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푸른 하늘을 기억하고 있다



역시 월덴님의 추천으로 북크로싱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
신청 할 때는 매우 용기를 내서 읽었는데요. 책이 비전문가가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었습니다. 설명하는 방법이나 단어의 선정 모두 일반인을 고려하고 책을 쓴거 같았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습니다. 저의 상담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했고 거기에 저의 사례도 있더군요. -_=;;;;;;
그리고 상담심리를 전공한 선생님들도 개인 상담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럴수가아아아!!! OTL 나는 바보인가. 머엉~  저에게는 매우 쇼크. 병원에 가도 의사선생님이 상담을 해주는 병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병원도 있는데... 그러고보니 병원에서도 상담선생님이 상담해주셨;;;
공동 저자중 한분인 김환선생님이 운영하는 사이트가 있어서 거기도 가보고 뭐 그랬습니다. 선생님의 인상이 좋았어요. 생각했던 것 보다 좀더 젊은 분 이셨구요. 친구랑 아마도 함께 가 볼지도? 상담 받고 싶은데 병원은 그렇다는 분들에게 이야기 해드리면 좋아할거 같았어요. 

책을 읽으면서 느낀건데요. 다른 사람을 상담해주는 그 분들의 일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내력이 매우 필요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 좋았어요. 선생님이 어떤식으로 상황을 보고 판단하고 말하고 받아드리는지 좀 알게되어서 기쁘다고 해야하나요? 전에 읽었던 <트라우마>에서는 내담자(환자)에게 전이되어서 고통받는 상담자의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졌었거든요. 그건 정말 공포였어요. 저렇게까지 영향을 주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감정적으로 학대당하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여튼 이 책은 상담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해야하나요? 뭐 그랬습니다.

저는 상담 받았던 시절에 비슷한 상황의 친구에게 매주 상담 내용을 이야기 해주었거든요. 저 자신이 좋아진걸 가지고 친구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반응은 보통(상대방을) 울린다, 부정받는다,  피한다, 인정하나 자기는 그런 단계가 아니다 등등 이었는데요. 그 이유를 명쾌하게 알게되었습니다. 여튼 뭐 그랬어요. 말하고 나니까 조금 많이 부끄럽네요.

상담자는 먼저 관계 원리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노력을 존중하며, 내담자의 어떤 견해도 비판하지 않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탐색한다. 상담자가 보이는 이런 반응은 평소 주변 사람이 보이는 반응과는 다르기 때문에 내담자는 자신을 더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고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부모나 친구처럼 조언이나 격려, 충고, 비판을 하지 않으며, 설사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내담자의 마음을 따라가며 반응한다. 이에 반해 일반인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며 반응한다.

- 7장 상담 중반부의 작업, 문제해결하기와 상담의 원리, p 231


뭐 그래도 크게 공감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종교의 힘으로 극복하는 친구들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어요.
'커밍아웃'한다고 해서 별로 손해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다는 친구의 이야기도 좀 공감이 갔어요. 저는 그런것 보다 다른 것들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런거는 무시하자는 입장이었거든요.
자신이 보는 것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돌아가면 다른면이 있다는걸 보게 해주는 거는 정말 많은 수련을 받아야지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끊임없이 기다려주고 받아주고 인정해주고 타이밍을 보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고 자기 생각을 스스로 더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느 부분은 비폭력 대화 같다고 느낀 부분도 많았어요. 상처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대화법이요. 특히나 '왜'의 사용에 대해서 조심스러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때 그랬습니다. ^^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어하는 분이 있다면 한번 쯤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아래는 매스터슨이 이야기한 '참자기' 입니다. 본인은 열가지 중에서 모두 해당 되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거 같아요.
참 자기

첫째, 여러가지 감정을 깊게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감정을 외면하거나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고 행복할 때는 행복해하는 등의 감정을 깊게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이다.
둘째, 자신의 적당한 권리를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늘 책임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정도는 받을 만하다는 권리를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셋째,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넷째, 자존감을 인정할 수 있는 상태, 즉 자기를 존중하는 능력이다. '나는 이런 점은 못났지만 그래도 이런 점은 괜찮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섯째, 고통스러운 감정을 달랠 수 있는 능력이다. 좌절을 하거나 이별을 했을 때 고통스러운 감정을 진정시키고 달랠 수 있는 능력이다.
여섯째, 삶에 목표를 정해서 매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곱째,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창조력이다.
여덟째, 친밀감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대인관계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는 감정을 보일 때 거부감을 갖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여기엔 성적인 친밀감도 포함된다.
아홉째,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인생은 왜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외로울 때 누군가를 찾고 의지하려고만 한다면 의지할 사람이 없을 때는 다시 외로움이 찾아올 것이다.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거싱고, 그렇기 때문에 밖에서 찾이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열째, 자기의 연속성이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때로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활발한 모습을 보이다가 또 다른 곳에 가면 얌전하고 과묵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충동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을 모두 나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할까?"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에겐 이런 모습도 있을 수 있어."라는 식으로 자신을 수용 할 수 있어야 한다.

- 8장 상담의 종결, 내담자의 변화와 종결의 기준, 매스터슨, p291

메모_
* 기본적인 귀인 오류: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행동을 했을때,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을 피치 못할 상황이나 환경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상황이나 환경을 고려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간적 됨됨이 자체에 원인을 돌리는 것
* 조건부 가치: 어떤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만 존중해 주는 것. 조건부 가치는 타인의 존중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깊은 욕구를 억압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음. 상담자는 내담자를 존중할 때 어떤 조건을 달지 않음.
* 완전하게 체험하지 못한 것: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려가지 사건을 경험하며, 이때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어떤 느낌에 대해서 "난 이런 느낌을 가져선 안 돼." 하는 식으로 감정을 억압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경험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임. 체험되지 않은 감정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마음의 한구석에 쌓여 가게 된다. 그리고 언젠간 감정의 역습이 오기 마련임. 쌓아 놓은 감정이 많은 내잠자는 감정의 역습을 막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들여서 감정을 억압해야만 함.
* 체계적 둔감화: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해 공포증이 있을 경우 공포증을 유발하는 존재나 관련된 상황을 천천히 경험하게 함으로써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증을 완화시키는 것
* 전이(투사적 동일시): 내담자가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게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을 현재의 사람, 특히 상담자에게 투사하는 것.

http://walden3.kr/1243
서울임상심리연구소(김환선생님) http://yesuc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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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 되는 부모>

리뷰/텍스트 2009. 3. 1. 00:59 by dung

 

푸른육아에서 나온 수잔 포워드 선생님의 <독이 되는 부모>는 월덴님의 댁에서 북크로싱 해서 빌려보기 전부터 사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 이었습니다. 책 제목이 살 수 밖에 없었거든요. 수잔 포워드의 유명한 다른 저작들은 어린시절에 관련한 제목보다는 연애에 관련한 책들 이었어요. 근데 아마도 그 책들도 어리시절에 대한 언급이 끊임없이 나오고, 강조하고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아마도 얼마전에 읽은 <당신이 나를 위한 바로 그 사람인가요?>의 영향이 좀 있기도 했고, <독이 되는 부모>를 읽어서 이기도 합니다. 심리치료에 관한 책중에서 저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좋은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발전적이었던 좋은 책들은(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전부 지금의 행동의 이유를 과거에서 찾고 있었어요. 과거를 보면 답이 보이는 것이 사실인데, 참 그걸 인정하기도 힘들도 인정한다고 해도 그 과거를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든거 같아요. 저는 그랬거든요.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부모가 자신에게 했던 언행들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하고 그것들이 지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인정하는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앨리스 밀러 선생님이 지적했던 것처럼 사회에서 내려오는 그 변하지 않는 규칙을 건드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러는 것이 부모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저 자신이 막장이라고 칭하는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형이지만, 저 자신도 아직도 그런 생각이 남아있고, 그것과 이것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수잔 포워드는 앨리스 밀러보다 더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의 힘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 책은 2002년에 쓰여진 책이었어요. 앨리스 밀러의 저작은 더 오래전이었습니다.
이 책은요. 자신의 부모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과거에 부모가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것에 대해서 부모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리고 어린시절의 자신에게 지금의 자신이 위로해주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까지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딱 한 번 부모님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었어요. 정확히는 아버지 였습니다. 그건 전하지 못했어요. 스스로도 마주 볼 용기가 없었어요. 다만 그걸 좀더 보완해서 더 많은 사실과 그때의 저의 비참했던 감정을 적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책에서 지적했던 것 처럼, '언제 행할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는...'이 아니라 구체적인 '언젠가'가 되도록요.

책은 크게 2부로 나누어져 있고, 전반부에는 독이 되는 부모에 대한 자세한 분류와 상담자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후반부에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존의(제가 읽었던) 책들보다는 더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라고 말 한 것이, 그 방향과 방법이 정말 구체적 이었습니다. 다른 책들과 관리 그 방향과 방법 제시에 대해서 책에서 절반 가깝게 할애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독이 되었다는 걸 완전하게 인정하는 걸 어렵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보통(일반적인, 혹은 정상이라고 분류되는 이라고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의 사람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자유롭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독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그랬었고(그것것들 통용되는 시대였고 다른것들이 더 우선시 되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런 가치관들을 가지고 자식들을 키워왔기 때문이고, 대안이라던가 그런 방향의 노력들은 거이 미미한 시대였으니까요. 그런 시대를 거처서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의 성인이고, 자신이 느꼈던 부당함에 대해서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고 그리고 가족주의적 가치관(혹은 가족근본주의)에 의해서 지금도 끊임없이 서로간에 희생을 강요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나라의 '가족'에 대한 신화는 저 자신이 바라보기에는 정말 한계를 넘어서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가 사회가 해야할 부분까지도 가족에게 넘기고 그걸 가족이 감내하고 이겨내는 시스템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건 저의 가족에 대한 것들을 일반화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의 주위에는 참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요. 포털 같은 장소에 올라오는 상담 글들을 봐도 그렇구요.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극히 일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머 여튼 책에서는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독이 되는 부모였다는 걸 판별하는 기준으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래의 기준에서 1/3이상 그렇다는 답이 나온다면 아마도 당신의 부모는 당신에게는 독이 되는 부모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정도 해당되면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시작했습니다.(자상한 배려로 느껴졌어요. 당신의 부모가 독이 되는 부모였다고 단정하고 시작하지 않는 것이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_
 - 부모가 당심능 가치 없는 아이라고 무시했는가? 부모가 모욕적인 별명을 지어 부르거나 비난했는가?
 - 부모에게 맞은 적이 있는가? 부목 물건을 집어던졌거나 먼지떨이 등 다른 도구로 맞은 적이 있는가?
 - 부모가 술을 마시거나 약물을 남용했는가? 혼란스럽거나 불편하거나 가출하고 싶거나 괴롭히거나 부끄럽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 부모가 정서 장애 혹은 정신병이나 시체적 결함 때문에 우울해하거나 부모 역할으 ㄹ제대로 하지 못한 적이 있는가?
 - 위 항목의 이유로 당신이 부모를 돌봐야 했는가?
 - 부모가 비밀로 해야 할 어떤 일을 당신에게 저지른 적이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든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가?
 - 부모 때문에 몹시 놀란 적이 있는가?
 - 부모에게 화를 내는 게 두려운가?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인간 관계_
 -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학대하는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
 -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운가? 그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거나 당신을 배신할 거라고 믿는가?
 - 인생은 그리 즐거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삶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가?
 - 당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는 게 괴로울 때가 있는가?
 - 사람들이 당신의 참모습을 알게 될까봐 걱정스럽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참모습을 알고 나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 잘되어가고 있는데도 괜히 불안하거나,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운가?
 - 가끔 이유도 없이 화가 나거나 슬픈가?
 - 모든 일에 완벽주의자인가?
 - 긴장을 풀거나 즐겁게 보내기가 어려운가?
 - 아주 잘하고 있을 때조차 '마치 부모님처럼' 행동한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어른인 당신과 부모의 관계_
 - 부모가 당신을 여전히 아이처럼 대하는가?
 - 중요한 무언가를 결정할 때 부모의 허락을 받는가?
 - 부모를 만나고 난 다음에는 어떤 감정이 강하게 들거나 특별한 행동을 하게 되는가?
 -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걱정스러운가?
 - 부모가 당신을 위협하거나 죄책감이 들게 만들어 당신을 조종하려드는가?
 - 부모가 매사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드는가?
 - 부모가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이는가? 부모가 행복해하지 않으면 그게 다 당신 탓 같은가? 부모를 만족시키는 게 의무라고 생각하는가?
 - 무얼 해도 부모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 같은가?
 - 부모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가?


