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천민 자본주의가 서민들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가진 자들만 더욱 살찌게 하는 '주식회사'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노동자, 농민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런 세상이 되어가는 걸까요. 월간 <작은책>이 연재 기획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눈을 뜨게 하는 대중 강좌를 엽니다. 교수직을 마다하고 변산으로 내려가 농사꾼이 된 윤구병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논객들 열두 분을 모셔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실천하는 강사 분들과 작은책 독자들을 이어 주는 뜻 깊은 강좌가 될 것입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02-323-5391) www.sbook.co.kr 합정역 2번출구로 나와서 우리은행 사거리를 끼고 돌아가서 서교가든을 지나서 태복빌딩
2008년 3월 20일 목요일 저녁 7시 김진숙_ 자본 천국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 2008년 4월 24일 목요일 저녁 7시 배경내_ 자본주의와 청소년 인권 2008년 5월 22일 목요일 저녁 7시 김상봉_ 학벌사회를 무너뜨리자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저녁 7시 김규항_ '진보'란 도대체 무엇인가 2008년 7월 24일 목요일 저녁 7시 박노자_ 대한민국 주식회사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저녁 7시 김송이_ 재일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2008년 9월 25일 목요일 저녁 7시 손석춘_ 혁명은 다가오는가 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저녁 7시 우석훈_ 신자유주의가 어디까지 갈까
-_-;;; 2007년 11월, 12월, 2008년 1월, 2월, 3월 강의가 지나가고....야 알았습니다. 매달 날라오던 작은책을 이제야 펼쳐봤습니다. OTL 바보. 김규항 선생, 박노자 선생, 우석훈 선생강의는 꼭 듣고싶습니다. 야근이여 제발 비켜가다오!!
우연히 잡은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2 <곰에서 왕으로>
요즘 가난한데... 아아 전부 보고싶어졌습니다. 그전에 거금으로 구매한 <슬픈열대>부터 -_-;; 라고 물어보시면 할말은 없지만. 변명은 책이 무거워요오오오오..... 분철해서 볼까말까로 고민하는 요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양장을 저주하는지라; 책값도 책값이고... 무겁고... 뭐 제본상태를 생각하면 양장이 원츄지만요.
재미있는데다가 쉽기까지!!! 나카자와 신이치선생 원츄!를 외치고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소설들을 멀리한 저를 좀 반성하게되었습니다. 미와자와 겐지선생님의 책을 보고싶어졌습니다. 빌려줘어어어~ 최선생. P선생.;; -ㅅ-/
그전에 도서관에 가는 근면함을!! OTL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곰에서 왕으로 "야만의 탄생" p227, 나카자와 신이치, 동아시아>
야만의 탄생
'야만'은 그렇게 탄생하였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조금도 야만스런면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동물들과 가능한 한 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그리고 신화에 의해 철학을 하던 사람들도 전혀 야만스럽지 앟았습니다. 동물을 죽일 때도 상대바으이 존엄을 해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필요 이상의 동물을 죽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사회생활에도 야만스런 부분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발레-리는 '아나키즘'을 정의하면서 "자신의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규율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이 '아나키즘'의 실천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 사회의 세속적인 시간의 리더인 수장은 산뜻한 말솜씨로 사람이 지켜야 할 덕스러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절대로 야만스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며 매일 아침 훈시 때마다 부족 사람들을 고무시킵니다. 수장은 같은 부족 사람들에 대해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결정은 장로회의에서 이루어집니다. 재판 같은 것에 의해 자의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 사회에는 권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어 있는 제의의 장에서만('자연'의 힘에 유래하는) 권력이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할 뿐입니다.
수장의 권위를 유지해주는 것은 이성의 일종입니다. 반면 왕의 권력은 성대한 종교적 의식에 의해 연출되어야 합니다. 왕권은 이성과는 다른 종류의 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자연'의 소유였던 권력을 사회의 내부에 있는 왕이 체현하는 것이 왕권이므로, '대립하는 것의 일치'를 당당하게 연출할 수 있는 종교적 제의에 의존하지 않고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라가 내리는 명령이나 결정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이나 결정도 나라가 내리는 것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마음의 무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칭성 사회에서는 이런 불합리한 사태가 가능한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 취해졌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는 '문화'에 의해 운영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는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자연'에게 되돌려주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오늘날의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대칭성 사회에서는 '문화'와 '자연'은 이질적인 원리로 간주되어 가능한 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것인 권력=능력을 사회의 내부로 들여온 왕이 존해하는 세계에서는, 이런 분리는 불가능해집니다. 왕 스스로가 '문화'와 '자연'의 이종교배에 의해 탄생했으며, 나라의 권력 역시 동일한 이종교배의 원리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종교배에 의한 구성체에 부여된 이름이 바로 '문명'입니다.
야만은 여기서부터 발생합니다. 왕과 같은 존재를 허용한 순간부터, 인간은 마치 힘의 비밀을 '자연'으로부터 빼앗기라도 한 듯이, 그때까지 소중하게 여겨오던 경건한 마음가짐을 상실하고 동물이나 식물도 단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되겠지요.
그러자 '자연'은 개발과 연구와 보호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집니다. 심지어는 곰마져도 더 이상 위대한 신이 아니라, 위엄을 상실한 동물학상의 한 대상으로 왜소해지고 맙니다. 예전에는 동물의 특성으로 여겨졌던 탐욕이나 인색함이나 질투가 이제는 인간의 특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은 동물적 특성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걸 '문화'가 억제해왔는데, 이종교배가 이루어진 이 세계 안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독점물처럼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동물들에 대해서 대칭성 사회의 사람들이 들으면 부들부들 떨 정도로 야만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형태의 야만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 지구화를 주도하고 있는 거대국가는 '문명'에 적대적인 '야만'과의 싸움을 전세계에 부추기고 있습니다. 왕과 나라의 발생의 내적 메커니즘을 탐구해온 우리는 이런 선동적인 말에 아무런 내용도 의미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야만을 낳은 건 바로 문명입니다. 국가가 야만을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야만의 발생을 토대로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15년간!"
......
"오늘은 사과하러 오셨다고요.
사과한다는 그 입으로 당신들, 회사를 다른 데로 철수해가겠다고했다면서요? 지금 당장 갖고 나가요. 좋지, 좋고말고, 미나마타 사람 더는 협박하지 말고. 그 무서운, 사람 죽이는 독이나 만들어내는 기계 전부, 수은도 모조리, 바늘 하나 못 하나, 미나마타에 남기지 말고, 땅까지 다 파서 가져가요. 도쿄로 가든 오사카로 가든."
......
- 영혼의 유산. 가을 여우비, <슬픈 미나마타>, 이시무레 미치코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한것이 아닐까."라고 이전에는 종종 생각했었는데 과연 그 생각이 바른 생각이었던가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도 있을지도 모를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방관자로 남아있던 그 때'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걸 매번 망각하곤합니다.
책을 보면서 가장 쇼크었던 부분은
그들에게 희생하라고 강요하거나 그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다수의 보통의(!) 사람들과 뻔뻔한 관계자들. 그리고 구경하는 국가와 관계자들. 그리고... 그리고...
하아. 뭐라고 해야할지.
