신을 때리면서 어떻게든 살아왔습니다. 자기학대를 그만두고 온화한 마음이 되면 사람의 인상도 바뀌나봅니다. 자신이 변하면 인상도 변하는 법이니까요.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하면 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나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체념이 중요해, 시미즈 리카, p 127

실수할 권리가 있다
사람은 병에 걸려 알게 되는 것이나 얻을 수 있는 것도 분명히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병이 재발하는 것만을 두려워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자에게도 '실수할 권리'가 있습니다. 실수나 고생에서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병원이나 의료진은 '재발을 막는'다는 대의명분 아래 정신장애 환자에게서 지나칠 정도로 '실수할 권리'를 빼앗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델의 집'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어려움과 실수를 '살아가는 고생'으로 소중히 여기는 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저 역시 "실수해도 좋다", "불안한것도 당연하다", "헤매더라도, 중도에 실패하더라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저연스런 일이다"라고 존재 자체에대해 안도감을 갖게 되어 마음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 같다, 무카이야치 에쓰코, p 179

'약함'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일을 포함하여 모든 작업이나 사업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도달 목표나 주의 사항을 강조하는 것보다 각자가 안고 있는 약함이나 모자람으로부터 앞으로 일어날 다양한 사고를 미리 예측하여 그것을 서로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가 가진 '약함을 공개'하여 서로 돕게 되고 결과적으로 위험을 피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약함이란 강함이 약해진 것이 아니다. 약함이란 강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도 아니다. 약함에는 약함으로서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이처럼 '베델의 집'에는 독특한 '약함의 문화'가 있다. '강한 것', '옳은 것'의 지배를 받는 가치 속에서 "인간이랑 약한 존대다"라는 사실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약함'이 갖는 가능성과 저력을 이용한 삶을 선택한다. '베델의 집'은 그런 삶의 문화를 키워왔다.
- 약함을 유대로, 무카이야치 이쿠요시, p208-209



요근래에 화재사건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그 불안정함을 관리받지 못하여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게 되는 것에 대해서 그런 사람들을 격리해야한다는 의견을 넷에서 볼때마다 정말 답답할때가 많았습니다. 중세때 정신질환저들을 배에 태워서 계속 돌리는 것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거 같아서 그런 내용들을 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약을 먹고 상담을 받으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주 심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로 하고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것.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부분은 원래 타고나는 유전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사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또는 해소하지 못해서 쌓이고 쌓여서 폭발하는 구조가 아닌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울증을 방치하고 극도에 이르면 정신분열에 이르른다던가... 사회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과 사회를 원활하게 움직이게 하는 기관에서 그런 부분을 해소해준다던가 멈추도록 해준다던가 사회적 장치나 제도를 마련해야한다는 필연적인 증거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던 개인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그 사회에서 낙오된다던가 그런 좌절로 인해서 더 심해진다는건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사회에 책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언제까지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로 남아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최근의 2mb의 꼴을 보면 계속 그럴거 같네요. 허허. 취직관련으로 멍멍소리를 하는거를 보면...
병원을 기피하는 사회적인 편견들, 비싼 병원비, 치료를 받게되면 생기는 문제들을 기관(국가)에서 나서서 인식의 개선을 해줘야하는것이 당연한건데... 베델의 집 사람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우라카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며 일반인들과 교류해서 나아가기도 하고 뒤로가기도 하는 그런것 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최소한 보험에서 차별받는 그런 문제는 해결해달라는 겁니다. ㄱ- 너무 어려운걸 바라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티비에서 장기기증자도 보험 가입을 거부당한다는 사실을 았았습니다. O<=< 분열증에 처방받는 약도 몇년전에야 의료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했다니... 뭐 말다한거 같지만; 바다 건너 나라를 생각하면 여기는 나름(?) 천국일지도 모르겠지만, 상담을 받는다던가 그런것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바다 건너의 나라가 부럽습니다. 특히 영화에서 그냥 평범하게 부부가 상담받는 장면을 볼때 그렇습니다.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도 읽어보고 싶은데 이 책은 베델의 집 사람들과 관계자분들이 쓴 책이 아니라 기자가 쓴 르포라서 좀더 어둡다고 <베델의 집 사람들>에서 번역자분이 후기에 적어주어서 살짝 망설여졌습니다. 국내에 <'베델의 집'에서 부는 바람>과 특히 <안심하고 절망할 수 있는 인생>이 나와줬으면 좋겠습니다. 제목에 필이 퍽퍽!!하고 왔거든요. 얼마전에 산 <사람으로부터 편해지는 방법>인가? 는 사고 매우 좌절했지만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냥 생활에 대한 가벼운 느낌의 글들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글들도 있었지만... 제목의 이미지는 아닌거 같습니다. OTL 일본에서 발행된 원제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낚였다는 생각이;; 최근의 출판사의 신간도 그런쪽으로 낚더군요. 신간코너에서 보다가 낚일 뻔 했습니다. 후후후. 뭐 겨울이니 요즘 나라안의 상황도 그렇고하니 그런거 같지만... 그래도 좀...;;; 아닌책을 그런책으로 포장하는 건 좀 많이 슬프네요.
그나저나 본문에 사용된 일러스트는 누가 그린건지 없더군요. 궁금했는데... 마음속에서 베델의 집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렸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


궁리출판 네이버 블러그
http://blog.naver.com/kungree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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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상경해서 친구 M씨를 만났는데, 그자리에 M씨의 지인분 일본인 Y양과 그리고 M씨에게 호감이 있다는 교토대 인류학과 대학원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Y양을 같이 만나게 된건 Y양의 지인인 인도네시아 친구가 인도네시아로 돌아가는데 일기장 같은걸 만들어서 주는데 그 일기장에 그림을 그리는걸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본국에 돌아가는 그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매우 이미지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부끄러웠다. 그녀는 어딜가나 오는 그 차별적인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일본인 Y양이 말해주더군요. 그리고 그녀는 한국에 오기전에 일본에서 잠시 생활했는데... 그런 대접을 받지 않아서 한국에서도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너무 달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한숨. 뭐 여튼 저는 매우 복잡한 감정으로 그녀를 위한 일기장의 장식들을 열심히 나는 도왔고... 그러던중 문제의 교토대 인류학 전공인 대학원생 청년이 왔습니다.