독이 되는 부모의 유형

- 신처럼 군림하는 부모
신과 같이 자신들 나름대로 규칙을 정하고 따르라고 강요함으로써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부모
- 의무를 다하지 않는 무능한 부모
끊임없이 자신들의 문제에만 얽매여 있고, 마치 아이를 축소판 어른으로 생각하여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학을 하지 않는 부모
- 아이를 조종하는 부모
아이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거나 아이를 과도하게 보호함으로써 아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끊임없이 조종하는 부모
ex) 과보호, 직접적인 간섭, 재정적인 문제로 속박, 자식을 모자라는 아이로 여기고 간섭함, 은근하고 미묘하게 간섭하는 것, 간접적으로 의사표현을 하여 다른 사람을 통하여 상대방을 조정하여 간섭함, 다른 자식과 비교하여 간섭하는 것, 무덤속에서도 자식을 조정하는 것 등등
-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부모 자신에게 깊이 내지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신체적으로 성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 잔인한 말로 상처를 주는 부모
인격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거나 얕잡아보는 투의 비난으로 아이로 하여금 극도로 부정적인 자아상을 만들어주는 부모
- 알코올 중독자 부모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술을 마시느라 부모 노릇을 조금도 하지 않는 부모


책의 전반부에서는 독이 되는 부모에 대한 유형에 대해서 저런 분류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상황에 맞는 상담자의 이야기도 함께 있어서 더더욱 상황을 받아드리기가 쉬웠습니다. 그런 다음 왜 부모님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파트 2로 넘어갑니다.

파트 2에서 가장 먼저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용서'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용서의 함정'에 대해서 강하게 이야기 해주어서 더 좋았습니다.

용서의 가장 위험한 면은 꽉 막혀 있던 감정을 발산할 기회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용서한 부모에게 여전히 분노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책임은 두 갈래 길로 뻗어 나갈 수 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거나 자신에게 가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부모'를 용서한 대가로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많응 상담자들으 고통스런 치료 작업을 피하려고 용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용서하는 것이 편안해지는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는 '용서를 하고' 치료 받는 걸 그만두었다. 그런 다음 더 심한 우울과 불안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환상에 매달린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란 용서하는 것이고, 나는 치유딜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모두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곧 용서라는 공허한 약속이 씁쓸한 실망감만 안겨준다는 것을 알게된다. 한순간의 평혼함을 경험하겠지만 그 느낌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자신들의 느낌이나 가족간의 상호 관계가 진정으로 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
만약 용서를 하더라도 정서적인 앙금이 완전히 가신 후에 해야 한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화를 낼 필요가 있고, 그토록 갈망했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용서하고 잊어라"는 말은 "없었던 일로 하라."라는 말과 똑같은 셈이다.
또한 부모를 용서하더라도 부모가 용서 받기 위해 뭔가를 했을 때만 용서해야 한다. 독이 되는 부모는, 특히 자식을 심하게 학대한 부모는 잘못을 인정하고 기꺼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줄곧 몹쓸 짓을 하고, 자식의 실재와 감정을 부정하고, 자식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부모를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것은 자식에게 필요한 정서적 치료 작업을 심각하게 방해할 것이다.
- 그들을 용서하지 말라, 용서에는 함정이 있다, p200~


그리고 아직도 어린아이 처럼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어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에게 가지고 있는 신화. '이렇게 행동하면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자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여러가지 대응 방법도 있었고요. 게다가 연습문제까지. OTL 전 아마 이걸 100번은 연습해야 할꺼 같아요. 어려웠어요. 반응하지 말고 대응하는 것이요. 그건 무리에요. 아아 어떻게;; 하고 읽었습니다.
방어적인 언어들은 '그래요?, 네 알겠어요, 그거 재미있군요, 물론 마음대로 생각할 자유는 있어요, 인정하지 않으니 유감이군요, 생각해보죠, 마음이 편안할 때 얘기하는 게 어때요?, 상처를 받았다니(속이 상했다니, 실망했다니)죄송하군요'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책임의 소재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어렸을때 우리가 부모로 부터 비난받던 행동들은 우리들의 잘못에 의해서 비난 받은것이 아니라 부모가 독이 되는 부모였기 때문에(자신의 정서적 프로그램을 부모로서 적립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모에게 받았던 것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에) 비난을 가해왔던 겁니다. 그래서 부모의 그런 행동에 대해서 분노를 터트려야하고 분노를 터트리지 못했던 많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분노를 터트리는 순서와 방법까지 안내해줬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애도의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가해자인 부모와 대면하는 방법이 나왔습니다. 편지, 전화, 대면 3가지 방법이 있지만 전화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며 편지 또는 대면이 좋다고 알려주며, 편지를 쓰는 방법과 대면했을시에 독이 되는 부모의 유형의 반응과 우리가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주위사람들(배우자, 자식, 혹은 친구들)을 위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격려해주면서 이 책은 끝났습니다. 아아 정말 좋은 책 이었어요.

역시 수잔 포워드 선생님은 앨리스 밀러 선생님보다 더 요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잔 포워드 선생님의 책은 2002년 판. 앨리스 밀러 선생님의 책의 초판은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정말 오래전 인걸로 기억합니다. 이 분의 출생년도가 정말 오래전 이었거든요.
앨리스 밀러 선생님의 저작(국내에 소개된 책들 중에서 양철북의 책 두권)들을 보다보면 이 분도 정말 힘들게 글을 쓰셨고, 많은 반대파들에게 비난받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정말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수잔 포워드 선생님의 책의 경우에는 앨리스 밀러 선생님이 고민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의 그 이론이 더 정리되어서 분류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더 많아졌나봐요. 수잔 포워드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받으면서 글을 쓰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거든요.  이 책은 보기도 이해하기도 편하도록 분류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정리도 되고 대안도 있어서 많은 분들에게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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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육아의 읽고 싶은 다른 책들
내적 불행 - 행복한 부모가 되기 위한 마음의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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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으로 앞부분을 제외하고는 잘 읽혔습니다. 태혜숙씨의 글은  처음 접했던 스피박 책의 번역에서도 느꼈는데, 저에게는 그 의미들이 잘 전달이 되지 않고, 혼란스럽다고 해야하나요? 뭐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때는 원서가 어려웠고 그래서 그런건가 했었는데, 단순히 그런 문제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은 크게 3파트로 나누어져 있었고, '식민지 근대와 여성주의 문화론', '근대적 여성의 탄생과 사적 공간', '공적 공간의 형성과 식민성의 극복'으로 되어있는데요.
그냥 뭐 편하게 말하자면, 파트 1에서은 접근, 파트 2와 3은 여러가지 면에서 바라보는 진실이었어요. 파트 1에서는 어떤식으로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서 태혜숙씨가 들어갔고, 임우경씨는 '민족'과 국가적인 부분에 대한 접근이 있었어요. 그녀의 글은 예전에 조한혜정과 우에노 치즈코의 교환 편지를 책으로 만든 책을 보면서 느꼈던 불편한점을 명쾌하게 지적해주었어요. 다만 친일을 했던 인사에 대해서 지적하는 부분에서 아쉬웠던 점은 있었어요.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거이 언급이 그다지 없었던 걸로 느껴졌거든요. 태생적 한계라고 보통은 지적하지만, 그렇게까지 넘어온것도 책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여성으로서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걸 알게되었어요. 그래서 뭐 더 그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임옥희씨는 근래의 '된장녀'의 전신인(해석되고 사용되는 의미에서), '신여성'의 의미에 대해서 다각도로 문제점을 지적했어요. 그냥 뭐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에게만 그런 잣대를 작용하는건 더하고 덜하고 차이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가 이 나라에서 큰 기반이 되는 그 때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도 좀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파트 2에서 부터는 그냥 잘 읽혔지만, 그 시절의 책들의 인용 부분에 대해서는 일반 독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 그대로 글을 사용해서 해석 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한자와 그리고 예전 한글들;;;; 저는 모른단 말이죠. OTL 이게 뭡니까. 게다가 인용이 나오고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은 없고 그냥 문장을 인용하면서 그랬다고 말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분도 있었어요!!! 책을 읽는 독자들은 관련 전공자만 있는게 아니라구요.
뭐 여튼 읽으면서 충격 받았던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여학교가 처음 생겼고, 그리고 여성들이 집단을 이루어서 교육을 받은것이 처음이었고... 그리고 여성들의 서로간에 교류를 하게 되었고 어울리는 것을!!! '동성애'로 보더군요. 게다가 신문마다 문제라고 논평들이 올라오고... 뜨아;;; 이 부분에 가장 뜨헉했습니다.
그 외에 자매품들이 정말 많았어요. <신여성>이라는 잡지의 태도도 정말 웃겼어요. 기가 찬다고 해야겠죠. 일상에서 여러가지 부분으로 접근해서 그런 현실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음식 문화도 그랬고, 식민지 시대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문제라던가 여성 소비의 문제 그리고 백화점 이야기 등등 그런 부분들을 읽다보니까 그때 당시에 '신여성(의식이 근대화 한 여성들)'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 알게되었습니다. 그건 그냥 '혁명'으로 느껴졌어요. 그 분들의 노력으로 지금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하니 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시절의 시각과 지금의 시각이 크게 바뀌지 않아서 놀랐어요. 그냥 그때 시각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게 가장 크게 느껴지던 부분은 '노처녀'에 대한 논리였어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이 참 많았어요. 접근적인 부분도 그렇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그렇게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분들(책을 만드는 출판사)의 의무가 아닌가 싶은데, 이 책은 그냥 뭐 그들만의 잔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자의 대상을 더 넓게하고 책을 편집했으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책이 되었을텐데 하는 그 아쉬움 말이에요. 좀더 팔리는 문제라던가 가볍게 포장하는 그런 접근의 시각이 아니라 다른 부분의 시각으로요.
항상 당신들이 말하는 '하위주체'가 읽고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언제나 그런 부분들은 가장 크게 간과되는거 갚아서 아쉽습니다. 해당 주체가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로 가득해서야 얼마나 의미가 있나 싶어요. 가장 중요한건 우리들이 그걸 알고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야하는 거자나요. 그건 그냥 온실속에 있는 화초이고 생활과는 격리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 꽃이 있는걸 많은 사람들이 보고 받아드리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쇼핑몰의 책 소개에는 저자가 임옥희, 태혜숙이라고 되어있는데요. 이 두분은 책의 한 부분을 쓰신 분이에요. 이 책은 많은 분들의 글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파트마다 저자가 달라요.

+
Y_Y 책 읽고 가장 머리에 담고 싶었던 본문들을 적었는데 이 망할 티스토리 덕분에 싹 날렸어요. 전체 선택해서 복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게다가... 전체 복사해서 새글로 쓰면 인용문만 사라지는 사태가 몇번이나. 글 스타일도 먹지 않고. -ㅅ-^^^^ 그래서 몇번 다시 복사해서 새글로 쓰다가 이렇게 된거죠.
그래서 자기중심적 도덕주의에 대한 저의 메모가 사라졌습니다. 신여성에 대한 본문 글도... 우에노 치즈코의 이야기도... '가정주부화'의 이야기도 사라졌어요. '가정주부화'가 이 책의 백미였는데 말이죠. 아 젠장. 그 논리는 대충이라도 정리하자면, 여성의 기술에 대해서 비숙련성 직업으로 정의해서 착취하는 구조에 대한 논리였는데. 우어어엉. OTL 아 좌절중입니다.
책은 언젠가 다시 빌려서 적을테야요. 게다가 가정주부화를 주장한 그 분의 책도 보고싶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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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를 위한 바로 그 사람 인가요>
바바라 드 안젤라스, 학지사

월덴님네 댁에서 북크로싱해서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찔리는 부분도 많았고, 주위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나 연애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께요. 곧 생일인 친구에게 선물할까 생각중입니다. 받아줄지 모르겠지만요. =ㅂ=;
책을 보면서 가장 찔렸던 부분은 '자존감' 파트 이었어요. OTL 쩝. 음 '사랑의 신화'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음 많은 것들을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다른 의미로 대처한다면 썩 어울리는건 아니자만, 사랑에 대한 광범위한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은 환상이나. 책은 파트별로 앞에서 요약정리를 보여주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본문 중간 중간에 "으윽~"하고 소리를 낼 만한 글들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사랑에 대한 신화는 크게 5가지가 있다고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 신화는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 그의 현실은 "관계가 잘 되기 위해서는 사랑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서로 융화할 수 있어야 하고 관계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
- 신화는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알 것이다" 그의 현실은 "푹 빠지는 한순간이지만, 진정한 사랑은 시간이 필요하다"
- 신화는 "완벽한 파트너라면 모든 면에서 나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 것이다" 그의 현실은 "한 사람 이상과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당신이 함께 있어서 행복할 수 있는 잠재적인 파트너는 많다"
- 신화는 "나에게 맞는 진정한 사랑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그의 현실은 "나에게 맞는 파트너가 내가 지닌 많은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지만, 모든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 신화는 "누군가와 강렬한 성적 공명을 경험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일 것이다" 그의 현실은 "훌륭한 섹스는 진정한 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성교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p67

비교적 초반 부분에서 '정서적 프로그램'에 대해서 소개해줬는데요. 정서적 프로그램은 사랑을 결정하는데 아주 큰 요소로 작용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정서적 프로그램은 성장하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대해 자신이 내렸던 결정과 믿음이라고 합니다. 출생에서 5세까지 정서프로그램의 50%가 형성되고, 5세부터 8세까지 정서프로그램의 30%가 형성된다고 합니다. 8세부터 18세까지 정서프로그램의 15가 더 형성되고, 그 이후가 5%를 나누어 갖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뭐 대충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요. 저 통계치를 보고 있자니... 그래도 그 5%로 사람들은 많은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결론은 과거에 대해서 정면으로 인지하고 그 상태에서 발전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지 과거에서 지배를 덜 받고 자신의 삶을 꾸리고 배우자를 고를 수 있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 조지 산타야아

그런 여러가지것들을 언급하고 나서 책은 "관계를 맺는 일곱가지 잘못된 이유"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압력(나이, 가족, 친구등), 외로움, 성욕, 삶으로부터의 도피, 성장의 회피,죄책감, 정서적 또는 영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다보면 여러가지 테스트가 나오는데요. 그냥 넘어가지 말고 꼭 해보시길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관계를 맺는 잘못된 이유중의 하나인 '영적으로 공허한지를 결정하는 테스트'를 하고 좌절하고 크게 반성했습니다. 전 44점 나왔어요. O<-< 공허함을 이기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책에서는 '일지를 쓴다, 명상하는 것을 배운다, 자연에서 시간을 보낸다, 생각하게 만드는 책을 본다'중에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낸다'를 제외하고는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볼 요량입니다.