그 다수의 보통(!)의 사람은 저이기도 하니;;;
그리고
얼마전에 안건데요. 치약도 수질오염의 주범이었습니다. <- 네 저는 완전? 바보;; OTL 생각해보면 당연한건데;
'물사랑 치약'이 있다는걸 알았습니다. 암엔헤머의 치약과 매우 비슷한 느낌으로 '한살림'에서 위탁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보통(!) 치약 특유의 거품은 나지 않지만 뭐 양치하는데는 별 지장은 없었습니다. 정말 거지가 아닌 이상(이부분도 하아;;;)은 앞으로 이 치약을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죽음 속에서 삶이 나온다. 고통 속에서 희망이 나온다. 이것이 내가 긴 상실의 세월을 보내며 배운 것이다. 상실했으나 나는 절망하지 않았고 결코 희망을 꺾지도 않았다. 우리 부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의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어떤 대답도, 어떤 정해진 해결책도 갖고 있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잘못들을 바로잡기 위한 비결도 내게는 없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과 존중 없이는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미래, 우리 공동의 미래, 모든 인간다운 사람들의 미래는 상호 존중을 토대로 해야 한다. '존중'을 다가오는 새 천년의 슬로건이자 좌우명이 되게 하라. 남에게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똑같이 남을 존중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부자건 가난뱅이건, 피부색이 붉든 희든 검든 까무잡잡하든 누렇든 간에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의 인류이다. 우리는 어머니 대지에 대한 책이모가 그 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단 한사람이라도 굶주리거나 학대받지 않을 때까지, 단 한사람이라도 전쟁에서 죽음을 강요당하지 않을 때까지, 무고한 사람이 감옥에 같혀 썩지 않을 때까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신념을 이유로 박해받지 않을 때까지 우리의 일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나는 믿는다.
나는 인류의 선함을 믿는다. 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고 믿는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당신과 나, 우리들 각자는 선의 승리를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칠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비판자들은 우리를 공격하여 서로 떼어놓고, 우리의 성심을 모욕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독실하다면 그들의 비난을 뒤집을 수 있으며, 어머니 대지와 우리의 투쟁,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 대한 서약을 더욷 굳건히 할 수 있다.
평화와 정의와 모든 이들의 평등을 위한 싸움을 절대로 멈추지 말라. 너를 동요시키는 사람이 있든 없든 어떤 경우에라도 네 양심에 따라 절대 흔들리지 말라.
시팅 불이 말했다. "손가락 하나하나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지만, 한데 모으면 단단한 주먹이 된다."
그 투쟁은 이기든 지든 우리들의 것이다.
7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 35 죽음 속의 삶, <나의 삶 끝나지 않는 선댄스>, 레너드 펠티어
책이 출판된것이 1999년.
2007년 이책을 보고 있는 지금, 그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습니다.
"아메리카에 진출"
약자의 역사는 주류의 역사에서 철저하게 외곡되어 기술되고, 그들 주류의 논리에 의해서 그것에 대해서 정당화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내일이 있다고 믿으려고 노력하며, 인내하고 하루하루를 견디어내는데... 어찌하여 안에있는 그분들보다 밖에있는 사람들이 더 고통스러워하는걸까?"라는 의문은 저에게 있어 여전히 숙제입니다.
그의 글에서 만난 서준식씨는 서승, 서경식 두 형님들보다 체념이 느껴져서 가슴이 메어지고... 여전히 일요일에 반전시위에 참여할까 말까로 고민하고 있는 저. 그런 자신을 못견디도록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관망하는 또다른 저.
당신은 내가 평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평범하다는 것을. 이 말은 겸손이 아니다, 사실이다. 아마 당신 역시 평범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평범함, 사람다움, 당신의 영성에 경의를 표한다. 당신도 나의 그것에 경의를 표하기 바란다. 그러한 평범함이 당신과 나, 우리를 잇는 끈이다. 우리는 평범하다. 인간이다. 창조자는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불완전하게, 부족하게, 평범하게.
당신은 완전함으로 저주받지 않았음을 감사하라. 당신이 만약 완전하다면 당신의 삶에서 성취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불완전이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갖는 저주이자 축복이다. 바로 그 불완전함이 성스러운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완전하게 되어야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쓸모 있게'되어야 한다 - 1부 내마음의 칼, 2. 나의 삶은 나의 선댄스,<나의 삶 끝나지 않는 선댄스>, 레너드 펠티어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날이 오는일은 희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런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쓸모 있게" 염치있는 "평범한"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선함을 믿고싶어요. 진심으로.
용기를 내어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잡았습니다. 과연 공공장소인 지하철에서 저는 냉정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까가 가장 고민이었습니다. 3페이지정도 넘겼을 무렵…….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이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밥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로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 여행, p15,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그는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것이 현실임을 그곳으로 가기 전에 확인하듯. 그는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텍스트를 받아드리는 인간들의 방어적 구조를. 그는 그렇게 질문을 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분노도 오열도 아닌 뭔가 좀 더 다른 감각. 매우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 미묘한 신경쓰임의 이유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자신과 마주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가 그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그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 "이것이 인간인가?"앞에서 저는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 철저하게 타자화하여 마치 그건 현실이 아닌 가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그 감각으로 그의 텍스트들을 익숙하게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이 감각은 일전에도 느꼈던 수많은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느끼던 그것. 하지만 저는 그때는 생각하기를 멈추었습니다. 어쩐지 알아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것이 저를 멈추게 했었던 거 같습니다.
2007/09/07 02:08에 책에서 보고 멈추었던 그 글.
포스팅 제목은 '고통의 망각과 텍스트의 중독'. 저는 그렇게 정의하고 멈추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카메라의 눈앞에 노출되지 않는 고통이란 없는 듯 하고, 다시 우리는 미디어가 펼쳐내는 이 고통의 이미지들의 과잉 앞에 노출된다.
정지영상이나 동영상에 덧씌워지곤 하는 모자이크는 오히려 이 고통의 스펙터클을 더 사실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그 이미지 속에 재현되고 있는 고통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와 시공간을 같이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정작 고통 자체는 증발되고 사라진다. 우선 고통의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충격의 효과들은 그 자체로서도 단명할 뿐 아니라, 상업주의 매체들이 유발하는 끝없는 자극의 인플레로 인해, 하나의 고통이 이미지가 유발하는 충격과 자극은 곧이어 또 다른 고통의 이미지에 의해 쉽게 상쇄되기 때문이다.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고통, 그것도 타인의 고통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의 스펙터클의 외설성 그 자체에 있다. 투명함, 황홀경, 외설 등의 모든 것이 지수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포화 속에서 보드리야르는 역사, 정치, 성, 주관성, 육체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에 주목했다. 고통 역시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사라진다. 살을 에[는 체험으로서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동정과 공유는 이미지 속에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현되는 고통 역시 그 실체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탈)현대사회의 대중매체에서 맥락에서 탈각된 이미지들은 몽타주 속에서 고통 역시 파편화되며, 그 고통을 유발한 사회적 관계망은 이미지들의 연쇄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그 결과 고통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개인적 불행의 일회성 이미지들, 자신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상실한 고통의 이미지 덩어리로 간락한다. 나아가 고통의 이미지들뿐 아니라 고통 자체가 그렇게 된다. 사진의 발명 이래 시각 이미지는 최고의 존재증명으로 군림해왔고, 이제 21세기의 시각 이미지들은 인간의 눈에는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하다. "여기 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는 이 이미지들의 극사실주의는 고통과 관련된 반성적 사유를 봉쇄해버리가 십상이다.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스스로를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매혹은 더 이상 생산의 양식이 아니라 사라짐의 양식이다. 그 매혹이 고통에의 그 아슬아슬한 매혹이라 하더라도.