이런 저런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물어본 질문은 '한국의 전통문화 단절'이었습니다. 순간 빠직. 이 나라의 전통문화의 기념품화와 예술화는 당신네들의 업적이었다라는것을 저변에 깔고 나름 열심히 침착하게 설명을 해줬고 그 청년은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함께 있었던 친구 M이 통역을 해줬습니다. 그의 답변은 자기네 전통도 단절 되었다라고... 단절의 범위가 틀리지 아니한가!! 우리네의 단절과 그들의 단절은 분명히 다름에도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재차 설명. 게다가 제가 진심으로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이유의 저변에 깔고 시작했던 그 진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식으로 일본인과의 교류는 처음인 관계로... 평정을 최대한으로 유지했지만, 저는 나름 패닉상태 이었던거 같습니다. 사실 자신이 한 이야기가 잘 전달 되었는지도... 내가 본인이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로 비슷하게라도 표현했는지 조차도 잘 모르겠더군요.
다음의 질문은 '이해가 가지 않는 한국의 기독교';;;;;;;; 하아. 또 열심히 설명해줬고 M은 열심히 번역해줬습니다. 그 총각은 구교와 신교의 차이도 잘 모르는 듯 했습니다. OTL 그리고 옆에서 똘망한 눈으로 듣도 Y양.

그리고 12시가 다되어서 친구 C선생과 친정집에 귀가해서 간만에 DVD를 빌리면서 전에 친구에게 빌려보다가 엔딩권을 못본 <골든데이즈>를 빌렸습니다. 그녀는 보지 않는 것이 좋을거라는... 미묘한 한 마디. 네타를 요청했습니다. "이탈리아 군복이야!!"라는 외침. 뭘까? 라고 생각하고 다음날 오후즈음 일어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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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할아버지의 친구인 이탈리아인과 혼혈인 도령은 어머니의 나라인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이탈리아군에서 무솔리니 양반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막장 엔딩. 막장이면 막장답게 독일은 어떠한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그야말로 실소. 처음에는 번역하는 사람에게 화가 났었습니다. 차라리 미국으로 번역했으면...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랬으면 수용소에서 있었겠구나. 영화 삼나무에서 내리는 눈이 생각이 났습니다. 암전. 명쾌하게 불쾌해졌습니다.

아무튼 저는 문제의 그 장면을 보고나서야 저는 책의 전반에 넘치고 넘쳐나는 균열이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빨리도 봤습니다.;;; 개인적인 이유의 살인은 용납되지 않지만, 국가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살인은 용납된다는 것.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대해서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판타지의 긍국. 저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잘도 인종차별을 아니받고 즐겁게 사셨을랑가?...라고 생각했더니 실소가. 생각해보니 애시당초에 그 시대로가서 전하고 싶었지만 전하지 못한 메세지인 원폭 문제.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피해자 입장뿐인 그네들. 시점이 아이들이니 더더욱 말다했습니다. 이걸 출판사에서 연재해주게 하는구나. 하긴 이나라에서 번역판도 나왔구나.
일본의 트렌드인 자민족 중심의 역사사관의 한 부분인거 같다고 친구 C선생에게 말하니 그게 보통 일본인들의 시점일꺼라고. 생각해보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화했던 그 일본인 두분과 별생각없음에는 크게 차이가 없는거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오십보백보가 아닌지.
저 또한 아무생각 없이 소비해오던 사람의 하나라서 정말 부끄러워졌습니다. 이런 부분을 느낄때마다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정말 난감합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부분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는거고. 저 자신도 자유롭지 못한 기분이었습니다.

<골든데이즈> 마지막권을 본 이후에 다시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를 잡았습니다. 사실 전에 책을 보다가 포기를 했었던 관계로 다시 읽는다면 매우 큰 계기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계기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항상 이런 부분(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으로 언제나 고민해왔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부분과 정치적인 부분의 해리에 대해서요. 친우 C선생은 이부분이 통일이 되어야 된다는 입장이지만, 저는 뭐 좋아하는 부분이 있으면 이부분은 눈감고 넘어가도 되지아니한가! 하는 입장이었거든요. 그렇지만 언젠가 충돌하는 부분에서 겹쳐지면, 저만 예외일까요? 저만 열외일리가 만무하시겠죠... 뭐 그런거입니다만, 그래서 정말 곤란해 지겠지요. 그렇다고 모두에게 정체성을 커밍아웃하고 살고있는건 아니라서요. 그네들의 입장에서는 제가 자란 집이 빨갱이 집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어야하는지 실소해야하는지 알수없는 현실입니다만, 요즈음은 현정부 입장에서 보면 그런거같습니다. 낄낄.

어떤 부분만보고 전체로 해석하는 편견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인 부분으로 이야기한다면, 가령 파병문제가 가장 적절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국익을 위한 파병에 동의한다면 타국에서 그 국가의 국익을 위해서 국가와 국가간의 선을 넘어서서 그러한 부분에서 피해자가 된다면, 그네들의 국익을 위해서 결코 그 피해자 입장으로 항변하거나 항의하는데서 다른 국가들에게 피해자적 부분에 대해서 순수하게? 인정받고 도움받기(?) 힘들다는 것. 당연한게 아닙니까? 자기네를 위해서만 한정되게 국익을 위해서 인정한다니. 그 논리는 어디서 온건지. 애시당초 그 논리를 내세우는 그 뻔뻔함은...  라고 생각합니다.(먼 소리를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어휘력이 딸리는군요. 쩝)
무정부주의자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이분들은 열외로 한다고치고... 과거에 어떠한 잘못을 했다면, 그 과거가 그렇게 되도록 방관한 사람들(그 사회의 지배층이 아닌 그 사회 구성원의 보통 사람들)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관자적인 태도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지했다라고 용서받는다면 이세상에는 용서받을것이 정말 많을거 같습니다. 몰랐었다!라고 끝날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으며 앞으로 절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것이 그 사회 구성원들이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현재 일본은... 그리고 우리들은....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아닌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스면 좋겠습니다. 그런면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의 상당수가 그런 분이 아니라서 매우 좌절입니다. 역시 문제일까요?