그 다음 파트는 '"잘 될수 없는 열가지 관계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 해줍니다. 딱히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친구 관계도 해당이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_ 상대방이 당신에게 마음을 쓰는 것보다 당신이 훨씬 더 상대방에게 마음을 쓴다.
_ 당신이 상대방에게 마음을 쓰는 것보다 상대방이 훨씬 더 당신에게 마음을 쓴다.
_ 상대방의 가능성을 사랑하고 있다.
_ 상대방을 구원하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_ 상대방을 역활모델로서 존경한다
_ 외적인 이유 때문에 상대방에게 홀딱 빠져 있다.
_ 상대방과 부분적으로만 어울린다.
_ 반항하기 위해 파트너를 선택했다.
_ 전에 사귄 사람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파트너를 선택한다.
당신 파트너는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다. "


읽다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상대방의 과거의 배경과 그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가지 이유중에서 '분노중독자'에 대한 부분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터 억악된 슬픔은 성인기에 분노로 나타납니다"라고 책에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과거가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그 사람의 분노의 행동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공감>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제 분을 못 이기는'사람은 없다!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목적은 상대방에게 겁을 주어 감히 자신에게 대들지 못하게 하으로써 상대방을 지배하고, 결국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
분노 중독자의 테스트도 있었습니다. 그 항목은... 사소한 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폭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욕하고 소리지르고 위협등을 함, 참을성이 부족해서 먼가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극도로 짜증을 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하고 극도로 짜증을 냄,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걸 공격으로 해석하고 보복함, 문을 쾅 닫거나 전화를 확 끊거나 방을 어지럽히거나 하는 행위, 감정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모습, 자신의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나 상대방이 실수했을 경우 맹렬히 비난하는 행동,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냄, 물건을 던지거나 배우자나 아이들을 때리는 행동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행위 등등이 있었습니다.

책에서는 파트너를 만날때 어린시절에 얼마나 심각한 정서적 손상을 입었는지와, 어린시절에 입은 정서적 손상이 지금의 대인관계 능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파트너는 정서적 손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해줬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바꾸려고 노력해봐도 스스로 바뀔 의사나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 하니까요. 그럼 정서적 손상이 심한 사람과 관계는 피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바바라 여사는 이렇게 대답해줬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정상인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모두 독특할 뿐입니다. 우리의 독특성과 그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 정서적인 자유로 이끄는 열쇠입니다. 가장 큰 고통을 통해 가장 강력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상호노력을 통해 관계 속 당사자들은 과거의 정서적인 짐들을 오히려 정서적인 주춧돌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이는 사랑스럽고 치유적인 관계를 위한 기초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힘내야지요. -ㅅ-/// 으쌰!!  저스스로 매우 크게 결핍되었다고 생각했던 "자존감"에 대한 파트에서 기억에 남는 문구들은 "당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당신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당신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함부로 대하도록 서용하지 않는다."

다음 파트는 "융화"파트 이었습니다. 지금 만나는 상대방과 자기가 얼마나 융화되어 있는지 하는 테스트들이 많았습니다. 테스트들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자신이 바라는 부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파트는 "전념하기" 전념의 두려움에 대해서 지적이 있었고 그 대안들도 제시해주고 있었습니다. 헉헉. 책은 연애가 잘 되지 않는 분들에게도, 연애를 하지 못하는 분들에게도, 본인의 가족관계가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도,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었습니다.

+
학지사에서 나온 다른 책들(읽고 싶은 책들)
<부부 심리학>, <정서중심적 부부치료 - 부부관계의 회복>

북크로싱 http://walden3.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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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
이명희, 열림원

표지의 글씨가 인상적이어서 빌려보게 된 책. 이 책도 정말 단숨에 읽었다. 책을 펼치니 첫표지에 '2007년 문화관광부 선정 교양도서'라는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지난번에 '부안'관련 책 이후에 또 만나는 문화관광부 선정도서였다. 저자가 '이명희'라고 되어있는데, 사실 이책은 저자가 이명희라기 보다는 편집자 이명희라고 보는게 더 정확한거 같다. 출판사쪽의 편집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 출판사의 편집자가 하는 역활을 이 책의 저자인 이명희씨가 하고 있었다. 기획도 이명희씨 기획이니... 어찌보면 기획, 구성, 편집, 글에 이명희라고 해야할거 같았다. 책은 총 9분의 사회에서 어느정도(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성공을 이루었고, 그리고 페미니즘(혹은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개선해갈려고 노력하는 그녀들의 인터뷰 이었다. 질문은 이명희씨가 선정한거 같았고, 중간중간에 이명희씨가 바라보는 그 사람(인터뷰 대상)에 대한 설명이나 그 사람의 의견에 대한 느낌이 적혀있었다. 사실 나는 이명희씨가 바라보는 시각에 매우 공감하면서 본 편은 아니기에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좀 불편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편하기도 하였고, 그녀가 아무런 지적 없이 넘어가는 부분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인터뷰를 한 9분의 여성은... 두두둥!

트랭크 갤러리 사진작가_ 박영숙 '희망을 희망하라'
합리적 페미니스트_ 글로리아 스타이넘 '먹고 싶은 사람이 요리를 하라'
실르콘밸리의  CEO_ 김태연 '인생의 승객이 되지 말고 운전사가 되어라'
브로드웨으를 사로잡은 연출가_ 이브 엔슬러 '원더브라와 똥꼬팬티의 환상을 벗어던져라'
마법의 평화 메신져 유니언신학대학 종신교수_ 현경 '인생에 쓸데없는 건 다 잘라버려라'
21세기의 여성 사제_ 빅토리아 루 '묻지마 종교에 토를 달아라'
뉴욕의 관음특공대_ 묘지 스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캐나다의 차세대를 이끌어갈 100인 예술가_ 윤진미 '내 딸아 더는 착하지 않아도 좋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저널리스트_ 유숙렬 '정말 원한다면 세상이 다 말려도 올인해라'



*_*;;; <버자니어 모놀로그>의 저자도 있었다. 사실 '이브 엔슬러'가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저자라는 건 모르고 읽었었다. 소개글을 보고 그제서야 알게되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같은 계열의 책 <아마존...(제목이;;)>를 읽고 친구들과 좀더 솔직한 대화를 느끼게 되었어서, 인터뷰 한 사람중 한사람이 이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정말 즐거웠고, 인터뷰 글 거이 대부분을 즐겁게 읽었다.  책은 정말 즐겁게 읽었고, 느끼고 있던것을 다른 분들도 느끼고 있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대단했고 그래서 반성도 많이 했고, 그리고 자극이나 격려도 많이 되었다. 그리고 인지하지 못했던 종교에 대한 부분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그리고 화가나는 부분은 김태현씨의 인터뷰가 가장 많았다. 이 분의 경우에는 글의 저변에 깔고 있는 인식자체에 대한 불편함이었고, 본인이 이런것을 타고난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몰이해가 너무 심한데 이명희씨도 별불편함이 없이 넘어간것에 대한 실망도 컸던거 같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아마 인터뷰한 분들의 기대치가 더 있었거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기대치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실망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저런 시각은 보통사람인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불편하고 죄인처럼 느껴지게 했다. 나는 그녀(김태연)의 시각보다는 앨리스 밀러의 저작들에 있는 그녀의 주장(사실)에 전폭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한다.

여성에 대한 이미지 교육 프로그래밍은 너무 깊고 오래되었다. 전세계에 포진한 이 프로그래밍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진정한 배움이 아닌, 어떻게 보이는가, 무엇처럼 보이는가, 어떻게 해야 사랑받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프로그래밍은 바로 전 세대의 여성인 어머니에 의해서 혹은 다양한 종교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부리내린다. 그리하여 여성은 사랑받을 수 있기위한 어떤 특별한 존재로 보여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암시를 받는다. 근사한 여자로 보이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리라는 믿음을 줌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 이다.
- 원더브라와 똥꼬팬티의 환상을 벗어던져라, 이브 앤슬러, p  126

남자도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남자가 돈 버는 기계인가? 남자는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태어났는가? 남자도 꿈이 있다. 남자도 인간이다. 남자도 멋있는 인간이 되고 싶고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그런데 결혼하면 남자는 꿈을 다 접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을 지게 된다. 그러지 말자는 거다. 남자 여자 모두 같이 꿈을 꾸고, 접을 대는 같이 조금씩 양보하며 접어야지,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희생하는 구도로 만들지 말자는 거다.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특히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생명을 위한 것이다.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기 위한 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어떤 이가 도 다른 어떤 이를 억누르는 폭력적인 헤게모니 싸움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얼마만큼 시간이 더 필요한 걸까?
- 인생에 쓸데없는 건 다 잘라버려라, 현경, p158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아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근간이 되기에 더욱 중요하다. 현재의 젊은 여성들은 20년 전 페미니스트가 문제를 제기하고 이슈화하여 끊임없이 사우면서 이루어낸 터전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무엇인지 모른다' '페미니즘에 관심 없다' '그런 건 알고 싶지 않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 이들이 이를테면 여성으로서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 뜨거운 용광로처럼 견디기 힘든 현실 속에서 차별과 부딪혀도,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남자들에게 승진의 기회를 뺏겨도, 그대도 여전히 '나는 페미니즘에 관심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 내 딸아 너는 착하지 않아도 좋다, 윤진미, p 259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인터뷰중 크게 두가지 부분에 이명희씨가 공감하기 어려워했던 그 부분은 나는 큰 불편함이 없이 넘어갔었다.
"사회적 구조를 제외하고 '여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여자는 여자이기 전에 한 이간이다.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다. 둘 간의 유일한 차이는 생명을 생산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다. 인간을 나성과 여성으로,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유감이다. 세상에는 수백 개의 다른면이 있는데도 우리는 단 두가지 면밖에 없다고 믿는다. 이 세상을 둘로 나누는 것은 현실을 끔찍하게 왜곡하는 일이다."라는 그녀의 답변에 이명희씨는 이분법으로 사고를 나누는 것에 대한 문제점 지적에는 공감하지만, 성 자체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부분은 동의하기 힘들었다고 언급했다.
성이라는 정의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만들어 낸 정의라고 생각한다. 좀더 체력적으로 우위인 부분을 원래 타고난 남자도 있을것이고, 그렇지 못한 남자도 있을 것이고, 체력적으로 남자들 처럼 우위인 여자도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여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정의한 여성성과 남성성도 여성성이라고 해서 여성들이 타고나고 길러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가 정의한 성의 정체성의 부분은 남자나 여자나 반대성의 정체성의 부분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부분에 분명 들어가는 부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사회에서 정의한 성의 부분의 정체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그게 자의이던 타의 이던간에 사회에서 정의한 성의 정체성의 규율에 따르지 못하는 자들은 다수라고 칭하는(?) 보통(?)사람들에게 공격(비난)받는 것이 빈번하다고 생각한다. 그 '일반적'이라고 정의하는 것들도 지금이야 일반적일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고, 과거에는 그것이 분명 일방적인 것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그 굴레에서 모든것을 재고 판단하는것이 얼마나 무서운일인지 모른다는 말인가. -_-;;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불편하게 느꼈던 부분 '낙태'에 대한 부분이었다. 번역의 문제인지 나도 그런 부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그 두사람에 대해서 모두 불편함을 느꼈다. 항상 그 문제는 여성으로만 대상지어지는 부분이었다. 여성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지적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성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게 된 부분이라던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 피임이라던가 그런것들에 대해서 무지한 부분은 개인의 책임도 있겠지만, 교육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지 않는 교육 말이다. 그건 사회제도의 교육이나 사회의 가치관을 타고 내려오는 가정교육(?)모두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여성이 '낙태'를 선택할때 그 상대편 남자는 어디서 무었을 하고 있는건가? 그녀가 그렇게 자라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게 없는 상황이 되었을때 그녀를 그렇게 성장하도록 영향을 준 그 분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으신건지도 의문스러웠다. 상대편 남성도 동의하지 않고 아무런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한 여성들에게 여성들만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분노가 그냥 치밀어 올라왔다. 말도안되는 소리. 제도적으로도 낙태하지 않고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도 없이, 그리고 미혼모가 출산을 하는 것에 대해서 주홍글씨를 달아주는 이 세상에서 출산을 선택하는 여성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받고, 오직 여성만이 죄책감을 느껴야한다는 것은 말도 않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저런 책을을 보다보면 자신의 감정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선택의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견들이 참 많다. 부분적으로는 공감하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자란것에 대한 직간접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그게 부모던 선생님이던 사회이던)도 반성해야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만으로 치부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이고, 그리고 자신들에게 오는 비난의 화살을 벗어나기 위함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의 피해의식인가하는 의구심도 든다.