-고통의 스펙터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주은우, 167p~168p,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이 감각은 결코 낯설지 않았습니다. 눈치 챘지만 멈추었던 그때의 감각. 더 오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솔제니찐의 그의 인생을 걸었던 작품. <이반데소비치의 하루>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던 저의 감각과 인정하기 싫지만 매우 흡사했습니다.
이건 자신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방법인가? 아니면 인간이라서 인간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의 방어적 구조인 보호장치인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멈추어야 했지만 곧 다시 저의 타자화에 대해서 알아버렸습니다.
그런 인간다움을 간직한 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고통을 당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기 시작했고 또다든 그들의 고통에 휩싸여서 그들의 고통을 역사의 기억의 조각으로 넘겼었습니다. 그들이나 또 다른 사람들 모두를 철저하게 타자와 할 수 없는 것이 저 자신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정의하는 개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타자화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그 감각으로.
강요되는 그 민족으로 정의 되는 정서. 강요되는 우리라는 정서. 그 저변은 우리가족이라는 정서…….
우리가족의 혹자는 우리의 이익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터인더. 언제나 타자화로 마무리하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피투성이 저의 손, 저 자신의 상처와 타자의 상처는 보이지만-정녕 보이는 것인가?- 멈출 수 없다.?"라는 정당화로 마무리되는 방어적 구조.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어찌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니.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정녕 그런 것들을 인정하고 싶은 겁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딘가에 있는 당신은 희망이 있다고 흐느적흐느적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당최 이런 것이 무슨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행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작은 노력에 희망을……." 그건 방어적 구조에 불가한일지도. 스스로 존재를 앞으로 이어가기 위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민폐는 계속된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동안. 이런데도 앞으로 나아가야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하지만, 마침표를 찍을 용기도 없는 것이 여기에 서있는 저. 다행인것인가?
제한되지 안흔 인구 성장, 자원의 낭비적 이용, 환경 파괴,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허용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한 실험을 우리가 미래에 대비하도록 우리를 위해서 수행하였다. 그 결과는 주민의 파멸로 이어진 생태적 재앙이었다. ...... 우리는 그 실험을 거대한 규모로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 인간의 인성은 그 마지막 나무를 베어 넘어뜨린 사람의 인성과 언제나 동일한가? - 폴 반&존 프렌리, <이스터 섬, 지구의 섬>, 3장 바보들의 낙원 p105~106
우리는 여전히 상이한 문화와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 수준에서는 현재 단 하나의 거대한 문명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지구 전체의 자연 자본을 먹고 산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물고기를 잡으며, 관계를 하고, 건물을 짓는데, 그리하여 생명권의 어느 구석도 우리의 낭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1970년대 이래 세계 무역 규모가 20배나 성장했다는 사실은 거의 어느 곳도 자급자족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엘도라도는 약탈당했고, 모든 지상 낙원은 유흥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조지브 테인터는 "만일 붕괴가 다시 온다면 그리고 붕괴가 다시 올 때 그것은 전지구적일 것이다." ...... 세계 문명은 전체로서 해체될 것이다."고 경고하면서 이 상호의존성을 지적했다. 일정 범위 분야의 전문가들이 똑같은 기회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기 시작했고, 요즈음의 몇 년이 문명이 경계와 보존과 사회정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부와 정치적 응집력을 여전히 갖고 있는 마지막 시기가 될 거라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기후 변화에 대한 교토의정서를 이끌어낸 리우 환경 정상회의 직전에 노벨상 수상자의 절반 이상이 우리는 우리의 체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시간을 단 10년 남짓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현재 부시 행정부가 쉬쉬했지만 드러나고만 한 보고서에서 미 국방성은 '한 세대 이내에' 전 세계적인 그근, 무정부 상태, 전쟁이 일어나서 기후 변동이 훨씬 더 가혹한 예측들을 실현시킬것이라고 예건했다. 왕립 천문대장이자 영국 과학지흥협회 전 회장인 캠브리지 대학의 마틴 리스는 2003년에 쓴 <우리의 마지막 세기>라는 책에서 모든 나라들이 현재의 테크놀로지를 기초로 하는 위험이 낮고 지속 가능한 정책들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 우리의 현재 문명이 ...... 금세기의 마지막까지 생존할 가능성은 50대 50을 넘지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지금 이스터 섬 사람들의 무의미한 벌목과 조각을 아직도 중지할 수 있었고, 마지막 나무들의 씨앗을 모아서 쥐들의 발길이 닿지 앟는 곳에 심을 수 있었던 그런 단계에 서 있다. 우리는 자원을 공유하고, 오염을 해소하며, 기초적은 건강 관리와 출산 통제를 시행하고, 자연의 한계에 맞춰서 경제적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도구와 수단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이런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려운 시절이 닥쳤을때 그것을 결코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손아귀에서 비틀어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기는 과거의 모든 어두운 시대들을 작아 보이게 만들 혼돈과 붕괴의 시대로 들어가기까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우리의 미래를 바르게 할 수 있는,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이다.
- 5장 도구들의 반란 p207~209, p220, <진보의 함정>, 로널드 라이트
이실문명총서 5번째 책인 <진보의 함정>에서 언급된 사실들에 의해서 패닉상태가 되어서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북부 아프리카의 사막화는 로마제국의 제국의 시민들의 식량재원 마련을 위해서 가까운 지역의 토양의 지나친 착취에 근거하고... 인류 최초의 대량(;;)학살은 크료마용인들의... 원시시대의 멸종된 동물들은 원시인들의 동물들의 과도한 포획이었다던가... 자연을 지나치게 낭비하지 않는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오래갔다는 사실... 특히 이스터 섬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ㄱ-;;;; 하하하. 마침 그주 주말에 무시무시한 환경다큐를 밥을 먹는 내내 봤습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바다에서 저의 사랑하는 생선님들과 해조류님들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0.5도 상승으로 식물들이 성장을 멈춘다던가 바다의 사막화의 속도가 몇배나 더 빨리 진행된다던가.;;;;;;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노력들의 최소한조차 없는 저. 앞으로 10년이라면? 마지막 나무를 망설임 없이 베어내는 용기. 절대 정의. 절대 신념(?)으로 오늘도 많은 것들을 소비하며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소극적 실천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세상을 바꾸는 돈의 사용법>에서 소개된 녹색아시아를 위한 만원계 사이트에 들어가봤습니다. 이달부터 저도 만원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로서 저의 소극적인 지속 가능한 노력을 위한 참여를 5가지로 정했습니다(자매품인 즐거운 불편편등등은 매우 어렵게 몇가지만(몇가지 던가;;) 실천중입니다.-_-;;). 자가용 금지 생수구매 금지 일상생활에서 물 사용 줄이기 노력 집안의 전기 전원 꺼두기 4가지 지속 가능한 노력과 약간의 경제적인 참여까지 5가지가 되었습니다.