<내셔널 히스토리를 넘어서>에서 카와모토 타카시씨의 글에서 사무엘 존슨의 한 경구를 언급했었습니다.
"애국심은 악당의 최후의 가리개" 매우 공감. 언제나 민족(국가)주의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리고 가족주의 앞에서도요. 저는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읽어본적은 없지만, 읽어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변역본이 있다면요. 책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배경지식이 거이 전무한 저에게는요. 그래도 접근하기 쉬웠던 분의 글은 재일교포 분들의 글(서경식씨). 서경식씨와 대담집을 읽어서 조금 가까워진 타카하시 테츠야씨. 그리고 내국인이 되기를 희망한 반도인의 좌절을 다룬 이야기였습니다. 어려워도 최소한 3번은 읽어봐야겠습니다. 진심으로 어떻게 그렇게 된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박노자씨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사?인가 그책도 필히 읽어야겠습니다. 후에 어느날 그분들이 그때를 이야기하면 아무생각 없는 지금의 저는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뭐라 사과 할지도요. 아는게 있어야죠.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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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교육관련 책들을 열심히 살펴보다가 제목이 퍽!하고 오는 책이 있어서 잡아서 빌렸다. 처음 페이지를 넘겼는데 나온 서두 문구는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를 사랑한다. 모든 아이는 자기 부모를 사랑한다. 하지만, 모든 가족이 행복하지는 않다."에서 잠시 멈출수밖에 없었다. 하아. 용기를 내어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는데 '가족형성'에서 언급하고 또 언급했던 내용들. "무지하고 눈먼 사람이 자기 배우자는 물론 우리 사회의 앞날인 아이들의 운명을 망쳐놓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목격한다. 그러한 무지함은 반드시 깨져야 한다. 눈먼 폭력의 희생양들은 커서 또다시 눈먼 가해자가 된다. 그런 아이들은 커가면서 다른 사람이나 재물에 해를 입히고 결국 자신의 삶까지 스스로 파괴하고 만다. 이렇게 슬프고도 걷잡을 수 없는 굴레는 대를 이어 계속된다. 따라서 무지의 굴레는 바로 당신이 끊어야 한다."
저는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족의 심리학>을 읽으면서 더 많은 생각들이 들었고 더 많이 반성했습니다. 앞부분에서 언급되었던 부모가 되기위해서 기본적으로 습득해야하는 '기본적인 기술'에 대해서 항상 인식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왜곡되고 뒤틀린 관계양식을 인식해야한다
* 가족과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 가족의 안정을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해소하는 한편 다른 가족들의 타당한 욕구를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풀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 어떤 감정이든 거리낌없이 표현하고 가족들이 드러내는 감정에 건설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 다른 이들의 말을 왜곡하지 않고 명확하게 받아들이고 소통해야 한다
* 가족들의 감정 표현이나 행동에 반응해야 한다
* 자신의 개체성과 자주성을 표현하고, 가족들 모두 그렇게 독립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뒷받침해줘야 한다
* 외부적인 요인이 가족에게 적절하지 않은 간섭을 할 때는 그것을 막아내야 한다
-행복한 가족의 건축가 부모, 부모가 곡 알아야 할 5가지, 건강한 가족의 조건, p46



책의 전반 부분은 문제가 있는 가족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특히 의사표현의 방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와있었습니다. 책에는 부모가 있고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저 자신이 있었습니다.  
책의 상당부분은 <비폭력 대화>가 연상이 되었고, 그 책의 복습적인 부분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행동이나 말 하나가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경우와 상처받아서 정상적으로 대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숨겨진 메시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연급하고 있었습니다. <비폭력 대화>때도 느낀건데 책을 볼때는 아아...그렇구나 하고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하는데 3*년을 살은 관계로 그 습관이라는 것이 정말 고치기가 힘들더군요. 대화의 방법을 바꾸어야하는데도... 알면서도 말하고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후회라도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선되어야 할 부분을 후회하다보면 사과를 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날도 오겠지요.
책을 보고나서 부모님에 대해서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부모님의 약한 모습이 더 보였습니다. 인정받길 원하는 부모님의 욕구라던가 어릴때 어떻게 성장하셔서 지금 저런 모습이겠구나라는 느낌도 들었구요. 뭐 요즘은 나이가 먹었는지 그런 생각들이 종종 들기는 했는데 어제 집에와서 부모님과 대화하면서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조금 더 배려하면 역시 달라지더군요. 그 조금이라는 것이 정말 어려워서 그렇지만 그래도 달라지는건 좋습니다. 고무적이었어요.
책은 사서 주위에 결혼한 친구들과 돌려보면서 진솔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래는 까먹기에 천재적인(이런말도 하지말아야하는데 말이죠. 자기부정 자기학대를 멈추는건 정말 어렵습니다.) 아니 가끔 까먹는 저를 위해서 본문을 보면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복습하도록 타이핑했습니다.