인터뷰내내 그녀의 의견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던 이명희씨와 인터뷰를 받은 김태연씨. 나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정말 짜증이 폭발할것만 같았다. 자기가 보는 부분만 보고 모든것을 판단해버린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자기가 그런 판단을 내리는것은 그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다는 인식은 전혀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그 어조는 말을 그대로 옮겼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집자 이명희씨를 통해서 걸러졌다고 해도 원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이명희씨 또한 그녀의 의견에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녀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과오의 반복을 성으로 나누어서 남성보다 여성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보는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좀 피해망상적일지도 모르지만, 남성은 용서하나 같은 여성들은 용서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걸 어찌 여성 개개인의 책임으로 지우려 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는 말인가. 구조적인 문제점을 스스로 느끼고 그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나길 똑똑하고 트여서...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그 구조적인 문제점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어렵다. 처음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계속 살고있다보면 그 문제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만큼 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이 없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나올 용기조차 나올 수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녀의 말대로 과오는 반복된다. 그걸 느끼는 사람들이 좀더 노력하는 것이고 그런 작은 자극들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나올 용기를 내는 것이 일반적인(?)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계기나, 이 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의문점 조차 갖기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들이 느끼는 그 문제점에 대해서 문제점이나 아니면 조금 이상하다는 것 조차 인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개인이 먼저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사회가 먼저 나서야 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몇세기를 넘어서 이어오는 가치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혼자 만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이고, 그걸 혼자만의 힘으로 이기는 사람들을 '영웅'이라는 호칭을 써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글에 대한 불편함은 그 영웅 호칭을 받은 사람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녀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내내 신기했다.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 자기애가 그렇게 꽃피웠는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고 자란 방식 그대로를 학습하면서 살아가는데 말이다. 주위에 누군가가 그녀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 그녀 스스로만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냈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그냥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머리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의 간극이 느껴졌다. 이 간극은 <차도르를 벗겨라>에서도 느낀 불편함과 비슷했다.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 나에게도 어디선가 그런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편함은 콤플렉스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넓게 보고 있어서에 기인하는 것인가. 어떻게 천성을 타고 나면 그렇게 자존이 강한 것인가? 아니면 부모의 학대가 있었더라도 그 주위의 어느 한사람이 간접증인이나 전문보호자가 있었다는 건가? 그냥 그녀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주위에 누군가는 그런 사람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런 역활 모델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앨리스 밀러의 주장에 나는 공감하고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나서 다르다는 건 나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차별적으로 타고났다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걸 인정한다면, 모든 구조적인 차별도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더하자면, 김태연씨는 이런 불편함도 있었다. 종교적인 불편함. 그리고 구미쪽의 사람들의 인터뷰나 자기 성공이야기를 읽을때 느끼는 그 불편함. 자뻑 혹은 자기자랑. 심하지만, 그녀도 분명 있었다. 편의상 통칭해서 비아냥거리는 단어로 '자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다른 분들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그 사람만의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 인터뷰 했던 박영숙씨의 글을 보면서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에서도 한가지를 제외하고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 불편한점은 사실 이명희씨의 본인의 생각을 더해서 내가 바라보는 입장에서 더 해석이 되어서 인거 같기도 하고... 뭐 여튼 그랬다. 정말 즐거웠던 이브 엔슬러. 우와 이런 사람도 있구나 했었던 현경. 종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빅토리아 루. 엄마는 희생을 하는 존재여만 하는 건가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된 묘지 스님. 제목부터 강렬했던 윤진미. 소신있게 밀고 나갔던 유숙렬씨. 다른 분들의 글에서는 그런 불편함이 없었다는 거(지금 현재는 느끼지 못했)다. 김태연씨의 글에 대한 불편함은 내가 느꼈던것 말고 다른 것들은 무었이 있었는가가 이 책에서 숙제인거 같다. 혹시 나와 같은 불편함을 느낀 분이 있다면, 그 불편함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겠다.


+







검색어에 걸린 <미친년 프로젝트> *_*;; 이건 뭔가???

그리고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외에 <굿 바디>라는 책도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책 부제는 '버자이너 모놀로그 그 이후 이야기'라고 되어있었다. 빌려봐야겠구만. <아마존...>이거의 완전한 제목은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 이었다. OTL  나의 기억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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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교과서>

리뷰/텍스트 2009. 2. 13. 23:10 by d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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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 뽕~!하고 반한 책 이었습니다. 역시 디자이너는 오필민씨. 우어어엉 >_<;;
부키에서 나온 책들중 일부는 이 분이 디자인 하신거 같아요.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요. 알라딘에서 보니까 이 분의 향기가 느껴지는 표지들이 좀 보여서요.

책은 학생들도 볼 수 있도록 한 페이지에 일러스트와 텍스트들이 비슷하게 공존하는 책 이었습니다. 1부는 폭력과 비폭력으로 폭력에 대한 여러가지를 보여줍니다. 텍스트와 일러스트가요. 2부는 비폭력주의자에 대해서 소개하는 파트였습니다. 책의 저자는 일본사람이었는데요. 그래서인지 비폭력주의자 소개에서 일본 사람의 비중이 컸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꽤나 있었습니다. 뭐 이건 제가 이 쪽에 무지해서 그런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에는 함석현 선생님이 소개되었습니다.
3부는 지금까지 있었던 큰 비폭력 행동에 대해서 소개해주었습니다. 4부에서도 일본의 비폭력 행동에 대해서 좀 많이 소개해주었습니다. 4부는 비폭력 대응에 대한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5부는 비폭력적인 삶에 대해서 소개하였구요.
이 책의 백미는 부록인거 같아요. 부록은 '비폭력 실천 방법 안내 1- 경찰과 이렇게 친해지자.'에서 경찰에 대응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나와요. 이 부분을 보면서 내가 사는 이나라나 일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쩝. 얼마전에 다시 읽었던 <창룡전>도 생각났구요. 부록 2는 '비폭력 트레이닝, 이렇게 하자'로 비폭력을 연마(?)하는 놀이법을 소개해주고 있었어요. 그리고 세계의 비폭력 연표가 마지막으로 들어있었습니다.


표지에 사용된 일러스트는 책의 본문에 있던 2가지 였는데요. 하나는 지구를 중심으로 동물과 사람들이 돌고 있는 주황색 일러스트, 나머지 하나는 아래의 연두색으로 여러 사람들이 원을 그리면서 달려가는 일러스트로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어른이 어린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어린이는 공권력(경찰이나 군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 공권력은 다시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은 돌고 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전해지는 일러스트 였어요.

책을 보면서 정말 대폭소했던 부분이 있었는데요. 일본에서 어떤 공장에서 폐수를 처벌해도 계속 흘리니까 마을 주민이 그 폐수 나오는 출구쪽에 시멘트를 부워서 몇일 동안 폐수가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었어요. -_=b 완전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통쾌했어요. 나중에 그 분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그의 행동은 뭔가 마음속에서 큰 해소를 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어요. 시멘트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책을 덮은 지금도 웃음이 계속 나옵니다.

인상적이었던 일러스트들을 찍어봤습니다.
일러스트 작가는 하시모토 마사루씨 였어요. 음 마사루인건가요. 두둥! 간결하면서 강렬한 일러스트들이 많았습니다. 평화운동가 일러스트들도 인상적 이었구요. 함석현 선생님을 빼고 아는 분이 그다지 없어서... 이게 비슷한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부키의 책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들
<내 아이에게 틱과 강박증이 있대요>, <삐딱한 예술가들의 유쾌한 철학 교실>, <인간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신부님 신부님 저자의 <까칠한 가정부들>, <까칠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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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애덤 필립스
책의 뒷표지나 날개에는 해외 언론이 격찬했다고 적혀있는데요. 저는 도무지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번역의 문제인가 원래 내용의 문제인가 저의 기대치의 문제인가 생각해봤는데요. 그냥 내용은 간략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광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정의하고 학문으로서 쌓아가지만, 그에 비해서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멀쩡함에 대해서는 정의되는 일이 거이 없다. 정도? 인거 같습니다. 광기와 멀쩡함에 대해서 섹스피어가 많이 응용되고, 그리고 원문이 영어로 쓰여져서 그런지 옥스퍼드 사전에 대한 이야기도 보였습니다. 읽고 자신에게 적용해서 생각하는 책이라기 보다는 뭐 저런 논쟁도 있었구나만 남는 책. 저는 뭐 그래서 1부 읽고 던져버렸습니다. -_=;;;;;;;;;;;;;


*

<사람으로부터 편안해지는 법>, 소노 아야코
소노 아야코 시리즈는 전부 읽고 싶었는데요. 이 책을 읽고 좀 좌절했습니다. 저 자신이 생각했던 거랑 좀 너무 달라서요. 책자체는 가볍게 읽기에 좋은 책 이었습니다. 뇌리에 남은 문장도 꽤 있었구요. 책 제목은 낚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나이를 든 소노 아야코의 가치관과 생활에 대한 간결한 이야기였습니다. 기대치가 낮았다면 매우 만족스러웠을 책 이었을거 같아요. 얼마전에 서점에 갔다가 리수에서 나온 다른 책을 봤는데 책 날개의 포장도 낚는 내용이었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내용이었는데요. 책의 본문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런 광고들을 접하면 저는 좀 화가나요. "진지한 사람에게 장난하지 말아줘요."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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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는 없다>

리뷰/텍스트 2009. 2. 10. 07:41 by dung


양철북에서 나온 앨리스 밀러의 다른 저작 <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를 읽고 도서관에서 <사랑의 매는 없다>를 빌렸습니다. 현재 절판된 <천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도 있으면 빌렸으면 하는데요. 도서관 검색에 아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없나봐요. 출판사에 전화해서 B급 책이라도 팔아달라고 해야할까봐요. 사실은 그 전화도 전화지만... 사실 저는 양철북에 전화해서 앨리스 밀러의 다른 저작도 전부 출판 할 계획은 없냐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판사 사장님을 하고 싶어요. 보고 싶은 책들을 번역해서 본인이 제일 먼저 읽고 싶거든요. 좋아하는 만화책, 화보집, 책들로 컬렉션들을 늘려가는거죠. 그러다보면 비슷한 취향인 사람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거같거든요. 사실 저는 만화쪽이나 책쪽이나 드라마나 애니쪽이느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별로 만나본적이 없어요. 주로 혼자 희죽거리는 관계로 동인지를 할 때도 투인을 한다던가 함께 버닝해서 뭔가 같이 100제를 그린다던가 그런것들이 부러웠어요. 이야기가 삼천포로 나갔네요.