히틀러 제국은 당분간은 여전히 역사의 '업무상 과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역사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세계사에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던 극적인 세월과 비교할 때 그다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별로 다를 바 없는 제국 시대였던 것이다. SS의 제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사진이 방 안에 걸려 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유대인 선별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실업자 문제의 획기적 성공에 대한 얘기를 듣는다. 히틀러, 히믈러, 하이드리히, 칼틴브루너 등 나치 거물들의 이름은 나폴레옹, 푸세,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와도 비슷해진다. 만일 같은 조건이었다면 세계 어디에서든지 일어났을 것이라고들 할 것이며, 실제로 그것이 독일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독일 이외에서는 없었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다. ...... '만행의 세계'라는 정리로 결론을 맺는다. 그 가운데서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구제받을 길 없는 자식들, 완고한 무리,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역사에 덤벼드는 반동가들이라는 것인가."
- <죄와 벌의 피안> 장 아메리
윤리 인간은 시간을 붙박아 놓고 싶어한다. ...(중략)... 시간이 모럴을 배반하는 바로 그때 그는 인간으로서 희생자와 대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장 아메리
- 기억과 증언 p46, p55, 전쟁의 기억을 둘러싼 대화 <단절의 세계 증언의 시대>, 삼인, 서경식&타카하시 테츠야
사무실에 있던 서경식씨와 타카하시 테츠야씨의 대담집을 오늘에서야 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순전히 동생이 엠피스리를 선물해주어서 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페이지가 넘어갈 수 있었거든요. 페이지 페이지마다 고통스러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과 그리고 경쾌한 음악의 비조화가 페이지를 넘어가게 해준다는게;;;; 하아.
조금 다른 이유지만 돌배개에 출간된 푸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아마도)>를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 매우 망설였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이건 이런거니까요. 그리고 저는 서경식씨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습니다.
과거와의 단절 그리고 망각이라는건 정말 무섭웠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절이 오늘의 이모습을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이자리에서 저의 생각도 이자리에서 저의 움직임도 이자리에서만 머물러 있으니.
아무리 이해하려고 혹자는 나누려 노력해도 노력은 닿지를 아니하고 결국 타인의 고통은 텍스트 그대로 그만의 고통이 되어버리는 참담함. 얼마나 이해하는것의 문제를 떠나서... 사실 지금 무얼 적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이 구분지어진 그런 분류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인간이라면. 인간이라면... 그 인간이 되기가 참으로 여럽습니다. 그려. 인간답지못한 저는 오늘도 인간다워지기위해서 노력중이지만 앞으로 나아감은 그다지 없는거 같습니다.
정말 무서운건요. 저역시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공범자 혹은 방관자가 되어버릴 거 같다는 겁니다.
이미 공범자이자 방관자 이긴 하지만요. 저 고통의 함성은 저에게는 잘 들리지 않나봅니다. 사소한 노력인데 미동조차 없는걸 보면요. 언젠가는 함께 나아가는 날이 있겠지요?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마음의 결론은 비참. 참으로 비관스럽습니다. 달라질려고 노력하는 하루하루가 언제까지 계속 될련지. 설마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날이 오지는 않도록 노력하는것이 현재의 저의 최선(기만일지도 모르지만...)이라고 적어봅니다.
...라고 몇일전에 적었습니다. 어제 출근길에 다른사람에의하여 저의 신체가 고통이 가해져서 약간의 상처가 나고 말았습니다. 회사에 출근후에 바로 저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거죠.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압력을 받으면 움직이는것이 저라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런 반성 논조의 텍스트도 그들을 그것들을 기만하는것이 아닌지.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은 그들의 이야기이었지만, 결코 우리들-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으로 제한하는 범위이기도 하고 인간이라는 대분류이기도한-도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친일'이라는 모호한 정의는 여전히 건재한것이 **-우리리라는 단어를 사용할때의 거부감을 설명한 능력이 되지는 않지만 역시 기묘하게 불쾌합니다-의 상황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련지. 국가의 이익을 위한 타국에의 파병. 그들만의 정의 의해서 정의로은 혹자는 의로운 인권을 위한...(끝이 없습니다. 하하하;) 평화 파병에 대해서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지금의 저. 침묵하는 다수속의 저 자신이었습니다. 극복해야 할것들은 너무나 많고 그것들에 대해서 우선순위를 마련해서 순차적으로 모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그건 역시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바꾸거야 할 문제가 아니던가. 모두가 중요한 문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작음 움직임에라도 동참해야겠다고 다시금 결심했습니다.
어제 회사의 지인 ㅅ씨와 이야기했지만 활동가 선생님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인거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적극적 동참은 못하더라도 작은 동조 정도야 저의 범주에서 가능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일단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힘내세요.
6월이나 7월경에 <즐거운 불편>을 보면서 버스에서 몇번이나 웃거나 미소지었는데 포스팅을 쓴다는것은 기억 저편으로 보내고, <세상을 바꾸는 대안기업가 80인>에서 <즐거운 불편>의 후쿠오카 켄세이씨에게 오리농법을 전수해준 다카오 후루노씨의 인터뷰가 있는 부분에서 기억이 났습니다. -_-;; 즐거운 불편의 서문에서도 인용된
"성실성의 개념은 흔히 '말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말로 표현된다고는 한다. 자신은 솔선하지 않으면서 지구를 위한 희생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혹은 나만 뒤로 빠지고 타인을 위험 속으로 몰아 넣어서도 안 된다."
-스타호크, 페미니스트, 지구에 뿌리박은 정신성과 에코페미니즘, <환경사항의 다양한 전개>
스타호크의 말처럼, 당시에는 저 또한 후쿠오카씨 처럼 저의 즐거운 불편 목표를 적어서 실천계획표도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_-;;; 포스팅을 적는것 조차 잊어버린;;;;
사실 저의 경우에는 즐거운 불편이라고 해도 좀 범위가 다르지만요. 여사님의 노동의 고통의 분배. 정확히 말하면 가정내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말기라고 해아할거 같습니다. 그래도 음료수 덜 사먹기는 나름 실천한거 같습니다. <즐거운 불편>을 읽으면서 당시에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던거 같은데 지나니 기억 나는것은 거이 없습니다. 딸네미에 대한 아버지의 교육 에피소드 라던가. 이부분은 카르바니아 이야기의 에큐가 프란에게 살생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습니다. 보면서 느낀것은 어린이들은 참 대단하다는 것 이었습니다. 요즘 보는 김규향씨의 씨네 21과 한겨례 21의 글을 모은 책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느낀 부분이지만요. 소중히 키웠고 그 소중한 존재의 희생이고 그만큼 더 감사하고 귀하게 여긴다라.... 어렵습니다. 사실 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화상인지라. 허허허.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자기가 고생해서 만들었거나 특정한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보다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직접 뜬 스웨터를 선물로 받았을 때를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물건 때문이 아니라, 그 물건에 담겨 있는 '사랑과 정성' 때문에 인간은 특별히 만족하고 행복을 느낀다.