아기 때는 분명 특정한 행동이나 특성 때문에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만의 고유성, 숨쉬고 생각하고 느낀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하는 이유가 된다. 아이든 어른이든 행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가족은 모두 하나의 인간으로서 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소중한 존재다.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리 야비한 짓을 해도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이며 조건 없는 관심과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조건적인 관계를 맺는 가족에서는 한 개인의 가치와 소중함을 행동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모두 복잡한 세상을 배우고 이해하려고 하는 '수단'일 뿐이다. 자연스럽고 자신감 넘치는 행동도, 뒤틀린 방어적 행동도 모두 수단일 뿐이다. 수단은 본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당신의 행동은 한 인간으로서 당신의 가치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반영한다고 믿게 되면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기 위해 의존적으로 행동하거나 덫에 걸린 동물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어색하게 행동한다.
- "난 사랑을 줄께 넌 무얼줄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p131-132

부모들은 대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아이나 배우자를 탓하며 비난하고 꾸짖는다. '무거운 침묵'으로 자신의 기분 나쁜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대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다. 감정은 당신 안에 있고, 따라서 자신의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런 진실을 깨닫고 자신의 가정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당신의 감정 때문에 남을 탓하는 것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위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거나 움츠러들게 할 뿐 당신의 욕구를 푸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말에는 '자신'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 있지 않는 말은 모두 남을 탓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늘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대방을 피해 움츠리려는 메시지를 담는다. 또한 말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원인, 즉 채우지 못한 욕구는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소통의 형태가 전혀 달라진다.
- 한집에 살지만 하고싶은 일은 서로 다르다, 감정은 이렇게 표현하라, 내 감정은 나에 대한 것이다, p223-226

감정을 들어내는 가장 흔한 방어적인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는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적대적 침묵, 신체적. 정서적 움츠러듦, 특권의 철회 등과 같은 수동적인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이용당한다고 느낀다. 따라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비난에 맞서 대들거나 움츠러든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엉뚱한 싸움으로 번진다. 그러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자신의 감정은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어떠한 감정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건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 한집에 살지만 하고싶은 일은 서로 다르다, 감정은 이렇게 표현하라, 감정을 드어내지 않는 가족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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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글쓰기>

리뷰/텍스트 2008. 11. 17. 10:41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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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살아가면서 받는 고통을 마음에 담고 사는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었었다. 제발 일기라도 쓰라고... 그녀가 나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기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노선의 대안을 제시했는데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얼마전부터 나름 막장 커밍아웃 일기를 쓰고 있다. 결론은 일기는 역시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십대때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이라고 상상을 하면... 후후후후. 암전.

근래에 들어서 글을 쓰는것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았는데 그러던중 영풍문고에서 책을 보다가 인문파트 신간에서 <치유의 글쓰기>라는 책을 발견하고 사서 하루만에 다 읽었다.
책의 많은 부분은 글을 쓰는것에 대한 장점과 처음에는 글을 쓰기가 어렵지만, 일단 써보라는 충고가 가득했다. 사실 글을 쓰는것에(일기) 대한 어려움을 잘 모르는 관계로 이부분은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지만, 일기의 소재라던가 그런것들을 보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책. 특히 유언장이나 음식과 여행 그리고 꿈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부분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다.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나 남에게 고통을 받아도 그부분에 대해서 본인의 해명이나 항의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기장을 추천하고 싶다. -_-;; 욕하기에는 일기장 만한 공간이 없으리라고 생각함. 하하하. ㄱ- 책의 본문에서도 이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강조하고 있었다.
힘들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때 그 힘들어 하는 사람 당사자가 원하는 것은 충고도 대안도 아닌... 그저 닥치고 들어주는 것. 혹은 편을 들어주는 것. 혹자는 격려를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상대방이 대안이나 비난이나 반대의견 혹은 더 격한 반응이 올때도 있고... 처음에는 그냥 들어줘도 그 이야기가 몇차례 반복된다면 상대방도 더이상 그 이전과 같은 입장으로 들어주는것이 매우 어렵지아니한가.
최근에 읽은 <암 마음을 풀어야 낫지>에서 '암체질'에 대해서 언급된 부분이 있었는데, 다른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암체질'로 가장 암이 많이 발생하는 집단이라고 했다. 화를 내서 폭발을 잘 하는 사람들은 주로 '혈관계 질환'이 생기지 '암'이 생기는 일은 거이 없다고 되어있었다. 쩝쩝...

저자는 어렸을때 편두통이 심했는데 의사선생의 권유로 일기를 쓰기시작해서 암을 극복하면서 쓴 일기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암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쓰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아 나도 그때 일기를 쓰기를 잘했구나 라는 생각과 다시 일기를 쓰기시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본문에서 글쓰기 효과에 대해서 넘버링해서 나열한 내용이다.

1. 마음의 상처에 관한 글쓰기는 면역 기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질병으로 인해 의사를 찾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학교와 일터에서 능률이 향상되었다.
2. 마음의 상처에 과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동안이나 그 후에는 혈압, 근육 긴장, 피부 트러블이 현저히 감소된다. 글쓰기로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는 동안 건강문제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는 것이다.
3. 스트레스, 고혈압, 만성질환, 천식, 류머티즘성관절염, 암 환자들이 글쓰기를 실천할 때 육체적인 증상이 감소되는 것을 경험한다.
4. 내면의 비밀이나 고통에 따른 만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환자는 글쓰기를 통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변화와 치유를 경험한다.
5. 글쓰기는 사회적인 관계를 고양시킨다. 타인에게 미칠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비밀스런 사거을 털어놓는 일이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6. 긍정적인 감정이 높아지고 문제 해결의 기술이 강화되고 향상됨으로써 사회적인 유대가 개선된다.
7. 비교적 낙천적인 여성들은 우울증 상태가 약화됨으로써 긍정적인 미래에 대해 쓰게 되고,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하게 된다.
8. 글쓰기는 하나의 감정 상태에서 다른 감정 상태로 매우 신속하게 이동하도록 해준다. 예를 들어, 불안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글쓰기 이후에 편안하게 된다.
9. 글쓰기는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스트레스가 쌓이는 인생사가 생각의 체계를 방해한다면 글쓰기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한당.
10. 부정적인 생활 중에서도 미래지향적인 점을 발견하고 과거의 상처에 집착하지 않게 됨으로써 개인적인 성장에 도움을 준다.
11. 인생의 목표에 관해 글을 씀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고, 이로써 통증을 덜 느끼게 된다.