<사랑의 매는 없다>도 역시 책의 모든 부분을 줄치고 싶었어요. 물론 먼저 본 <폭력의...>를 봤을때보다 충격이라고 해야하나요? 마음에 크게 남은 부분은 좀 덜했지만요. 그치만 이 책을 먼저 봤다면 <폭력...>쪽보다 이 책이 마음에 더 크게 남았을거 같아요. 이번 책에서도 앨리스 밀러가 어릴적에 느끼던 성경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서 밀러식의 해석에 저 또한 크게 공감했었습니다. 저는 그런 부분들은 간과하고 편협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었거든요. 텍스트라는건 대화하는걸 그대로 받아적더라도 지금의 우리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저런 의미의 단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라졌다던가 아니면 의미가 변질된 단어도 있을터이고... 하물며 그대로 받아적은것이 아니라 서술자가 재해석하여 만들어졌고 그리고 편집자가 재편집하여 재탄생을 계속 한것이 지금의 우리들이 읽고 있는 종교가 남긴 책들이니까요. 게다가 이 나라는 번역본의 또 번역본이니까요. 허허허. 그게 진리라고 생각하면 분노가 일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그때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고 씁쓸할 따름입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이유로 매를 맞은 아이가 자동차 앞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오히려 부모가 무서워 눈치만 볼 것이다. 그런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되며,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다. 벌을 받을 때, 아무도 자기를 보호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는 보호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쌓인다.
이와 같은 잘못된 가치들이 아이의 몸에 정보로 저장되어, 그의 세계상과, 훗날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런 아이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가 없으며, 육체적인 고통을 위험 신호로 인식하여 알리지도 못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면역 체계가 해를 입을 수 있다. 본보기가 되어줄 다른 사람이 없는 아이는 폭력과 기만의 언어를 의사소통의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하여 이를 사용할 것이다. 대게 성인이 되면 과거에 억눌렸던 무력감을 계속 억눌려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과거의 교육제도를 변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1부 눈감아 온 어린 시절의 진실, p83-84

나이든 부모를(도덕적으로 강요를 받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부모가 안겨준 고통을 느끼고,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경험한 잔혹함의 정도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파악해야 한다. 성인 여성은, 친절한 남자도 어린 시절에 학대를 경험했다면 난폭해질 수 있다는 점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한 여성들처럼, 자신의 어린 아이와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고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은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용서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젊은 어머니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들을 과거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가 아니며, 진실을 부인해서는 안 되고, 악을 악이라고 인식해도 괜찮다는 사실이다.
- 3부 폭력과 체벌의 대물림을 막기 위하여, p166-167



뭐 여튼 책을 보면서 저의 과거시절에 '간접 증인'과 '전문가 보호자'가 누구였는지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간접 보호자'는 다롱롱이에요. 아주 어릴적이 아니라 다롱롱이 어느정도 자랐을때 부터요. 생각하면 안습. '간접 보호자'가 자신보다 어린 동생이라니. 하아. 고마워요. 다롱롱. 그리고 저를 지지해준 그녀 C선생. 전문가 보호자는 저의 선생님 두분이고... 앞으로 더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예전에는 '설사인생'을 커밍 아웃하고 살 때는 주위에 친구들이 '치질'이나 '변비', '설사'로 고생하는 사정에 대해서 서로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거든요. 변비인 지인인 그녀가 알려준 특효중에 하나는 화장실에 가서 바세린을 발라라던가... 설사가 심한 제가 지인들에게 알려준 지혜는 너무 자주 화장실에 간 날은 자기전에 후시딘을 발라라던가;;; 하하하 -_=;;
그와 비슷하게 지금은 과거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니까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힘들었던 부분들을 좀더 알게되었어요. 다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치열하게 지금까지 살아왔더라구요. 그냥 웃고있어도 그 웃음이 그냥 얻어진것이 아니었어요. 저말고 상담을 받아본 사람이 주위에 3 사람이 있었고, 상담이 아니더라도 상담대신 종교에 의지하고 있다고 상담받는것에 대해서 이해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자신이 상담을 받아야 할 수준이라고 이해하는 친구들도 있었구요. 좀더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었어요. 물론 상담받으면 좋겠다고 저 자신이 생각하는 친구들을 설득하는건 힘들고 아직도 저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편견이라는건 그 만큼 무서운거고 그걸 이겨낼 수 있다고 지금은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전문가 증인'은 무리지만, '간접 보호자 지인이나 친구'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고 앞으로 이겨낼 거라고 지지해주는건 정말 설명할 수 없는 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본인의 문제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ㅇㅇ년 넘게 그렇게 살아왔는데 단기간에 그렇게 된다는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천천히 좋아지고 있는것이고, 원래 조금 뒤로 후퇴 할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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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면 알라딘에서 관심이 있는 단어로 이루어진 책을 찾아보는게 취미라서 '비폭력'으로 검색했다가 찾은 책이 <내 아이를 위한 비폭력 대화>였습니다. 근데 어라? <비폭력 대화>의 번역자였던 '캐서린 한'이 <내 아이를...>에서는 '감수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문해버렸죠. 책은 마셜 로젠버그 아래에서 캐서린 한과 같이 공부했던 다른 분이 지은 저작이었습니다.
책은 <비폭력 대화>보다는 좀더 접근이 쉬웠어요. 특히 '기린과 자칼'의 설정이었어요. 성인용(?) <비폭력 대화>에서는 보지 못했거든요. <내 아이를...>는 전반은 비폭력 대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후반에는 유치원 교사나 부모가 자녀와 할 수 있는 비폭력 대화의 연습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인용 <비폭력 대화>는 단계단계마다 단어들의 의미의 인지와 비폭력대화 연습문제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이가 없다면 굳이 <내 아이를...>를 읽을 필요는 없는거 같아요. 그렇지만, 앞으로를 생각한다면,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주위에게 우리들이 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생각한다면 읽어두는게 좋을거 같아요.
얼마전에 비폭력 대화 사이트를 가봤는데 새로 교제가 나왔더라구요. 친구용 하나 사서 선물하고 같이 공부나 해볼 생각입니다. 경기도쪽으로 가게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건 비폭력대화 고급코스에 등록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휴가때 신랑과 비폭력 캠프에 참여하는 거 입니다. DVD도 있던데... 이것도 살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사게된다면 연습해보고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저는 뭐 <비폭력 대화>를 2번 열심히 읽었고(연습문제도 열심히 풀었어요) 그리고 얼마전에 <내 아이를...>도 읽었는데요. 뭐 별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있을때는 화가나지 않았을 상태인거 같아요. 즉 주위를 배려할 여유가 있을때야 '비폭력 대화'를 해야지 라고 생각하지, 그냥 그렇지 못할 때는 뭐 그냥 했던대로 나가버립니다. O<-< 그래서 가끔 쥐구멍에 숨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저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텍스트=그 사람'으로 인지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서요. 이게 자신에게 화살을 향할때는 그야말로... 아이고;;

<내 아이를 위한 비폭력 대화>에서 소개된 '비폭력 대화'에 대한 소개_

마셜 로젠버그는 1963년에 '비폭력 대화'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의 시민운동이 그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비폭력 대화 이론은 날로 다듬어지고 발전했다. 비폭력 대화 지도 요청이 쇄도하자 마셜 로젠버그는 1984년 비폭력대화센터(CNVC)를 설립했고, 이 센터는 국제적인 기구가 되었다. ...... 마셜 로젠버그는 상대방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네 단계를 소개한다. 바로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이다. 이때 자기 공감, 솔직한 자기 표현, 공감으로 듣기가 뒷바침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비폭력 대화가 하나의 방법이나 모델이라기보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취해야 할 태도라는 점이다. 비폭력 대화는 자신과 상대방의 욕구,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고려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 비폭력 대화는 인간은 모두가 하나이며, 모두가 같은 욕구를 가진 존재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똑같은 에너지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상호 대립이 아니라 성호 협조하는 관계, 남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힘이 필요하다. 비폭력 대화는 이기고 지는 삶이 아니라, 공동의 삶, 인간과 자연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서로 존중하는 삶을 추구한다. 비폭력 대화는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표현이 비폭력 대화에 포함 된다.

- 비폭력 대화란 무엇인가?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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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폭력 센터
http://www.krnvc.org/
바오에서 나온 <비폭력 대화>
다른 관련 책은 <자칼 마을의 소년 시장>도 있음.
그리고 NVC센터에서 발행한 <비폭력 대화 워크북>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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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국방부 불온서적 온리전을 할 때는 리스트를 만든것에 어이없어 하면서 저런 기획전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이디어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불온서적 리스트들을 얼핏 보면서 "음 저책도 있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었습니다. "저 리스트에 든 이유가 뭘까?"하는 여러가지 궁금증이 있었지만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월덴님의 블로그에서 북크로싱을 하기에 신청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불온서적'이 된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다른 책들에서 언급되었던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 책이 그렇게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없었는데, 뒤쪽의 하종강 선생님의 글이 가장 큰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그게 다른 나라들의 현실과 우리가 그렇게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 하나의 길을 제시 한걸로는 볼 수는 없는지 이해 할 수가 없어습니다. 거기에 있는 양반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정말 알고 싶어졌습니다.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에 대해서 저자들이 손해배상 청구를 냈다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가 또 궁금합니다. 뭐 대충 예상도는 뻔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아.

사실 저는 부끄럽게도 스스로도 그런 정체성이 약했고, 그리고 그런쪽 보다는 사회에서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가족적인)이라고 하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매우 분개하는 편 이었거든요. 사실 개인적(가족적인)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여과없이 그대로 사용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달리 떠오르는 단어도 없어서요. 개인적인(가족적인)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인데요. 그걸 그렇게 쓰기에도 뭐랄까 석연치가 않습니다.
최근 여러가지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비극이나 그런 사건을 모두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언론이나 정부의 태도에 정말 분노를 느꼈고, 그건 개인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부분이 더 많은 것이고 그리고 저는 사회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알려주고 개선해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저의 기준에서 국가는 그런 존재에요. "국가가 어떻게 국민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저렇게까지 눈이 멀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게 알고 있는데 모르는척 하는건지 아니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점점 그런쪽으로만 흘러가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건너 불구경인거 같아서 정말 분노가 머리 끝까지 올라가 버립니다. 더 짜증나는건 치환하고 있는 저 자신이겠지요. 분노의 정점의 이유는 사실 저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핑계라면 장소가 멀다는 이유. 정말 치졸하죠. 그렇다고해서 여기에만 활동하고 있는게 아닌데 말이에요. 어릴때보다 더 나빠진거 같아요. 아니 인정하기 어렵지만 정말 나빠졌어요.  
노동도 저 멀리가 아니라 같은 부분이고 함께 해야하는 부분인데 저 자신이 보이는 부분에서 빠져 있었어요. 그것도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데 말이에요. 교육이란건 정말 무서운거 같아요. 하종강 선생님과 홍세화 선생님의 강의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정말 더 절실해졌습니다. 의식하지 않으면요. 그냥 재생산하는 존재에요. 뭘 하던... 그게 친구를 대하던 직장 동료를 대하던 나중에 자식을 낳아서 자식을 키우던... 인터넷에서 좀 규모가 있는 클럽에서 운영진과 시삽을 오래 했었는데요. 그 때는 정말 몰랐었어요. 지나고나서 제가 얼마나 재생산을 하는 존재로 활약(?)을 해왔는지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바보는요 자기가 바보인지도 몰라요. 지금도 여전히 바보인데 그래도 나름 좋아졌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염치가 없어요.
나이 먹어서 힘들게 읽으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은데도 참으로 고치기 힘들어서 고통스러워요.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서 배워야하는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나라의 정부가. 이거 아니면 저것 뿐이죠. '잃어버린 10년?' 이라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더 암담할 따름입니다.
이 정부에서 저의 아빠쪽 본가의 정체성은 하나의 기준으로 해석되겠죠. 재미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요. 저의 아버지의 외할아버지는 광주에 가면 동상이 있어요. 일본의 식민 지배 시절의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애쓴(?) 결과 입니다. 그 외할아버지의 따님인 아빠의 어머니는 할아버지랑 결혼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에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시골의 면장으로 알고있어요. 프랑스식이라면 그건 분명 '부역'을 해야하는 사람으로 판결날거 같아요. 식민 정부에 협조해서 나랏일을 한 사람이니까요. 지식인이라고 명명되는 부류의 사람이었구요. 아빠의 말로는 그 옛날에 전축을 돌리면서 사군자를 그리시는게 취미였다고 하지만... 그건 그냥 저 보기에는 현실도피로 느껴졌습니다. 근데 아빠의 엄마의 동생인 외삼촌은 월북하셨어요. 집안에도 월북하신분이 몇분 계세요. 김일성 대학을 나와서 남북 이산가족 만남 방송에 나와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작은 할아버지도 계세요. 저의 아빠쪽 본가는 친일인가 아니면 빨갱이인가 아니면 독립운동 가문일까요. 아니면 모두가 시대에 휘말린 희생자일까요. 아니면 암묵적 동의를 하고 살았던 사람일까요. 모든것이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흑백논리의 맥락으로 정의하면 그냥 빨갱이라고 불리어질거 같습니다. 어쩌면 이건 저의 피해자적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는 걸요. 현실이니까요.