그렇다면 '노동과 생산'을 가정에서 분리해냄으로써 성립하게 된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스템의 발저은, 인간에게서 그러한 '사랑과 정성' 그리고 '소중함'을 빼앗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때 무엇이든 손으로 만들어 사용했던 시대에는, 사방에 손으로 만든 물건이나 서비스가 넘쳤기 때문에, 돈으로 구입한 그것들한테서 굳이 정성이나 소중함을 충족시키려 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이 상품에서 추구했던 것은 단순히 기능과 편리함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균등한 기능을 가진 상품을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대량생산이 유효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상품이 보급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인간은 없을때는 남들 만큼이라도 갖기를 원하지만, 일단 남들과 같은 것을 갖게 되면 이번에는 그들과는 다른 뭔가를 원하게 된다. 그것은 남들과 같은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소비자의 무한한 욕구에 대한 해결책을 현대의 자본주의는 디자인의 변화로 유행을 만들기도 하고, 특정상품을 소유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의 상징인듯 착각하게 하는 것으로 대처해왔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자동차 모델바꿈, 작년에 산 옷을 올해 또 입으면 창피할 만큼 눈이 돌아갈 정도로 자주 바뀌는 패션 유행. 기능적으로 보면 경차로도 충분하건만, 타고 있는 자동차의 크기나 호화로움으로 자신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 같아, 보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자동차를 사고 싶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전거 통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이어서 공무장화를 신고 출근을 했는데, 동료들이 너나없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라며 비웃듯 한마디씩 던지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가죽이나 천으로 된 신발은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기능적이지 못하다 싶었다. 고무장화가 훨씬 기능적이고 비 오는 날에 적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신으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 자가용이나 전철 등 지붕이 있는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도로가 포장되면서, 비가 오는 날에도 가죽구두를 신고 다녀야만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는 상징처럼 되었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고무장화는 불루칼라의 상징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설령 비가 오는 날이라도 사무실거리에서 장화를 신는것을 꺼리는 현상이 생겨났다. 고무장화는 창피하다는 가치관이 지금은 아이들 사이에도 만연하여, 비가 와도 장화를 신지 않고 흠뻑 젖은 운동화를 신고 학교를 오가는 어린이들이 많아졌다. 이처럼 사회가 소비화 되어 감에 따라, 상품이 단순히 사용가치만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위나 타인의 차이를 과시하는 '기호'로 작용하게 된 것을 지적한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인 쟝 보드리야르였다. 소비시대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소비사회의 신화와 구조>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결코 물질 자체를 '그 사용가치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적인 준거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집단의 소속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보다 높은 지위의 집단을 지향하고 현재의 자기집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타인과 구별 짓는 기호로써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물질소비를 항상 조작하고 있다."
다만 물질을 통해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한다는 이 방법은, 심각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즉, 사회에 유포되는 풍요나 행복의 모델에 자기 자신을 맞춤으로써 개성을 조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개성화하고자 하면 할수록 진정한 자신의 색깔은 사라지고 오히려 몰개성화 되어간다는 모순이다.
소비재가 거의 대부부느이 사람들 사이로 전파된 데다 소득의 격차도 사라지고, 물질을 통한 자기차별화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요즘, 이 모순은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이상 사고 싶은 것이 없다는 현상은, 그 단적인 표상이다. 이런 소비사회의 모순을 자각한 순간에 사람들이 되돌아갈 곳은 역시 '정성'과 '소중함'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호화된 물질에 인간이 조종 당하고 있는 현상에서 벗어나, 인간이 물질을 사용하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진정한 만족감과 행복감은 과연 무엇을 통해 얻어지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즐거운 불편 소비와 행복의 관계, 8월 96~99p
<즐거운 불편>의 구조는 크게 매달 후쿠오카씨의 목표와 그리고 그것들을 실천하면서 느낀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다음달이 이어지는 함께가는 '즐거운 불편'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와 '즐거운 불편'에 대해서 일본의 저명 인사들과 대화하는 대담으로 나누어집니다. 사실 가만히 세상을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저자신도) 과연 이렇게 살아서 10년후의 내일을 기약하기나 할까? 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달라져야지 스스로가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는 아직까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허비하고 그리고 어두워지는것이 보통의 저의 사고의 흐름인거 같습니다. 이런 나날들이 계속되는데도 희망적이라고 생각하고 대안을 생각하고 그 불가능해 보이는 대안들을 실천해나가고 그런 생각들을 전파하고자 노력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매우 부끄러워졌습니다.
덤_
5월에 병원에 입원했을때 아침 저녁으로 달라지는 병명의 결과를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주었던 책중 하나가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채혈하고 지루하고 또 지루한 아침 드라마 소리를 들으며 시작되었던 적다면 적었지만 지루했던 병상(?) 5일동안 우울해지면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보면서 위로했었습니다.
그랬던 그였기에 <서울을 여행하는 라이더를 위한 안내서>는 좀 많이 실망했습니다. OTL
앞 부분에서는 홍은택씨가 거주하는 동네가 이사오기 전 동네인 '일원동'이라서 집에서 회사까지 가는 출근길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는 매우 생생했었고 자전거를 타면서 겪는 여러가지 곤란함에 대해서 그의 방식으로 유쾌하게 이야기 하는 몇가지 부분에서는 지하철임에도 불구하고 박장대소하며 웃기도 했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예전에 보고싶었는데 보지 못했던 <한국의 아파트 연구(맞던가?)>의 인용이라던가 옛서울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뒷 부분의 대회이야기는 사실 저는 거이 하품을 하면서 봤습니다. ㄱ-;;; OTL 아무리 관심 없는 분야라지만 좀 지나치게 지루하다는 느낌이라서 홍은택씨의 즐거움이 없어진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뭐 여튼 그랬습니다. 아니면 직장 동료와 홍은택씨의 신간을 보고나서 대화한 결론처럼 현실과 여행의 차이일까요? 지면에 서있어도 유쾌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이라면 저는 참으로 부끄러운 사람이 되는데;;; 부끄러운 사람이기때문에 뭐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간에 10월 9일 저는 저의 새로운 사람다운 불편을 실천계획표를 세웠습니다.
사람다운 불편편.
1. 귀가후에 바로 방을 치운다.
(부끄럽지만 몰아서 치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전에도 사무실에서 바쁜 업무로 어지러진 책상에 있던 저의 디카가 추락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_-;;)
2. 샤워는 가급적 11시전으로 하도록 노력한다
3. 저녁 식사후에 설거지는 반드시 바로 하도록 한다. 설거지후 음식물 찌꺼기는 처리후 그날 음식물 찌꺼기를 음식물 수거함에 넣도록 한다.
4. 방은 자기전에 꼭 닦도록 한다.
5. 가급적 주 1회 빨래를 하도록 하도록 노력한다.
즐거운 불편편.
1. 외출시 물을 가져간다.
2. 사용하지 않는 방의 불은 바로 꺼둔다(30분이상 부재시)
3. 사용하지 않는 전원은 코드를 뺀다.
4. 잘때 양말을 신고 잠바를 입어서 보일러 온도를 1도 낮춘다.
5. 샤워시에 타월은 2개로 제한한다.
즐거운 몸편.
1. 주 1회 자전거를 타도록 한다.
2. 50분 일하고 10분 눈을 쉬도록 한다.
3. 사무실에서 3회 체조를 한다.
4. 다리를 떨지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업무에 임한다.