- <치유의 글쓰기>, 치유를 향한 글쓰기의 힘, 글쓰기 효과에 대한 과학적 접근, p95-96



본문의 넘버링 된 내용중에서 좀 민망한 내용들도 있는데... 뭐 결론은 정신적으로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고 스트레스가 해소가 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고통에 대해서 글로 재생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애도. 만약 글을 쓰는 당사자가 지금까지는 고통에 대해서 회피를 하고 있었다면 글쓰기를 통하여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절감하고, 스스로의 고통에 대해서 인정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애도에 이를수 있는 길이 아닌가 싶다. 본인의 상처를 스스로 보듬어 줌으로써 상처가 본인에게 인정받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어가는 과정이 일기쓰기의 가장 중요한 역활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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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 사이트에서 대인관계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책에 소설가 김형경씨의 <천개의 공감>과 <사람 풍경>을 몇분이나 추천한 리플을 보고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니 있어서 빌려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별 기대없이 빌린 책이라서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을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이런 책이 있다니...하면서 사서 주위사람들에게도 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검색을 해보니 <천개의 공감>은 2006년 발행해서 현재도 판매가 되는 책이었고, <사람 풍경>은 절판된 책이었습니다.
먼저 읽은 책은 <천개...> 그 다음으로 <사람 풍경>을 읽었습니다. 이 순서로 읽은것에 대해서도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천개...>쪽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의 고민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몇페이지에 걸쳐서 답변해주는 구성으로 이루어져있었으며,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사전지식이 없어도 이해가 가능하도록 쉽게 접근이 가능하도록 풀어서 적어주어서 읽는데 멈추는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체 파트는 '자아 알기', '가족 관계', '성과 사랑', '관계 맺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쉬어가는 코너 비슷한 느낌의 성인들의 말과 그리고 그 말들에 대한 설명이 아우러져있은 페이지들이 있어서 읽으면서 잠깐잠깐 정리를 할 틈을 내주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에게 퍽퍽 오던 글은 '사랑과 지지를 통해 자아를 강화합니다', '선한 나와 추악한 나를 통합합니다', '유독한 부모, 역기능 가정이 존재합니다'와 뒷 부분의 직장에 대한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주위 사람들도 보였고 아는 사람들도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사람에 대해서 조금이남아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퍽퍽 와 닿았던... 제목들을 보면서 제목들 자체에서 주는 메시지도 정말 강하구나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기억하기 위해서 파트마다 있는 모든 제목을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요즈음은 나이가 먹어서인지 몰라도...이런식으로라도 적지 않으면 머리에 남는게 없더라구요. 안습.;;;)

자기알기_
정신분석은 두 번째 연금술입니다.
문제도, 해결도 내부에 있습니다.
사랑과 지지를 통해 자아를 강화합니다.
타인의 싫은 점은 자신의 내면입니다.
유년기의 생존법을 버려야 합니다.
억압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선한 나와 추악한 나를 통합합니다.
내면의 부모 목소리를 지워냅니다.
내면 환상을 벗고 외부 현실을 봅니다.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배웁니다.

가족관계_
엄마와 딸은 근원적 갈등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화적 살해 관계입니다.
형제자매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계입니다.
유독한 부모, 역기능 가정이 존재합니다.
자기 삶의 목소리, 천복을 따릅니다.
주도적으로 자립적인 삶을 이끌어갑니다.
'이상적인 남편'의 환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중독성은 중독성끼리 의존합니다.
여성이 변화한 만큼 남성도 달려져야 합니다.
애도 과정을 잘 넘기면 정서가 풍성해집니다.

성과 사랑_
사랑은 또 하나의 연금술입니다.
사랑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릅니다.
사랑할 때 내면의 불안감이 되살아납니다.
연인에게서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피학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기학적이고 잔인한 사랑은 자신을 파괴합니다.
이별해도 좋은 것은 모두 내면에 있습니다.
이별할 때 상대방의 자기애를 존중합니다.
성 불능은 정체성의 빈틈과 관련됩니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습니다.
남녀의 성적 욕망은 성격이 다릅니다.
성폭행은 정체성 해체와 관련됩니다.

관계 맺기_
자신의 못나고 부족한 면을 사랑합니다.
내면의 분노는 삶을 정체시킵니다.
생존 욕망과 죽음 욕망은 한 몸입니다.
받은 분노를 그대로 내면에 담아둡니다.
누구나 내면에나 불안한 아이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시기심을 치료합니다.
나르시시즘은 유아적 전능감의 연장입니다.
여성도 '아버지의 이름'에 복종합니다.
작은 성취감이 쌓여 자신감이 커집니다.
거절해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승-승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합니다.
중년의 문턱에서 새으이 목표를 수정합니다.


<사람 풍경>은 저자의 심리 여행에세이인데 책에서 사진이 칼라가 아니라서 아쉬웠습니다. 저자가 그토록 인상적으로 느낀 작품들에 대한 느낌을 좀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책의 부제가 심리 여행에세이라서 여행 순서가 아니라 '사랑', '중독'등등 이런 제목으로 시작하는 에세이 이었습니다. 이 제목들은 아마도 여러가지 연관성에 의해서 저자가 나열한 순서대로 책이 진행된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개...>와는 달리 이 책은 저자의 자신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책에서 저자가 읽은 책들에 대해서 언급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언급된 책들중에서 많은 책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인용부분도 더 많았구요. <사람 풍경>도 소제목들과 부제들이 매우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또 적어봅니다. =ㅂ=;