이 책은 원래 단행본으로 기획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작은책 강좌를 모아서 낸 책이라서 페이지가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이해도 더 쉽게 되었구요. 사실 학술적인 책들을 보면 그 간극이 더 멀어진다고 해야하나요? 먼가 계속 현실에 있는 이야기인데도 현실이 아닌 저 멀리의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 느낌들이 많았는데, 이 책은 그런것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자와 이야기하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문학 계열 책을 처음 읽는 분이 있으시다면 정말 권해드리고 싶어요.
작년에 작은책에서 하는 강좌중에 박노자 선생님 강자만 가봤는데요. 다른 선생님들 강좌도 들을껄 하는 후회가 좀 많이 들었습니다. 금년에는 어떤 강좌가 있는지 자주 들러서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한미 FTA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정태인 선생님의 글은 정말 이해가 쉽게 되었어요. 예전에 녹색평론에서 나온 <한미 FTA 핸드수첩>을 읽었거든요. 저는 좀 어려웠어요.


+ 어제인가 민변협에서 메일이 왔어요. 방송 찾아봐야겠습니다. 쩝.

[쇠고기고시 헌재결정 검토결과 발표회 및 보고대회]를 엽니다

미국산 쇠고기 고시 위헌 헌법소원 청구인단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미 메일 등을 통해서 알려드린 바와 같이 2008년 6월에 10만명의 청구인단의 뜻을 모아 민변은 헌법재판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에 대한 헌법소원 및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제기하였습니다.
민변은 관련 전문가들과 협의하여 헌법재판소에 수차례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아울러 심도 깊은 검토를 위해서 공개변론을 열어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공개변론도 열지 않은채 2008년 12월 26일 헌법소원을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헌법재판소 기각 결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문제점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계속적인 문제의 지적과 감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민변은 헌법재판소 기각결정의 법적인 측면, 과학적(의학적) 측면, 국제법적인 측면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아울러 지난 헌법소원 진행 경과에 대하여 중간보고를 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청구인단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미국산 쇠고기수입고시 헌재결정 검토의견 발표및 소송경과 보고대회>

□ 일시 및 장소
- 2009년 2월 5일(목) 오후 2시~4시40분
-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

□ 진행 순서

○ 1부 : 헌재결정문 검토의견 발표(14:00~15:50)
 
사회: 장유식
- 인사말: 최병모(민변 법률지원단장)
- 헌재 결정의 문제점 검토  : 좌세준(민변회원, 헌법소원 대리인단)
- 헌재 결정의 과학적, 의학적 검토 : 우희종(서울대 교수)
- 헌재 결정의 국제법적 검토 : 최승환(경희대 교수)
- 질의 및 토론
 
○ 2부 : 헌법소원 보고대회(16:00~16:40)
 
- 헌법소원 진행 경과 보고 : 한택근(민변 사무총장)
- 국민소송 참가비 사용 현황 및 향후 계획 보고 : 한택근(민변 사무총장)
- 질의 및 답변

※ 당일 발표 및 보고대회는 6․15 TV 등으로도 생중계될 예정입니다.
※ 당일 발표된 자료는 청구인단 여러분께 메일로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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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타이핑 해야겠다는 부분이 하도 많아서 지금 타이핑하면서 또 추렸습니다. 거이 모든 페이지를 접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부모를 반드시 존경하고 사랑하고 부모가 원하는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할 필요는 없다는 그녀의 말은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몸이 괴로워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부모의 요청대로 행동했을때 몸이 받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안다면 현실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는 것에 저도 매우 공감했습니다. 과거에 학대받았던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 이 사실이 주류에서 외면 받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점차 그녀의 주장에 동감하고 비슷한 연구자료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했을때는 안심했습니다. 앨리스 밀러가 1923년 생이니까 과정을 다 마치고 한참있다가 책이 나왔다고 해도 그것도 매우 오래전이 되겠지요. '그래서 그런건가?' 했습니다. 뭐 아직도 주위에는(저의 지인들은 아니지만)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서 매우 강조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옛 직장의 상사는 딸을 손으로 때린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매로 때리면 사랑이 덜 느껴진다고... -_- 먼눈.
폭력을 사랑으로 치환하는 것은 오랜 전통인가봅니다. 그건 결코 사랑이 아니죠. 폭력은 폭력일 따름. 폭력의 행사는 본인의 마음속의 분노가 원인이지 상대방이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기준에 상대방에 따르지 않았을때의 분노이지, 상대방의 그 행동 자체로 분노를 느낀다는 건 말도 않돼요. 그리고 폭력을 행사함으로서 본인의 스트레스 해소에 대해서는 뭐라 할말이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들의 변명이 궁금해요. 뭐라고 할지...
사실 서양에서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경'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요. 네번째 규율(십계명)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는 걸 보고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존재는 하는구나 라고 알았습니다. 그래도 이 나라만 하겠나 싶지만요.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다음에 도서관에 가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사랑의 매는 없다>도 빌려봐야겠습니다.
부모도 피해자고 자식도 피해자고... 그리고 그 자식이 자라서 노력이 없다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겠지요. 부모의 부모도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이기도 하구요. 그 연결고리를 절단하기 위해선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할꺼 같습니다. 아직도 보고 자란 습관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고, 나의 감정은 온전의 나의 것을 전제로 깔고 대화해야하는데 화가나면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학습된 방식, 들어왔던 방식으로 재현을 하고 말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되겠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됩니다. 저의 모습에서 부모의 모습을 보니까요. 그건 정말 견딜 수 없어요. 부모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포괄적으로 어느 정도는(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깊이의 나락이 얼마큼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지 깊다는 것, 그래서 좀처럼 위로 올라오기가 힘들다는 것. 공부해도 반복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노력이 부족한걸까요? 라고 가끔 생각하지만,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그 결론에 대해서 저는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거 같아요. 책에서 나온 사람들 처럼. '그렇게...까지는 아니다.'라고, 그래서 아직도 고통스러운 거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말이죠, 정말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몹시 두렵습니다.


+ 그녀의 도서들
<사랑의 매는 없다>, <천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는 현재 절판. 알라딘쪽 리뷰를 보니 그녀의 저작중에 제일 엑기스라고... 별 다섯개로도 모자르다는 말에 좌절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에게 애정, 관심, 보호, 친절,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부모가 늘 자기와 의사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런 선물을 받은 몸에는 좋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 사랑받고 자란 어른은 훗날 자녀에게 그와 똑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선물을 전혀 받지 못한다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그 최초의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갈망이 '과거의' 그 아이를 평생 떠나지 않는다. 이 갈망은, 훗날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 또한 사랑을 덜 받고, 또 교육이라는 핑계 아래 무시당하고 학대받은 아이일수록, 어른이 된 이후에 자기 부모나, 부모와 같은 존재에게 더 강하게 매달린다. 그리고 엣날 그 중요했던 시기에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들에게 기대한다. 그것이 몸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몸은 자기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잊지 못한다. 텅 빈 구석이 있으면 그것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 수록, 과거에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받는다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게다가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기대를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주로 자기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전가한다. 이와 같은 메커니즘을 의식하고(진실한 감정에 대한) 억압과 부정을 극복하여 우리가 지나온 어린 시절의 현실을 되도록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훨씬 그 이전부터 충족시키고자 했던 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자신 안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부모가 베풀어주지 않았던 관심과 존중, 감정에 대한 이해, 필요한 보호, 조건 없는 사랑을 스스로에게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과거에 바로 우리 자신이었던 그 아이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을 심리요법에서 배우려면, 우리를 지금 모습 그대로 받아줄 수 있고, 보호하고, 존중하고, 가엽게 여기고, 또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이 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학대받던 옛날의 그 아이를 위해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기본적인 경험이 전제되어야 한다. 
- 프롤로그 폭력과 체별 앞에 무력했던 어린 시절, p17~19

아마도 학대를 당한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같이 그런 태도(잔혹하기 그지 없는 온갖 사건을 긍정적이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해석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것)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는 자기가 보고 느낀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해석한다. 곧 제3자가 보았으면 명백한 범죄라고 규정할 행동을 선행으로 해석하려고 애쓴다. '간접 보호자'도 없이 가해자 앞에 통째로 내던저진 상황에서, 아이에게는 감정을 억압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이 아이들이 훗날 성인이 되어 다행히 '전문가 증인'을 만나게 되면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가해자를 동정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또 가해자를 위해, 가해자가 느끼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을 느끼려 하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부연하자면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명확하게 비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치로 몸은 큰 짐을 벗을 수 있다. 이제 몸은 어른이 된 자기에게 어린 시절의 그 비극적인 과거를 위협하듯 상기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 성인이 자신의 모든 진실을 알고 싶어 할 때, 몸은 당장 그가 자기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보호해준다고 느끼게 된다.
나는 폭력적인 방식의 '교육'을 학대로 간주한다. 인간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존중받아야 할 아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일종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이가 모욕과 품위 상실, 학대를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에 맞서 저항한다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성인이 된 아이는, 그런 교육을 본보기로 삼아 대물림하고 배우자와 자기 자녀를 대하며, 직장과 정치판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다. 요컨데 과거에 두려움에 떨던 그 아이의 불안을 외적인 권력의 도움을 받아 떨어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그런 교육을 행한다. 그로 인해 인간을 경멸하는 자들과 독재자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한번도 존중받아본 적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성인이 되어서는 거대학 권력의 힘에 기대어 사람들에게 그 존경을 강제로 얻어내려고 한다.
권력에 대한 굶주림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절대로 사라지지도 충족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정치에서 목격할 수있다. 더 큰 권력을 차지할수록 그런 인간들은 결국에는 반복충동에 빠져 도망치고 싶었던 과거의 그 무력감을 되살리는 행동을 저지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 프롤로그 폭력과 체별 앞에 무력했던 어린 시절, p25~26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억압했던 고통을 자기 안에서 느끼고, 몸이 감정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를 정신적으로도 받아들여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후에 부모에 대한 관계까 유지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이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결코 사랑이 아닌, 지금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어린 시절의 부모에 대한 애착, 곧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애착은 감사와 연민, 기대, 부정, 환성, 복종, 불안,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 몸의 메세지,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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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훌륭한 콘서트가 막을 내려도 나는 결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의 감정이 정확히 그것과 같았다. 너무도 훌륭한 연주였다. 마지막 피날레에 가까이 다가올 때 나는 마음속으로 '한곡 더!'를 외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조금 더 오래 살아 있기 위해 무척 애를 쓰셨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악기를 챙겨 집으로 돌아갈' 순간이 왔다. 장례식이 끝난 뒤 모트레이크의 공동묘지를 걸어 나와 런던의 차가운 부슬비 속을 걸어갈 때 - 그때 내리던 부슬비를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 마음속에서 내가 다시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없으며 아버지가 영원히 내 삶을 떠났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내가 마음속에서 느꼈던 것은 이것이었다.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인가! 아버지의 삶은 내게 얼마나 강한 영감을 주었는가! 내가 아버지 옆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운 좋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해 먼 길을 걸어갈 때. 나는 내 삶에서 훌륭한 콘서트가 막을 내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을 결코 놓치치 않을 것이다. 고마워요. 아버지.
-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생의 아름다운 마무리, p26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게서 오직 '잘못 얹힌 두 장의 벽돌'만을 발견함으로써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거나 이혼으로 치닫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 안에서 '두 장의 잘못된 벽돌'만을 바라봄으로써 절망에 빠지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생각하는가?
실제로는 거기 훨씬 많은 훌륭하게 놓은 벽돌들, 완벽한 벽돌들이 존재한다. 잘못된 것의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사방에는 멋지게 쌓아올려진 수많은 별돌들이 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다. 그 대신, 바리볼 때마다 우리 눈은 오로지 잘못된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잘못된 것뿐이고, 우리는 그것만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때로 우리는 슬프게도 실제로 '매우 아름다운 벽'을 폭파시켜 버린다.
안간은 누구나 두 장의 잘못 놓여진 벽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 안에는 그 잘못된 벽돌보다 완벽하게 쌓아올려진 벽돌들이 훨씬 많다. 일단 그것을 보는 순간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게 된다. 그때 우리 자신과 평화롭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벽돌 두장, p29


오랜만에 책을 보면서 내내 웃으면서 봤습니다. 108개의  즐거웠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교훈과 유머가 있었어요. 처음 벽돌 에피소드를 읽었을때는 머리가 "뎅-!"하고 울렸습니다. 저의 이야기이기도 해서요. 읽다가 죽음을 앞에둔 호주 수행승의 이야기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녀로부터 병원에 입원한 누군가를 방문할 때는 환자가 아닌 인간 그 자체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환자와 대화하는 것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맡기고."
정말 어려워요. 그건. 눈앞에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냥 일상을 물어본다고 해도 그건 고통스러운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되자나요. 어떻게 하면 즐거웠던 나날들이나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아기를 경청 하는 것도 힘들어 하시는데 잠자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데 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잠자는 얼굴을 지켜보며 그 옆모습을 뇌리에 남기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이제는 발을 주물러도 아프다고 하시는데,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보면 고통인지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르는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저는 그 눈물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그걸 그냥 지켜보면서 닦아 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당신을 만나서 나는 행복했고 당신의 존재가 지금의 나의 행복을 있게 해준 존재라고 말해야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랑 이야기한 당신의 일대기를 책으로 내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물어보는 일 조차 힘든 상태가 되어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하는 일은 당신이 이야기 할 때 그저 웃어주는 것 뿐이에요. 아프지 않도록 좀더 몸이 좋아지도록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력합니다. 너무나도.