5. 바른자세로 생활한다
OTL;;;; 적다보니 너무 늘어서 5까지 했습니다. 끝이없어...라고 생각해보니;;; 이래서 작심 삼일이었나 봅니다. 저 5가지 과연 얼마나 실천 가능할지 ㄱ-; 매주 1회씩 중간 정검 하도록 힘내보겠습니다.
마크 데이비스의 <조류독감>을 먼저 보고 싶었습니다만, 아직 책이 출판되지 못한 관계로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책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저의 무지. 두 번째는 아마도 저의 수적 감각 세 번째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가 취한 서술방식이 아닐하고 생각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여러나라의 여러가지 슬럼의 이름이 거론되고 이어서 서술되어지는 그 참상들. 문제는 그 참상들이 끝도없이 이어진다는 것 이었습니다. 끊임없이 나오는 슬럼지역의 여러가지 고통에 대한 통계들. 고통을 이해하고 어딘지 생각해내며 가기에는 데이비스의 흐름이 너무 빨랐거나 아니면 저의 문제이겠지요. 아마도 저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요. 곧 있을 중국의 올림픽 언급을 하며 아직까지 단기간에 슬럼을 쓸어버린(!) 국가는 88 올림픽 시절의 대한민국이더군요.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미 중국이 88 올림픽 시절의 대한민국의 기록을 연일 갱신하고 있다고... 그러고보니 사당동의 달동네가 포크레인으로 밀렸던 것은 딱 그시점이네요.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거기까지. 저는 부끄럽게도 거기까지만인 인간이거든요.;;; 앞으로 달라질지 모른다는게 더 문제겠지만요. 사당동 신림동 봉천동... 그 많던 달동네는 사라지고 모두 아파트 단지가 되어서 우뚝 서있습니다. 온 가족이 한방에서 자고 마을주민들이 화장실을 함께쓰던(영화 파워오브원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은 어디로 몰렸으며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 정착해있는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아니면 주류인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저 밖으로 몰려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난에 대한 지배적인 시선에 저도 모르게 동조하는 자신을 가끔 발견하게 됩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이야기하는 것 처럼 그들의 프레임의 언어로 대화하며 그러다보니 그들이 생각하는 흐름대로 흘러가는 거 같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정말 이해하기 쉬운 구조로 그리고 그런 텍스트들로 서술되어서 정말 왜 세계의 절만이 굶주리는가에 대해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쉽게 닿을수 있었습니다. UN의 식량조사관(이던가? 책을 본지 좀 시간이 지나서 가물가물하네요.)인 저자가 아들에게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악순환의 반복과 그 이유에 대해서 차근차근하게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있는데 그 나라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대부분의 땅에서 플렌테이션 농업을 하는 이유, 아젠더 대통령 관련 일화, 다국적 대기업들의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했던 만행들...
대안의 가능성 앞에서 눈앞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다수에게 행하는 만행들에 대해서 들으며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지구상에 존재해야할 가치가 있는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생산한 것들을 쉽게 소비하며 그 소중함을 간과하며 소비하고 또 소비하고 버리고 또 버리기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일상 사이에서 가능성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것인지. 어제 사형수(참을 수 없는 극대화 설정에 대해서는 일단 접겠습니다.)에 대한 만화책을 보면서 든 생각은 국가테러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한 것인가? 힘을 가진 '우리'라는 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목표로 할 때는 그런 힘을 가지고 그 힘으로 이미지를 생산하여 복제하고 확대하여 그들의 프레임으로 그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이미지를 각인시켜왔던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월적인 그 힘은 그래서 두려운 것일지도. 영웅을 제조하고 신화를 만들어 기록하고... 있었던 것을 없었던것으로 만들어 내는 그 힘. 그곳에 있는 그들은 사라져가고 있는데 여전히 강건너 불구경은 이어지고있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사라져도 내일은 온다는 것. 정말 참담합니다.
친우 최선생의 추천이었던 <페르세폴리스>를 보면서 받았던 그 느낌은 불행히도 <차도르를 벗겨라>에서도 이어졌습니다. 회사에 계신 두분께 <페르세폴리스>를 빌려드렸는데 모두 정도의 차이는 이었었지만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르잔 샤트라피나 베흐야트 모얄리. 두분다 이란에서 나와서 살아남으셨고 그리고 이렇게 책을(만화를) 출판하여 이란의 실상에 대해서 알리고 있었습니다. 가족과 생이별했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당신들은 책에서 수없이 이야기했습니다. 매우 주관적이지만 그건 역시 '축복'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문으로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 만약 당신이(당신의 가족이) '힘'이 없다면 당신은 책을 쓸 수 있는 지금을 맞이했을까? 등등의 생각들을 하다보니 점점 명로하게 불쾌해졌습니다.
'서발탄은 말할 수 없다.'는 말은 서발턴이 죽을 힘을 다해 말하려고 해도,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spivak. 1996)
타라 당신이 그때 사형당하지 않아서 베흐야트 모얄리가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신은 어떨까?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에서 나온 나이든 흑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할 것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돌아온다고 하여도 그들은 이해할수 없는 언어로 무장되어있거나 아니면 외곡된 화상으로 여러 지면을 통하여 다수의 사람들에게 저자(혹은 기자)가 원하는 대로 그려지는...
이 명쾌한 불쾌함은 그들이 아닌 저만이 받는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역시 화가나는건 어쩔수 없는거 같습니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가 아니라 그건 역시 이데올로기(사회적 정체성)에 지배당하는 사회에 희생 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들 또한 이데올리기의 희생자가 아니던가요? 여러면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당신이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을 비난 할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은 슬퍼할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주홍글씨를 달아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건 교만입니다.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군상들의 교만. 당신의 교만 그리고 저의 이런 교만.
인생은 교만 교만 교만 교만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외곡화상을 통하여 하위주체 해석하기 외곡화상을 통하여 하위주체 해석하기 외곡화상을 통하여 하위주체 해석하기 외곡화상을 통하여 하위주체 해석하기...
크리컷을 하던 당신의 사진을 10년후 어느 상점에서 구입한 노인. 사진을 살 수 있어서 기뻐하는 그가 그들의 마음. 원하지 않던 원하던 알던 모르던 그들의 해석은 계속 되지만 그 사진이 당신의 손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다행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삼년 동안 이어진 가뭄 끝에 잘랄라바드 하늘 위에서 단비처럼 항공기 기내식 포대가 떨어지게 된 것이다. 문화적 무지와 몽매는 차라리 잊자. 수개월동안 끝도 없이 이어진 굶주림과 찢어지는 가난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몰이해에 기초한 미 정부의 식량 공수 여론 몰이는 아프간 민중의 극심한 고통과 비극을 이용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잠시 시나리오를 뒤바꿔 보자. 탈레반 정부가 뉴욕에 공습을 감행한 뒤 "우리의 목표는 미국 정부와 정책일 뿐"이라고 항변한다고 상상해보라. 공습 중간에 잠깐씩 아프간 국기가 세겨진 아랍 음식 봉투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말이다. 선량한 뉴욕 시민들이 이런 것들 때문에 아프간 정부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들이 배고프다손 치더라도, 식량이 정말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공중 투화된 음식을 먹었더라도, 어떻게 뉴욕 시민들이 자신들이 꺽은 모욕과 탈레반의 생색 내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최근 사우디 왕자가 미국의 중동 정채의 우호적인 조언과 함께 보낸 1천 달라짜리 선물을 정중히 거절했다. 자긍심은 부유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촉발되는 분노는 테러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발시킨다. 중오와 복수심은 한번 열어버리면 다시 닫을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테러리스트와 그들의 지원자들이 죽을 때마다 수백 명의 죄없는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수백 명의 무고한 인명이 살상될 때마다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이 다시 생겨나고 만다.