무의식- 세 살버릇 여든까지 간다.
사랑- 모든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
대상 선택- 타인을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과정
분노- 대상 상실의 감정, 혹은 돌아오지 않는 사랑
우울- 정신의 착오, 혹은 마음의 요술 부리기
불안- 사랑하는 대상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공포- 분노가 가면을 쓰고 다른 대상에게 옮겨진 것
의존- 심리적 안정을 얻기위해서 사용하는 대상
중독- 의존성이 심화 극단화 된 상태
질투-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감 없음
시기심- 타인이 가진 것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
투사- 내면의 부정적인 면을 타인에게 옮겨놓기
분리- 세상을 반으로 축소시키는 태도
회피- 자기 자신과 삶으로부터의 도피
동일시- 타인을 받아들여 나의 일부로 만들기
콤플렉스- 다양하고 풍성한 인격의 근원
자기애- 퇴행과 성장으로 난 두 갈래 길
자기 존중- 행복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느낌
몸 사랑- 몸이 곧 정신이고 육체가 곧 정체성이다.
에로스- 새으이 에너지이자 예술의 지향점
뻔뻔하게- 유아적 환상 없이 세상 읽기
친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지켜보기
인정과 지지-고래도 춤추게 하는 놀라운 힘
공감- 타인에 이르는 가장 선한 길
용기- 절망 속에서도 전진할 수 있는 능력
변화- 세상을 보는 시각과 삶의 방식 수정하기
자기 실현-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


책을 읽으면서 읽고 싶었던 책들과 그 인용 부분

우울함을 느낄 때 당신의 사고는 부정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그런 때는 자신뿐 아니라 세계 전체를 어둡고 침울한 용어로 지각한다. 당신의 정서에 혼란을 일으키는 부정적 사고에는 거의 언제나 커다란 왜곡이 포함되어 있다. 그 비합리적이고 뒤틀린 생각이 당신 고통의 중요한 원인이다.
- 본문 p60, 우울 정신의 착오, 혹은 마음의 요술 부리기,
데이비드 번즈, <우울한 현대인에게 주는 번즈 박사의 충고>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은 대체로 투사일 경우가 많다. 타인의 이기적인 면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이타적인 사람이겠지만, 그 사람의 니면에도 억압당한 이기심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타인의 성적 방종에 대해 유독 분노하는 사람은 성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겠지만 그의 내면에도 바람둥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수다스럽고 경솔한 사람을 경멸하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도, 거짓말하는 사람을 경원시하는 정직한 사람도, 저마다의 내면에는 바로 그들이 인정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전가하는 바로 그 부정적인 측면이 억압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비난할 때 그 행위는 곧 자신에 대한 비난이 되는 셈이다
- 본문 p133, 투사 내면의 부정적인 면을 타인에게 옮겨 놓기


"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네 속에는 네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볼 때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 네가 싫어하는 것이 실은 네 자신의 일부이다. 늘 이것을 명심하거라"
- 본문 p139, 투사 내면의 부정적인 면을 타인에게 옮겨 놓기
베어 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1. 우리 자신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며, 인생살이에서 만나게 되는 기본적인 역경에 맞서 이겨낼 수 이쓴ㄴ 능력이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2. 우리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주창할 자격이 있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를 즐길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또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본문 p200, 자기 존중 행복한 가치가 있는 존재하는 느낌
나사니엘 브랜든, <나를 존중하는 삶>


앤과 배리 율라노프 <신데렐라와 그 자매들> 시기심의 심리중에서 시기당하는 사람의 심리를 연구한 책.
조너선 스펜스 <강화제> 투사에 대한 책.
제임스 F 매스터슨 <참자기> 한 인간이 진정한 '자기'를 발현시키며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고찰한 책.

마지막 부분에서 '변화'라는 파트에서 "다만 이제는 그것들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며, 그것들을 조절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인간 정신에 '정상'의 개념은 없으며, 생이란 그 모든 정신의 부조화와 갈등을 끊임없이 조절해 나가는 과정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에서 눈물이 핑글 돌았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저런 모습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기대감도 들었고 용기도 조금 생겼구요.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에 대해서 적어두니까... 저 자신의 치부가 들어난 느낌이라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인정해야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최근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부분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특히 그간 제가 너무 혐오해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서요. 그분들의 특징은 나태한 사람이 제일 많았던거 같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중적인 사람. 자뻑이 심한 사람.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사람 등등... 이외에도 더 많은 거같지만, 적다보니 끝이 없더군요. -_-
미약하게...;;;  사실인거 같지만, 인정할 만한 용기는 아직 없는거 같습니다. 그 사람들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니... 하아. 한숨이 절로; 그러고보니 나도 그렇게 민폐를 끼쳐볼까?라는 생각도 가끔 했던거 같습니다. 어렵네요. 여러모로...

책을 많이 읽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심리학 관련책중에서 가장 먼저 추천해드리고 싶은 책이 되었습니다. 함께 읽어요. 함께 좀더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좀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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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남씨의 책을 처음 접한것은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걸까?>이었다. 최근에 나온 <서른 살이 심리학에 묻다>와 절판된<왜 나만 우울한걸까?>를 보고싶었는데, 얼마전에 도서관에서 <서른 살이...>를 발견하고 냉큼 빌려서 반나절 정도 걸려서 다 읽었다.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처음에 소개된 '쿨한 연애'에 대한 부분이었다. 친한 친구가 생각나기도 했었고 나 자신도 쿨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과거에는 심하게 좌절하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지금도 쿨함에 쿨함에 대해서 모호하게 동경(?)이라고 해야하나? 뭐 그런 부분이 있어서 매우 뜨끔하면서 봤었다.
좋아했던 만큼 아픈건 정상이고 그 아픔을 본인이 통감해야지만 스스로가 그런 고통에서 극복할 수 있다는걸 매번 간과하고 만다. 어떤 결과만 가지고 고통스러워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한 흔적은 뇌리에서 지워져 버린다고 해야하나? 그 슬픔을 본인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는것은 정말 어려운거 같다.
책의 중간에서 다루어졌던 자신만이 모든것들에 대해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공감하고 극복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많은 편견들로 무장하고 살아왔던거 같다. 특히 무조건적인 잘못이란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 대인관계라던가 직장에서의 업무라던가... 모든것이 상대방의 문제도 있겠지만 나 자신의 문제도 있었을텐데 언제나 전과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남는 것은 분노뿐 이었는데 말이다. 다른 방식으로의 극복이 분명 있었을텐데 반복 또 반복 또 반복해서 표출해버렸던거 같아서 마음이 좋지 못하다.
자신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부분 그리고 방관자인 부분. 매번 간과하고 만다. 어떤것이던 그 이유가 있을텐데 말이다. 최근에 읽는 <천개의 공감>에서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해야지 극복할 수 있다는 상담글을 보면서 더 많은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해서 대화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할지도 모르는 길이 아닐까.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렇지만, 마주보기는 정말 어렵다.