+
이 책은 북크로싱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좋은 책을 북크로싱 해준 월덴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나저나 저의 블로그는 트랙백을 할려고 하니 불가능하다고 뜨는군요. -_=;;; 뭐가 문제인지. 콜록. 트랙백->  http://walden3.kr/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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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사태 이후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 정권은 다양하고 상호복합적이었던 미국과 세계와의 관계를 선과 '악의 축'이라는 이분법적인 관계로 단순화했다고 캐플란은 비판한다. 그는 미국 흑인 여성 소설가 토니 모리슨을 인용하면서 용어의 개념화 폭력을 비판한다. "어떤 개념을 정의할 때, 의미는 개념화되는 객체가 아니라 개념화하는 주체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모든 개념화와 관계 설정은 필연적으로 권력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주체가 불순한 의도로 그 관계를 설정할 때 그 자체가 폭력이라는데 있다.
- 탈식민시대의 미국문화읽기<차이를 넘어서>, 제국과 오염된 언어, p78


에드워드 사이드를 기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앨피에서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책(정확히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서 지금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책 이었습니다.)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많이 생각났습니다. 비교를 하자면 <차이를 넘어서> 쪽이 좀더 우리네 시각으로 깊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피박 입문서 <스피박 넘기>도 생각났습니다.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예전이나 탈식민 시대라는 지금이나 조금(혹은 다르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우리들을 지배(억압)하고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사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랬습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그냥 뭐 그렇게 우리들이 재현되는거구나."라고 생각하니 할말이 없어졌습니다. 최근의 중국에 대한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시각도 그러하구요. 저 또한 그 예의 대륙 시리즈를 봤습니다. 과거는 다들 잊어버리나봐요. 오십보 백보라는 것도 잊어버리죠. 그건 웃을 일들이 아닌데 말이에요.
아 정말 짜증이 납니다. 분노의 마음은 그 부분들을 보고 일반화를 이룰려고하고 그 바탕으로 편협한 말을 하고 싶어지거든요. 참으려고 하지만 아 욕이 나와요. 심히 많이. 저 교만한 잡것들. 저 교만은 정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시각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던가? 제목이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에서 묘사되던 서양인들이 생각났습니다. 두통이 심하니 도끼로 머리를 쪼개던... 그들은 뭐라고 해명할지 궁금하네요. ㄱ-
요즘 신문들을 보면 그냥 하나의 사건이 입장과 견해와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보여지니까 뭐랄까 설명하기 어려운데 숨어버리고 싶은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저런 글을... 어떻게? 나중에 쥐구멍에 숨고 싶지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주로 듭니다. 책에서는 주로 인종적으로 하위라고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재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건 사실 예의 그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재현이기도 하자나요. 재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최근의 사태들을 생각하면, 멀리 갈 것도 없네요. ㅁㄴㄹㅂ씨. 저 또한 스스로 재현 할 수 없는 존재이겠지요. 소인이 쓰는 글들이 화제가 되어서 언론에 다루어 진다면 뭐라고 재현할지 그냥 눈에 그려집니다. 대다수의 우리들은 모두 하위주체 인가 봅니다. 스스로 입장을 해명할 기회도 없이 모든것이 검열되고 그들의 입장으로 재현되는 존재.
제인에어의 반대 시각인 식민지배를 당했던 그네들(혹은 우리들)의 버젼의 그 소설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번역본이 있나 없나 찾아봐야겠네요. 전 제인에어 어릴때 매우 좋아해서 몇번이고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그 다락방에 있는 현 부인이 그렇게 된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렴풋하게 알꺼 같습니다. 그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재현자이며 방조자이기도 하며 그녀를 그렇게 만든 협조자 이게도 하겠지요. 제인을 포함해서요.

책에 대해서 사실 가장 말하고 싶었던 부분은 표지 일러스트 입니다. 그 일러스트가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들을 들게 하더군요. 결론은 명백한 불쾌함 입니다. 사슬을 깨는 사람의 크로키를 반전한 느낌의 일러스트 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근육질의 남자 이었어요. 여기서 하는 말. 근육질의 남자이군요. 아쉬웠습니다. 좀 많이. 틀이나 굳어진 것들을 깨부수는 건 굳이 근육질의 남자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외소한 남자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근육질의 혹은 외소한 여자나 어린 아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몸의 한 부분이 없는 사람이라던가요. 가장 바람직한건 다양한 존재들이 사슬을 깨는 느낌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것들을 넘어서는 책에 그런것들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미지인거 같아서 좀 많이 아쉬워요. 저 일러스트는 그냥 지금까지 우리들 사회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한것 뿐인거 같아요. 강한 존재가 먼가를 세우고 일으키고 부수고 그 강함은 힘의 강함. 그래서 근육질로 채현되는 것. 결국 우리는 근육질의 강한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서 기존의 강함을 깨부숴야 하는 메세지도 있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문 디자인은 신선했습니다. 각주를 하단이 아닌 책의 중심(제본되는)쪽으로 빼서 거이 2단 단행본으로 만든 방식도 신선했습니다. 기존의 인문학 책들에서는 보지 못한 편집 방식이었어요. 본문을 박스에 넣었는데 위와 아래가 여분이 적당해서 시원해 보이는 구조도요.

+
고백하자면, 저는 사실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말아서요. 현재는 그 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OTL  기억나는 문장은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서 우리는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의무가 있는데 말이지요. 뭔가 흐름을 못 타면 산 책도 읽기가 힘들더라구요. 변명아닌 변명이었습니다. 관심의 흐름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 다시 돌리기가 어려운거 같습니다. 지금의 관심은 동일하다면 동일한 방향이겠지만, 좀더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책들을 찾아서 읽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체성에서 그런 부분은 결코 이탈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돌고 돌아서 돌아가겠지요. 스스로를 위한, 혹은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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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

리뷰/텍스트 2009. 1. 13. 08:52 by dung


남자들에게는 여자들을 미워할 이유가 많다. 남아는 우선 어머니와 똑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여자에 대한 적대감을 경험하게 된다. 남자아이들이 세상에서 태어나 최초로 친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인 까닭에, 아이는 맨 먼저 그녀처럼 되고 싶어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녀는 사실 삶과 죽음을 결정하지 않는가? 소년은 이처럼 '위대한 어머니'와 하나가 되고 싶은 소망과, 그러다가 자기가 파멸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 사이에서 우왕자왕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년이 만일 어머니처럼 된다면,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없고 상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과 비슷한데, 독립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소년은 기만당하고 만다.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가정에서만 막강하고, 가정을 벗어나면 힘이 없다는 사실도 발견한다. 이것 역시 그를 실망시킨다. 때문에 소년은 어머니와 비슷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그리 오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녀 가까이에 머물고자 한다. 어머니와 비슷하게 되는 것 대신에 이제 그녀를 소유하길 원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아버지와의 경쟁이 시작된다. 그러면 원래 그가 가졌던 소망, 어머니와 비슷하게 되고자 했던 바람은 이제 자신에게조차도 기이하게 보인다. 마침내소년은 어른이 된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고, 그런 소망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자신이 가진 여성적인 면을 억압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여자들이 남성적인 면을 업악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보다 훨씬 강하다. 왜나하면 남자들은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우월권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우월권은 다른 성에 대해 느끼는 시기심을 시인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다른 성에 대한 시기심을 갖기가 훨씬 수월한 편이다. 진료 기록에 따르면, 여자들의 페니스에 대한 시기심이 남자들의 질, 가슴과 출산 능력에 대한 시기심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모든 사회는 성별 간에 발생하는 시기심을 다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남녀가 서로 대립하면, 사회는 소년 소녀들에게 다른 성처럼 되고 싶은 바람을 억압하는 교육을 시킨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결국 남자들과 여자들의 시기심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경멸의 대상이 되므로, 적대적인 - 피해를 주는 성향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령 한 남자가 성별 간의 시기심을 느끼게 되면, 다른 남자들이 혹시 자신의 그런 감정을 눈치채고, 그가 남자가 맞는지 의심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해 한다.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남들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드러내놓고 여성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한다. 특히 다른 남자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그렇게 한다. 이로써 그는 여자와는 가능하면 최대한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이 순간만이라도 자신의 여성적인 바람을 숨긴다.
이런 현상은 동성애자들의 차별 대우에서도 나타난다. 동성애 남자들은 다른 성처럼 사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남자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하여 동성애자들은 사회가 원하는 성별 간의 대립을 허물어버린다.

- '나'는 시기하지 않는다 <시기심>, 롤프 하우블, 성별에 대한 시기심, 여자에 대한 적대심, p242, 에코리브르

...흐음. 했습니다. 남성들이 자신이 가진 여성적인 면을 억압해야 한다는 사실에서는 매우 공감했습니다. 사실 남성의 기준에서 그런 생각들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저는 놀라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저런 입장들을 재생산을 열심히 하고 살아왔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많이 남았던 부분은 성별에 다한 시기심 파트. 그리고 성서에 나온 카인과 아벨의 일화에 대한 해석. 시기심을 자극하는 광고에 대한 이야기. 재미있는 책 이었습니다. 많은 에피소드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해줬습니다.
가장 거시기 했던건 저의 오그라드는 부분을 절실하게 느꼈다는 것 이겠죠. 살면서 타인에게 시기심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요. 뭐 그냥 별로 인식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내가 계속 시기했었구나 라고 느끼니까 좀 충격입니다. 최근에는 신랑 덕분에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너무 오그라들게 알게되어서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는데 말이죠. 이건 더블 쇼크. O<-<

시기심은 상대에게 보이지 않으면서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 자신을 감추고 가장하는 간계.술수.술책등을 발명했다. 그래서 시기심은, 가령 자신의 가삼을 산산조각낸 상대의 우월함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시하고, 보지 않고, 알지 못하며,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처럼 한다. 그리하여 감추는 데 있어서 도사가 되는 것이다. 시기심을 감추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비밀스런 음모를 토앻 상대의 우월함을 보고도 자신을 드러내고알니는 기회를 모두 차단해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은근히 상대의 우월함에 대해 비난.조소.조롱.멸시를 보낸다. 그는 시기하는 자가 가진 능력으로 자신을 평가하면 중간 정도, 아니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 쇼펜하우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기심과 혐오가 함께 유발했던 상대. 혐오감이 우선하기 때문에 그를 더 시기했던건지, 시기감을 느끼고 있는데 험오스러움을 알고 더더욱 시기하게 된건지 이제와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뭐 복잡한 감정입니다. 가끔 그 사람이 꿈이 나오고 아직도 그 사람에게 피해자인 입장인 나 자신만 있는거 같아서 더 그런거 같네요. 분명 가해자인 입장인 저 자신도 존재하는데 마이죠. 그 사람의 자신은 티없이 깨끗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포스 때문일까요. 그사람이 자신은 그런 면은 절대로 없다고 하지만, 나의 썩은(?) 시선에는 충분히 보였거든요. 교만함. 그 교만함. 참을 수 없었어요. 자매에 대한 그 교만함. 그걸 애정으로 포장하다니.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가 용서 할 수없는 범주의 생활습관을 혐오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걸 내가 시기하고 있다는 걸 괴로워했다가 정답인거 같네요.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타인에게 평가 받는것이 불쾌했었어요. 그 사람이 말하는 진실과 내가 느끼는 진실은 달랐는데, 뭐가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진실일까요? 태초에 선함을 타고 난 존재는 없다는 저의 생각과... 그냥 종교의 차이인가 라고 생각할려고 해도 살면서 만난 일부 특정 종교인들의 자신에 대해서 과잉적으로 생각하는 그 의식의 기반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지;;;;; 아 울고싶어요. 살면서 만난 특정 종교의 일부의 사람들을 보고 일반적으로 느끼는 저를 견디기 힘듭니다. 이런 글을 찌질하게 적는 자신도. 정말 쌓인게 많구나. 이건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닌가. 그치만 나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폭력을 재생산하며 분노를 담은 혐오의 텍스트들을 배설하는 사람. 뭐 그런겁니다. 자신은 혐오스러운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바라보면 달라지는 건 뭐가 있을지, 그냥 이대로 내가 존재하고 나는 노력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건 교만이겠죠. 이게 어디 노력이냐. 매우 가뿐하게 털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용감하게 인정하자! "라고 생각하면, 근원은 진심으로 저의 쪽에서 보기에는 '자의식 과잉'이 그 사람에게는 '사실'인것이 부럽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한번이라도 되고 싶어요. 부끄럽지만, 이게 진실이라면 진실이겠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저도 그런 인정을 받고 싶었다는 것. 그건 정말 부러운거에요. 평가 절하가 아닌 평가 이상을 받는 다는건.