이런 악순환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말장난을 잠시 졎혀 두고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과연 모두가 받아들일수 있는 '테러리즘'의 정의를 발견해 냈는가? 한 국가의 테러는 다른 국가의 자유를 위한 투쟁일 때가 많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 뿌리 깊게 배여 있는 폭력이라는 모순에 놓여 있다. 일단 폭력이 정당한 정치적 도구로 용인되면 발란이건 자유를 위한 투쟁이건 간에 테러는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미 정부 스스로도 전세계적으로 반군에 대한 재정 및 무기 지원과 보호를 해왔다. 미 중앙정보국(CIA)과 파키스탄 쳡보부(ISI)는 지난 1980년대 친소 아프간 정권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규정됐던 무자헤딘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켰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들 무자헤딘과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미국 건국의 영웅들과 도덕적으로 동격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전쟁은 평화다, 아룬다티 로이, p40
모나리자 스마일(Mona Lisa Smile, 2003) 감독: 마이크 뉴웰 출연: 줄리아 로버츠,키어스틴 던스트,줄리아 스타일스,매기 길렌할
정말 우연히 동생과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잠이 오질 않습니다. 오늘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말이지요. 영화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지만, 지금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동시대 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느끼기에는 말이지요.
여전히 그것들에 의하여 지배받으며 그 가치관을 대를 물려서 강요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그 포장은 '정녕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렇지만 의지가 약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저는 매우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일까요?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게 답입니다. 그 세계를 들여다보고 맙니다. 그리고 이미지화 해버립니다. 그편이 가끔 정말 사실은 매우 종종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한건 저에게 있어서 매우 견디기 힘들며, 트러블을 유발하는 모든 것에 취약해서 생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피해서 걸어가다보면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에 그곳을 걸어가고 있더군요. 하하하하
이타보다는 한없이 이기에 가까운 존재이며 그걸 바탕으로 앞으로 나가기에는 정말 괴롭습니다.
가끔은 믿고싶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그냥 인정하면 좋은데말이지요. 그런거라고…….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하다고…….
역시 모르겠습니다.
얼마전에 '이기를 억제(?)하려고 노력하여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노력하는 것'에 대해서 저에게 인지시켜주셨습니다. 이 순간 그 영화를 이해해주는 동생님이 있어서 기쁘고 '이기를 억제하려고 노력하는 저'를 좋아해주는 그 분이 좋습니다. 감사하고 있어요.
그렇지만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좋은 걸까요?
이미지를 재생하며 그 이미지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저 또한 재생산에 참여, 강요하며 그 재생산을 위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안정된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미묘한 이중성인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 근원적인 문제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 것은 이미지를 주입받으며 그리고 그 이미지가 안정이라는 것을 받아드릴 때까지 강요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 지상에서 카메라의 눈앞에 노출되지 않는 고통이란 없는 듯 하고, 다시 우리는 미디어가 펼쳐내는 이 고통의 이미지들의 과잉 앞에 노출된다.
정지영상이나 동영상에 덧씌워지곤 하는 모자이크는 오히려 이 고통의 스펙터클을 더 사실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그 이미지 속에 재현되고 있는 고통이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와 시공간을 같이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정작 고통 자체는 증발되고 사라진다. 우선 고통의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충격의 효과들은 그 자체로서도 단명할 뿐 아니라, 상업주의 매체들이 유발하는 끝없는 자극의 인플레로 인해, 하나의 고통이 이미지가 유발하는 충격과 자극은 곧이어 또 다른 고통의 이미지에 의해 쉽게 상쇄되기 때문이다.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미지로서의 고통, 그것도 타인의 고통은 쉽게 망각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의 스펙터클의 외설성 그 자체에 있다. 투명함, 황홀경, 외설 등의 모든 것이 지수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포화 속에서 보드리야르는 역사, 정치, 성, 주관성, 육체 등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에 주목했다. 고통 역시 고통의 스펙터클 속에서 사라진다. 살을 에[는 체험으로서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동정과 공유는 이미지 속에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현되는 고통 역시 그 실체가 온전히 재현되지 않는다. (탈)현대사회의 대중매체에서 맥락에서 탈각된 이미지들은 몽타주 속에서 고통 역시 파편화되며, 그 고통을 유발한 사회적 관계망은 이미지들의 연쇄에서 미끄러져 나간다.
그 결과 고통의 거대한 스펙터클은 정치나 경제와 무관한 개인적 불행의 일회성 이미지들, 자신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상실한 고통의 이미지 덩어리로 간락한다. 나아가 고통의 이미지들뿐 아니라 고통 자체가 그렇게 된다. 사진의 발명 이래 시각 이미지는 최고의 존재증명으로 군림해왔고, 이제 21세기의 시각 이미지들은 인간의 눈에는 기술적으로 거이 완벽하다. "여기 있다. 무슨말이 더 필요하냐?"는 이 이미지들의 극사실주의는 고통과 관련된 반성적 사유를 봉쇄해버리가 십상이다. 이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이 스스로를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매혹은 더 이상 생산의 양식이 아니라 사라짐의 양식이다. 그 매혹이 고통에의 그 아슬아슬한 매혹이라 하더라도.
-고통의 스펙터클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주은우, 167p~168p, 당대비평 2005 신년특별호 불안의 시대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인 구조의 시선에 대해서 의구심 없이 그대로 재생산하여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정말 지질한 교만함까지. 아아 이 부분이 최고입니다.;;; 울고 싶습니다.;;; 미치겠네요.;;;;
그 사람이 저에게 저는 그렇게 보아주지 말았으면 하는... 결코 섬세하지 않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였고 저는 그 재생산된 재배구조에서 한발자국도 걸어 나가지 못한 채로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의 절망은 얼마나 컸을까요? 이해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그런 시선으로 유린-유린이라고 말해야한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럽습니다―당했다고 생각하면요. 수많은 편견들 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래도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이라던가 "이사람만은"이라는 것을 저는 철저하게 배신하고 짓밟아 버렸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뒤늦은 변명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저는 정말 한심한 인간이어서 그런 이중적인 잣대, 구조적인 시선, 차별적인 담론을 재생산하는 그런 군상이었습니다. 편견은 상대방을 가두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신도 그 편견에 가두어 진다는 것.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부분을 언제나 간과해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모순덩어리라지만, 언제나-거의 매번- 자신에 대한 적용은 본능적으로(?) 회피해 버리고 맙니다. 모순된 자신에게만 무의식적으로 제외했다는 것. 똑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지. 이 제와서(!)라도 깨달아서 다행일까요?
그렇게 저의 무지는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속박하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저와 함께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너무 늦은 거 같기 도하고. 오늘은 당신에게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타인의 부끄러운 점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는 저에게 당신들의 존재는 정말 축복입니다. 되돌린다는 아마 불가능하겠지만,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 그냥 지나가는 타인의 이중성도 견디지 못하는 것도 정말 어린아이여서가 아닐까 이제 와서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그런 저 자신을 잘(?) 견디고 있었던 것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무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부끄러운 저와 마주서는 것. 그리고 바로 잡는 것. 그리고 노력하는 것. 숙제가 정말 많습니다.