<서른 살이...>는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걸까?>보다는 조금 가볍게 읽은 책인거 같다. 제목에서 가져오는 딱딱함에 긴장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추천해고 싶은 책. 지금 시대의 30살 언저리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고 읽을 수 있으리라. 김혜남씨는 글이 매끄럽고 잘 읽혀서 심리학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지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더 깊이있고 싶다면 요즘 읽고 있는 <천개의 공감>을 더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덧_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걸까?>는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나온 책의 표지가 더 느낌이 좋았던거 같다. 권신아씨의 일러스트와 정말 잘 맞는 느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갤리온에서 <왜 나만 우울한걸까?>도 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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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닮은 식사>를 읽었고 이부분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알고있다고 생각하고 책을 열었지만,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내가 알고 있던것은 그야말로 빙산일각. 그래서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의 공동저작인 <죽음의 밥상>을 읽는데는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나는 이제 요리를 하고 음식물을 사는 입장인데... 이 책을 읽고나서는 해산물 코너에서 밍기적 밍기적. 육류코너에서 밍기적 밍기적 거리다가 그냥 돌아서고 말았다.
얼마나 잔인하게 키워지는 아니 만들어지는 지는 알고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의 밥상>에서 알려주는 정보는 어마어마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동물의 응가가 그냥 버려진다는 것이었다. 하하하. -_- 그로 인해서 주변환경은 매우 오염되고... 뭐 육류의 경우에는 그다지 자주 먹는 편이 아니었기때문에 데미지가 덜했지만, 해산물쪽은... OTL 뭘 먹어라는 말인가. 특히 연어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패닉. 양식연어의 그 색은 염색해서 자연산 연어와 비슷한 색을 낸다는 사실. 햄도아니고... 염색하는건가. ㄱ- 그야말로 막장.

<죽음의 밥상>은 육류위주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가족과 채식 위주이며 해산물을 주로 섭취하고 가급적 유기농을 식품을 구매하는 가족과 마지막으로 지역 협동 조합 가게, 유기농 채소만 구입하는 완전한 배건가족이 나온다. 이 세가족이 섭취하는 음식물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책이다. 그리고 그 세가족들의 음식에 대한 생각들도 비교하며, 그리고 무엇들이 문제점이고 개선되어야하고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안내한다. 책에서는 긍국적으로는 배건이 되어야한다고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은 갖추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안내하고 그리고 지금의 공장시스템으로 생산된 것들은 먹기 힘들게 만들어줍니다. -_=;;;;;;

1. 투명성_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권리가 있다.
2. 공정성_ 식품 생산의 비용을 다른 쪽에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
3. 인도주의_ 중요하지 않은 이유로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잘못이다.
4. 사회적 책임_ 노동자들은 타당한 임금과 작업 조건을 보장받아야 한다.
5. 필요성_ 생명과 건강의 유지는 다른 욕망보다 정당하다.
- 3부 완전한 채식주의지들, 15 무엇을 먹을 것인가, p 379-381



월마트의 경우에는 다른 식품유통체인보다 식품의 유통과 생산비용을 다른이들에게 전가하는 구조로 압박하는지 알게되었다. 내가 먹는 이 음식물이 어떤 사람의 착취를 기반으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음식물을 생산하는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악취에 시달리며, 그 음식물을 판매하는 장소나 생산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저임금에 시달리는지...
책에서는 세가족이 소비하는 음식물들의 생산방식과 유통방식등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에는... 쓰레기를 먹는 사람들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있었습니다. 매년 만들어지는 음식물 쓰레기중에서 50%이상이 먹을 수 있는 음식물들이며, 1*%이상이 완전 포장되었는데도 버려지는 것들 이었습니다. 왜 버려지는 것인가에 대해서 드려다보니... 가령 음식물을 가공하는 업체에서 대량으로 싸게 구매해서 남는것들은 버린다던가 뭐 그런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책의 맨 후반부에는 육식의 윤리학과, 대안으로 나온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안내해줍니다. 공정무역이나 로컬푸드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공정무역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지에 대해서도요. 로컬푸드가 좋다고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생산되는 곡물에 들어가는 총 에너지의 비용)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논의되어있었습니다. 최근에 오일피크이후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방송에서 로컬푸드에 대해서 소개되고 있던 방송을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아래는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입니다.