우리가 시기심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강하면, 시기심은 우리 자신의 인식을 넓혀주는 시놓로 사용할 수 있다. 시기심은 우리의 가치, 명예욕과 정의감에 대해 해명할 수 있는 열쇄를 제공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적절한 것인지 어떤지라는 의문, 또는 우리를 어저면 더 행복하고 만족하게 만들어줄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길 경우이다.
시기심으로 나타나는 결핍은 극복할 수 있는 것과 극복할 수 없는 것과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극복할 수 있는 결핍이란, 갈망하는 재산이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결핍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시기심을 야심에 찬 - 고무적인 시기심으로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심은 우리에게 힘이 나도록해준다.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갰다는 우리의 생각은 갈망하는 재산을 단계적으로 획득하겠다는 태도로 교체해야한다. 이는 우리가 실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맞게 우리의 눈 높이를 맞추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노력이 가져오는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라 자기 가치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적대적인 - 피해를 주는 시기심을 완화시킨다. 그리고 우리가 갈망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더 이상 불필요하게 비방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발전할 수 있도록 그를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
극복할 수 없는 결핍의 경우, 결핍을 바라보는 입장을 바꿀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결핍을 수치스러운 오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과정을 고쳐야 하는데, 즉 자신이 원하는 재산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만족해야 한다. 진정으로 만족하면 사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결핍이 전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얻을 수 없는 재산에 속박되어 있는 동안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 할 수 있다. 일단 자신을 옭아매던 마력이 깨지만, 그 재산 외에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 있다. 행복감을 증진시킬 가능성이 엄청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책임할 정도로 소흘히 했던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다.
발자크는 그의 <잃어버린 환상들>에서 시기심을 "이룰 수 없는 희망, 실패한 재능, 좌절한 성공, 거부당한 요구들이 도망쳐서 숨는 끔칙한 도피처"라고 서술했다. 이로서 시기심을 건설적으로 그복할 수 있는 방법이 어럼풋이 보인다.
실망을 극복하고 또다시 실망하게 될지 모르는 경우에 대비해 희망을 잃지 않는 방법에 관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가진 능력 가운데 현실적으로 정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여유 있게 다시금 시기심을 품지 않을지에 대해 살펴보는 방법에 관해서도 잘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이 시기를 할 때 흥분하지 않는 방법 역시 잘 알아야 한다.

- <시기심>, 자기 관리와 시기심 참기, 자신의 시기심으로 부터 배우기, p390

이 책도 오필민씨 디자인 입니다. 표지에 그려진 시기심을 담은 일러스트가 좋았습니다. 아마 이토 준지씨가 보면 좋아할꺼 같아요. -.-;; 표지 일러스트가 소용돌이거든요. 핫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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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어어어어어!!
재미있습니다.!!!!! 우어어어!!! 완전 시원해요!!! -_-//// <- 가 저의 감상 포인트 입니다. 화장실에서 심심하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책 입니다. 인생 상담인데 화장실에서 볼 수준으로 재미있고 시원하고 간결하게 답변하는 것도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분은 진정 능력자입니다. 그래서 우어어어어!!!! 능력자!!! 어준 아저씨는 능력자에요.!! 원츄!

이 책을 사서 봐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친구 오빠와 사귀자 친구와 사이가 틀어졌어요" 이었어요. 저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는 가끔 연애 관계 사이에 끼어서 매우 난감했던 적이 몇번이나 있었거든요.
크게는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그녀의 남동생 사이에서 그리고 몇년전인 가장 친한 친구중의 한 사람인 모모군과 그녀의 여자친구 그리고 그녀의 지금 결혼한 남자 사이에서요. 저한테 분명 문제가 있는거 같아요. 그전까지는 별로 인지하지 못했는데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역시 문제는 저한테도 있었던거 같습니다. 저의 처신이 좋았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거든요. 비겁하다면 비겁했다가 답인거 같습니다.
그의 답변은 "음. 일단 욕부터 하자. 이런 나쁜 년. 지가 뭔데. 지가 동생이면 당신은 연인이다. 동생이 벼슬인가. 그리고 누가 오빠와 눈 맞을 줄 알았나. 연애, 삶의 기획 바깥에서 벌어지는 불가항력 사변이다. 천재지변과 '다이다이'라고. 그걸 어떻게 사전에 상의해. 게다가 당신을 오빠와 사귈 주제가 못 되는 여자라 여긴 거라면 지가 친구 자격 없는거지. 사과는 지가 해야지. 혹여 지 생각엔 오빠가 너무- 귀하신 몸이라 그런 거러면, 그럼 치료부터 받아야지. 둘 중하나야. 나쁘거나, 미쳤거나. 그러니 욕부터 먹어야지. 담에 보면 대뜸 헤딩해버려. 콱! 왜? 거기 치료 차원이라고 봐야지. ...... 그럼 어쩌나. 어른들의 연애, 범죄 상황 아닌 한, 누구도 개입 권한, 없다. 그게 어른들 연애의 기본이야. 주변인들, 의견 개진 조언 권고 할 수 있어. 때론 경고 의무도 있고. 하지만 거기까지야. 분노 표출, 진도 방해, 이별 강요, 누구도 못 해. 그럼에도 관계의 중단이나 지속을 강제할 권리가 가족이란 이유로 천부인권처럼 자동 부여된다고 오인하는 거, 우리나라에서 유난해. 전술한 이유로. 그러니 다 생까고 이것만 기억해. 당신, 죄, 없어. 그리고 그거 당장 당신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의 가족에게 수용되고 싶은 거 인지상정인데, 자기 잘못 아니고 자기가 해결할 수도 없는 일에 메달리는거, 삶의 낭비야. 그 시간에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그 남자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즐거울까에 시간 써. 나머진 생까. 친동생인데......? 아냐, 그래도 돼. 잘못한 건 개야."

이거 읽고 저는 우어어어!!! 탄복!! -_=;;;; 이 나이에 탄복했습니다. 그때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불편한 감정의 이유가 저거(!) 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거든요. 관계는 그랬어요. 어릴때 단짝인 초등학교 동창(A)었어요. 뭐 그녀와 저는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사이였구요. 그리고 학창시절에 그냥 적당히 아는 사이었던 다른 친구(B)가 등장해서 가끔 세명이서 보고 놀았었어요. 저는 C라고 명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구B에게는 아주 잘생긴 남자 동생(D)이 있었어요. 당시 친구 A와 D군은 같은 가게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구요. 저는 그 가게에 가끔 놀러가서 A뿐만 아니라 D군이랑도 잘 놀았죠. 저의 성향은 좀 여성적인 부분과 좀 거리가 있어서 특히나 남동생들이 저를 따르기도 했었거든요. D군도 그런 케이스였고, 뭐 만화도 비슷한 취향이라서 연락도 하고 그런 사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A와 밥을 먹고 놀고있는데 A가 D군을 불렀습니다. 셋이서 잘 놀았죠. 저는 사실 연애에 무심한 편에다가 눈치도 꽝인 관계로 그게 뭔가 의미가 있다는 걸 몰랐어요. 왜나면 뭐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근데 A양은 그게 저한테 D군과 사귄다고 커밍아웃을 한거였던거에요. 이것도 어떻게 알았나면요. B양이 전화해서 요즘 D군이랑 뭐 이야기하거나 만난적 없냐고 물어봐서 A양과 같이 밥먹은걸 이야기했거든요. 근데 그때부터 B양으로 부터 나오는 건 험담. 험담. 험담. A양은 D군과 사귀기 전에 학교 커플이었던 F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직전에 F가 군대에 간 상황이었죠. A양이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 남들에게 그다지 잘 말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저는 F와 헤어진지 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눈치 없었던 저는 B양에게는 A양의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이걸 A양에게 말해줘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하는건가 매우 난감했었어요. A양에게 가서 D군과 사귀는 거냐? 라고 물어봐야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뭐 저는 그냥 계속 B양에게 A양 욕을 들으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근데 문제는요 D군이 철이 없었는지 A양과 데이트를 하면 그걸 B양에게 말을 다 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B양은 대놓고 D군에게 A양의 험담을... 그리고 D군은 그 이야기를 그대로 A양에게... 그리고 저는 A양에게 원망아닌 원망을 들었죠. 그 후로도 B양의 A양의 험담은 계속 되었고, A양과 D군이 사귀는 동안에는 계속 되었던거 같아요. 깨지고는 더 했던거 같기도하고... 뭐 지금은 기억이 아련합니다만, 만약 지금이라면 그때 어떻게 했을거냐면요. 우선 B양에게 A양의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했겠죠. 불편하다고... 저는 암묵적으로 B양의 이야기에 동조하고 있었던거 같았거든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로요. 누나인 심정은 그런 심정일까요. 솔직히 말하라면 A양이 저의 남동생과 사귄다고 말했으면 저도 화가 났을거 같아요. 그때는 A양이 얄팍해 보였거든요. 과거의 A양의 그랬었어요. 그리고 A양이 저에게 그녀의 연애에 대해서 커밍 아웃 했을때 정확한 상황을 물어보고 불편한 부분에 대해서 말할거 같아요. 친구의 남동생을 사귀려면 그런 얄팍함을 버려달라고. 그 알팍함이라는 것도 저의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그래도 친구로서 그 정도의 예의는 지켜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동생이 그런 얄팍함이 아니라 절실한 사람과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지만, 그래도 아닌 부분으로 서로를 위하는 연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느낌인거 같아요. 그녀가 말하는 대기 순번이 없는 연애요. 대기 순번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거든요. 그게 그녀가 나에게 한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정체성을 이해 할 수 없는 저로서는 그녀의 연애는 얄팍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저의 진실입니다.

더 심했던건 고등학교때랑 몇 년 전인 다른 이야기는 저도 함께 막장으로... 달렸습니다. -_=;;; 허허허허. 중간에서 들은 험담들을 어떻게 처리 해야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먹는 건 욕. 멈추라고 해도 욕. 이건 다 욕이네요. 뭐 그랬습니다.
마지막으로 몇년전의 친구의 연애사에 끼었던 그 때는 저도 같이 설사하고 잠 못자는 나날 이었습니다. 당시에 정말 화가났던거는 친한 친구 M의 여자친구 이었던 그녀의 행동 때문이었던거 같아요. 후회하는건 그녀에게 졸라 욕해주지 않았다는 것. 그걸 돌려서 말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와 지금은 그녀와 결혼한 분에 대한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막판에 저는 폭발해서 주위 지인들에게 지금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걸 잘했는지 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뭐 저는 그 남자분이 제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냥 열폭했거든요. 지금와서 매우 후회하는건 그 화상들에게 대놓고 까지 못했다는 거에요. 주위 사람들에게 모든 정확을 알린건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뭐 저 자신이 받을 오해를 생각하면 깔 수 밖에 없었넌거 같다는건 <- 역시 변명이겠죠. 욕 하지 않고 주위 사람에게 정황을 말한 저 자신에게 실망이에요. 욕이 최곤데. 욕 먹어도 싼 인간들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니 전 바보 같았습니다. -_- 웬 착한 척. 웬 예의 차람. 상대방은 헐벗은 행동을 하는데 그런게 다 뭔 소용이었는지.
원초적으로 행동하는 분들에게는 그분들에게 걸맞는 대화를 해야지요. 얼마전에도 또 반성하는 일이 있었어요. 거절을 거절로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으로 해석하는 그 양반에게 뭐라고 해야할지. 그냥 말했어요. 당신과 밥 먹는 일은 아마도 절대 없을거라고. 이쯤 하면 아시겠죠. 역시 슬픕니다. 모두가 이해 할 수 있는 국제공증 대화법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해봅니다. ㄱ-

뭐 저의 경험은 이정도로... 이 책을 읽고 남는 것은 "자존감의 중요성"이었어요.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어느정도 선을 그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어디에서 저의 얄팍함을 기억하는 분들에게.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얄팍한 저를 보고도 참아주며 계속 남아준 분들 감사합니다. 소생 노력하면서 살겠사옵니다.
그나저나 책은 제본의 문제일까요? '건투를'의 글자 상단이 잘려 나가서 그게 좀 아쉽습니다. 이건 분명 제본의 문제라고 생각함. 뭐 정확하게 잘리는건 무리지만 그래도 그래도... 라고 외칩니다. 표지가 정말 좋았어요. 김어준씨 스러워요. 히힛. 어제부터 현태준씨가 그린 김어준씨 표정을 흉내내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3=)// 윤고딕 220 좋아요. 매우 사랑하는 서체 중에 하나 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태준씨의 일러스트를 보면서도 폭소했었습니다. 앞으로 이책은 화장실에서 종종 볼 꺼 같아요. 당분간은 만화책을 들고 가는 건 안녕입니다. 안녕-!

더하기_ 지금에 와서는 하는 분노의 욕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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