저의 한심함을 인지하도록 도와주신 정희진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페미니즘의 도전>이 아니었다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전에 접했던 것은 지배적 담론이나 성차별적인 구조가아닌 인종적인 부분이 더 지배적이었으니까요. 저의 공부의 길을 인도해주신 세분께 감사드리며,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들어주신 그녀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격려해주며 부끄러운 저에게 바른 지적을 해준 그녀에게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릴때부터 함께한 소중한 당신에게 너무나 크나큰 상처를 준 점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이런 저를 인지시킬려고 노력했던 당신에게도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저와 관계가 없는 당신. 그런 편견으로 당신을 바라보아서 정말 미안합니다.
저를 그런 군상에서 해방시켜주었던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의 텍스트들의 일부를 적었습니다.
(중략)......내가 '편리'와 권력을 누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문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것이다. 사회운동은 매순간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 않고 멈춘다면,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새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 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신이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이것은 폭력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 진보 없는 한국의 '진보' p130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매춘 여성?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청산'을 요구했다. 성노예제 조직과 관리라는 일본의 전쟁 범죄가, 일제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강제 동원 과정에서 협조하고 위안소를 위탁 경영한 한국인 관리자, 위안소를 찾은 한국인 병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일부 군대에서 공식적.비공식적으로 자행된 여성의 성착취,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 사실상 방조된 미군 기지촌에서의 성매매 문제도 청산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 모순으로만 제한하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성폭력과 성매매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여성 인권 침해 사안으로 파악한다. 때문에, 일제가 물러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 인권 침해인 성폭력과 성매매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실까지도 청산의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남성 중심의 획일적인 언어와 인식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수용 이전에, 그의 급진적 인식은, 나와 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곧바로 송길원 의원에 의해, "정신대=공창제"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으로 매도당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영역(결혼 제도)과 비공식 영역(성매매, 성폭력......)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에게는 가족 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을 허용한다. 남성은 두 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지만, 여성이 비공식 영억의 성적 제도와 연관되는 것은 낙인을 의미한다. 특히, 성판매에 종사하는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성활동(섹슈얼리티)이 성별에 따라 이토록 의미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의 성은, 여성의 자아와 인격, 가치를 좌우하는 주요 요소로 간주된다. 그래서 성폭력과 성매매 제도가 여성을 통제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한 사실은, 이 교수의 발언에 대한 '온 국민'의 분노, 그 감정의 정체가 성판매 여성에 대한 완벽한 타자화와 혐오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자발적인' 성판매 여성에 대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성판매 여성이라는 구분보다, 성폭력과 성매매가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질문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은 일제에 의해 집단 성폭력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성폭력은 만연해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기지촌 성판매 여성들, 2004년 여성 노동 인구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에 이른다는 성산업 종사 여성들, 그리고 밤길 걷기를 두려워하는 여성들의 일상적 공포는 모두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현상들이다.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의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성을 '순결한'피해 여성과 '타락한'성판매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방식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자발'과 '강제'라는 '반대' 현상이지만, 여성의 시각에서는 구별될 수 없는 연속선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과 성매매의 원인이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여성을 남성의 성 권력의 희생자와 '자발적으로 남성의 욕구에 부응한'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결국은, 남성을 위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나는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한국 여성들이 '성매매'로 전쟁에 '참가'헸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며, 당연히 사과,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 시대 '군 위안부'문제의 가시화와 역사화는 물론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는 여성의 성 피해가 민족주의의 이해와 일치할 때에만 문제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일제 시대 '군 위안부'경험을, "우리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여성은 물론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본다. 즉, 전시 성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라기보다는, 여성의 생식기 능력 훼손이라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위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가능하게 된다.
한국 남성들의 "우리도 일본 여자를 강간하자."라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림략과 정복,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 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의 침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우너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 진보 없는 한국의 '진보' p139,140,141
(중략)......이제까지 가정 내 폭력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주된 근거는 개인(구타 남성)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였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은 인간이 아니므로 여성의 프라이버시는 남편에게 속해 있으며, 폭력당하는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공.사 영역의 분리, 대립은 허구이다.
-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인권 p163, 164
(중략)......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는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라는 가부장적인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 간 성폭력, 성 전환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 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전환자든, 성기 삽입이든, 이물질 삽입이든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인권 침해이고 성폭격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부녀'에 대한 침해죄-'사유재산권' 침해-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규범 때문에 성폭력 특별법이 있어도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처별하기 어렵다.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가임이 가능한 부녀자'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눈으로 다시 보는 인권 p171
여전히 많은 의문들을 남아있지만, 적어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앞으로의 숙제. 그리고 "노력하는 저 자신을 만들면 어떻게든 해소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정은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인 시선과 그런 편건과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통에 대하여 타인을 하위 주체로 만들어서 고통을 해소했던 것이 아닌지. 고통의 타자화. 지배적 담론과 함께 저는 저의 욕구를 그런식으로 풀고있었던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는 몸이 많이 아프고 슬펐어. 아마 너는 이런 아픔 속에서 겪는 절망을 상상할 수 없을 거야.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무시무시한 불안과 때로는 그 무엇으로도 진정시킬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곤 하지. 그래, 고통도 절망도 나 혼자, 다른 누구도 없이 오직 나 혼자서 겪어야 해. 앞으로 몸을 구부릴 수 없기 때문에 오래 글을 쓸 수도 없고, 다리에 엄청난 통증이 몰려오기 때문에 걸을 수도 없어. 책을 읽는 일도 나를 피곤하게 할 뿐이고. 하긴, 읽고 싶을 만큼 흥미 있는 것도 없지만 말이야. 이제는 우는 것 외에 달리 할일이 없는데, 어떨 땐 우는 것조차 힘에 겨워. 내 방을 둘러싼 벽이 나를 얼마나 절망에 빠트리는지 넌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이게 전부야! 이제 이런 절망에 대해 너에게 더 이상 말할 수 없구나….
- 1927년 4월 25일 알레한드로에게 보낸 편지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1940년
알겠니, 내가 널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상처를 입은 사슴 1946년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 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도 작은 이 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 너무 넓고, 너무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그녀의 그림은 감정을 전이시키는 힘이 있어서 그녀의 그림들에 나의 밤은 지배받고 있었다. 아침. 자다가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잠을 깨고. 결코 그런 그림들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행복했었다면 그런 그림은 존재하지 않았을려나? 만약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저책도….
좀 더 평범하게 보통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는 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닌데……. 그게 그녀의 불행의 근본의 원인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견디기 힘들어요. 그건 말이지요. 승화 아니 고통을 응집시켜 표현한다고 해서 근원이 해소될리는 만무한데, 오히려 자신의 그림으로 인하여 더 한없이 내려갔던 건 아닐까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고민하며 살고 싶지 않을 거라고. 정말로는 그건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그저 그걸 표현함으로서 어떤 무언가가 해소되었던가 아니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살아 갈 수 있는 거였는지. 그로 인하여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을 까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멈출 수 없었던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건 그 어떤 것으로도 그건 채워질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