18세기에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조나단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빈곤 여성이 키우는 아이들의 '과잉 현상'을 다룬 '온당한 제안'을 했다. "나는 한 살배기의 건강하고 잘 양육된 아이야말로 가장 맛있고, 영양 많고, 건강에 좋은 음식임을 확신한다. 끓이거나, 굽거나 찌거나, 삶거나 다 좋다." 이 제안은 물론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풍자하기 위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제안에서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실은 어떤 감각 있는 존재를 고깃덩이로 만드는 일에 그 존재의 높은 이성 능력 같은 점은 문제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유아가 그런 능력을 갖추게 될 잠제력도 중요한 도덕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 심각하고 치유 불가능한 지능 장애를 타고난 사람을 죽여서 요리한다면, 우리는 똑같이 충격을 받을테니까. 하지만 우리 종 가운데서 지능, 이성적 능력, 자기 인식 능력 등을 두고 그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쪽을 앞서는 쪽이 마음대로 착취할 수 없다고 하면, 어째서 다른 종을 착취하는 일을 같은 이유로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아닌 동물을 착취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건실한 도덕적 기반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종차별주의', 힘 있는 쪽에 편리하기 때문에 살아남게 되는 편견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 그러한 편견의 주체는 백인이나 남성이 아니라 인간이다.
치유 불가능한 지능 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의식 있는 인간도 타인의 뜻에 따라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이 원칙의 경계를 우리 종에 한정하지 말고 의식이 있고 박해받을 수 있는 다른 동물에게 확대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종 주위에만 도덕의 금을 긋고, 우리의 종 중에서 '도덕적 존재로서의 능력'이 많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보다 떨어지는 구성원들도 그 도덕을 근거로 보호하면서 다른 동물은 배척하게 될 것이다. 이 경계 넓히기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들이 그런 도덕의 금을 더 좁게, 자기들 주위에 그으려는 시도를 막지 못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 3부 완전 채식주의자들, 14 육식의 윤리학,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가?, p34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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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아이들>

리뷰/텍스트 2008. 10. 14. 21:46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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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칸너는 자폐증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태어난다고 믿었다. 부모나 사회가 고의적으로 이들을 고립시켰다기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고립된 성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부모에게 가해지는 비난을 면해준다. 칸너와 함께 아스퍼거 또한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반대 증거를 제시하긴 했지만, 환자의 부계나 모계에서 희미하지만 자폐증의 기미를 관찰하기도 했고 유전적인 요소 외에 부모와 아이 사이의 관계가 어쩌면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을 뒤흔든 정신분석학자들은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미래의 모든 인간 관계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은 대개 부모와의, 특히 엄마와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거나 실패했기 때문에 사회성이 결여된다고 주장했다.
정신분석학자였던 동료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무릅쓰고 칸너는 이러한 인과 관계에 반기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폐증의 원인이 심리학적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반기기는 했지만-냉정한 부모가 냉정한 아이를 만든다-다른 한편으로는 자폐증은 본질적으로 선천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냉정한 부모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육아 방식 때문에 아이가 자폐증을 보이게 된다기보다는 유전에 의해 거런 아이가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았다. 아스퍼거는 부모와 자폐증을 가진 아이의 관계는 온전히 생물학적이며, 유전자와 환경이 복잡하게 연루되긴 했지만 육아 방식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믿었다. 많은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에게 정상적인 형제자매가 있고 일란성 쌍생아도 한 명은 자폐, 한명은 정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스퍼거는 10년 동안 200명의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을 연구하면서 "환자의 부모와 다른 친척들에게 대해서 알게되었으며, 그 친척들에게서 비정상의 징후들을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칸너는 매우 운명 지향적인 '냉장고 엄마'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용어는 브루노 베텔하임을 비롯한 당시의 수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생각한 자폐쯩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자주 이용되었다. 이것은 레오 칸너가 처음으로 자폐증을 하나의 증후군으로 인정하는 문장에도 등장한다. 아마도 칸너는 이 문장을 쓴 걸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그는 자기가 진찰한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 11명의 부모가 아이들을 "깔끔하게 냉장고에 넣어놓고 녹지 않게 했다"라고 썼다. 아스퍼거는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의 엄마가 아무리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자폐증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닌 유전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브루노 베텔하임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은 자폐증은 곧 나쁜 부모와 동격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아스퍼거가 옳았다. 오늘날 정신과 교수들은 당연하다는 듯 정신분열병이나 양극성 장애(조울증)는 다른 모든 정신 장애 중에서도 가장 유전자에 지배받는 경향이 큰 병이라고 가르친다. 이 둘과 똑같지는 않아도 자폐증 또한 거의 비등하게 유전적인 요인이 짙은 병이다. 학자들은 일란성 쌍생아의 자폐장애(칸너가 서술한 전형적인 자폐증) 일치율- DNA가 동일할 때 둘 다 장애가 있을 수 있는 확률- 이 적어도 60퍼센트인데, 이는 관상동맥 경화증이나 우울증이나 자궁암의 일치율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말한다. 세차례의 쌍생아 연구에서 일란성 쌍생아의 '자폐 장애'일치율은 70퍼센트가 나왔으나 이란성 쌍생아에서 0퍼센트였다. 또한 자폐증을 더 넒은 범위로 보고 쌍둥이 중 한 명은 아스퍼거 중후군을 앓고 다른 한 명은 전반적 발달 장애를 앓는 아이들까지 모두 포함시키면 일란성 쌍생아는 82퍼센트가 넘고 이란성은 10퍼센트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 집안이 감춰야 할 수치, p 123-125


자폐증 아이를 키우고 있는 로이 리처드 그린커 교슈의 자폐증에 대한 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 <낯설지 않은 아이들>을 잡은건, 호기심 반 공부 반 이었습니만, 읽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자폐증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는데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보는 '엄마의 애정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책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던 '냉장고 엄마', '스피커 아빠'와는 상관없이 유전적인 영향때문에 자폐증이 걸린 아이로 태어 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자폐증이라고 진단을 내리기 보다는 대부분 '반응성 애착 장애(RAD)'라고 진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어릴때 진단을 받고 자폐증에 맞는 교육을 받으면 많이 좋아진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자폐증은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요.
우석훈씨의 모 책에서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엄마들은 그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대부분의 인식이 부모가 좋지 못한 환경에서 키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시선때문에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도 비슷 아니 더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자가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여러나라의 자폐증 아이와 그 아이를 키우는 부모(거이 엄마)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을 보며... 저 또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밖에서 사화적이지않은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만약 정말 못견디는 경우가 있다면, 아이가 아픈지 먼저 물어보아야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서 로이 리처드 그린커씨는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에 대해서 많이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은유로서의 질병>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타인의 고통>을 읽고나서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고 그 분의 책을 읽는걸 포기했었거든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지말며,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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